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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종려주일

관리자 2018-03-21 (수) 00:27 6년전 1392  

분문 ) 막11:1-10, 삼하6:12-19, 히12:18-24 / 종려주일 

                                                         

종려주일을 앞두고, 묘하게 오버랩(overlap)되는 대상들이 있다. 이명박과 예수이다. 그리고 서울과 예루살렘이다. 비교 자체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왠지 함께 생각하면 얻을 메시지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사람은 시기적으로는 2,000년이란 공간을 사이에 둔 지도자들이지만, 그러나 자기의 시대에 대통령과 왕이란 최고 지도자에 오른 이들이다. 이명박은 국민의 압도적 득표로 권좌에 올랐고, 예수는 한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한 후 금요일 낮에 십자가의 부끄러운 처형을 당한 후에 세계인의 가슴에 왕으로 오른 이시다.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이병박은 서울시장 시절에 ‘이 서울을 하나님께 바칩니다’라는 기도로 유명해진 사람인데, 예수 역시 망가진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으로 회복시키고자 목숨 걸고 입성하신 이로써 유명해진 분이다. 이 둘은 자기들의 수도(首都)를 붙들고 씨름하다가, 결국은 최고의 명성을 얻은 이들이 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화려했던 이명박은 10년이 못되어 희대의 사기꾼으로 취급당하면서, 부끄러운 지도자의 초상(肖像)이 되었다. 그것도 역사상 가장 초라하게 입성하신 나사렛 예수가 역사의 무대에서 진리와 평화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그 시간대에 체포되었다. 이는 그가 서울로부터도, 예수로 부터도 역사의 죄인으로 심판을 받게 되었음을 말한다. 

 

무엇이 이 둘을 그렇게 차이(差異)나게 하였나? 전자는 서울과 민족을 이용하려고 욕망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이었으나, 후자는 예루살렘과 민족과 세계의 구원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제 나사렛 예수의 그 외로웠던 예루살렘 입성의 여정에 얽힌 내용들을 좀 더 깊이 묵상해 보자. 

 

우리는 이번 사순절 순례에서, 예수님의 여정이 지역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주목한다. 그것도 사마리아(첫 과)에서 예루살렘(마지막 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 둘은 모두 예수께 전혀 호의적(好意的)이지 아니한 곳들이다. 아니 적대적(敵對的)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그런 점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들어가시려는 까닭은 남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어떻게 보셨는지가 중요하다. 그의 일관된 행보를 주목하면, 다음의 판단이 확실하다. 

 

좁게 로는, 예수님에게는 사마리아나 예루살렘 모두가 구원 받아야할 ‘길 잃은 양’이요 ‘회복되어야 할 현장’으로 보셨다. 하지만 그 문제 해결은 오직 당신만이 감당할 과제들이었다.  

넓게 로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넘지 못한 당신의 복음은 결코 세계화될 수 없다고 보셨다. 당신을 미워하고 죽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그런 사람들까지도 품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품을 그곳들에서 충분히 확인시켜야만, 또 다른 수많은 이방 사람들(세계 사람들)이 안심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은 결코 무모한 선택이 아니라 새 역사를 열기 위한 정면 대결의 무대였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당신 생애의 모든 것을 걸고 던진 ‘마지막 승부’였다. 그 길이 무슨 길인지 모르고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도 잘 아셨던 길이었기에, 그 길목으로 향한 행진에서 당신이 얻어내시려는 것은 더욱 뚜렷했다고 본다. 그것도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시면서 까지 얻어내시려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오늘 세 본문들을 주목(注目)하면, 주님이 내다보시는 목표물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바로 예루살렘(Jerusalem)이다! 세 본문에는 예루살렘이 핵심 주제로 꽉 차있다. 복음서의 예루살렘은 지금 예수께서 상대해야할 대상이었고, 구약의 예루살렘은 다윗 성이란 이름으로 어떻게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는지 그 기원(起源)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신서의 예루살렘은 탈(脫) 지역화 된 영원한 새로운 목적지로 자리하면서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롭게 대망의 도성(都城)으로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1) 예수께서 보시는 예루살렘은 정말 지금처럼 되어서는 아니 되는 모습이었다.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났어도 너무도 잘못되게 벗어난 모습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해야하는 예루살렘이 지금은 회칠한 위선과 가식의 종합센터가 되었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죽이려 드는 중범죄의 현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2) 그 때의 예루살렘에 대한 실상은 예수님의 다음의 탄식 속에 다 들어있다(마23:37-3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3) 결국 예루살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나? 진정 시온성(예루살렘)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는 일이었다. 위선자와 거짓 세력이 판치는 도성이어서는 아니라 진정한 메시아가 참 경배를 받으셔야 되는 도성이 되어야만 했다. 즉, 그런 점에서 지금의 예수님의 관심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구약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다윗 성의 모습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의 기원과 그 존재 이유를 다시 보게 한다. 

① 그곳은 본래 왕 다윗으로부터 전 백성이 하나님의 법궤(말씀)를 모시면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경배를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 축(軸)으로 올려 세웠던 곳이었음을 밝혀 주고 있다.

 

② 다윗은 이방인인 오벳에돔이 자기들이 모셔야할 여호와의 법궤를 잘 모시면서 복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가 앞장 서 그 법궤를 전 국민적인 행사로 승화시켜 그의 성으로 모셔온다. 육보일배(六步一拜)의 늦은 발걸음으로 모시면서,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 드렸고 왕은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추었다. 그 춤 때문에 의복이 풀려 내리는 바람에 왕의 하체가 드러나는 해프닝이 있을 정도였다(20절). 하지만 백성들은 즐거이 환호했고(15절) 왕과 함께 전심과 온몸으로 경배 행위에 동참했었다. 

 

③ 여호와께서는 그 때부터 다윗과 그의 나라를 강성하게 하셨다. 통일 왕조를 이루게 하셨고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역사가 가장 흠모하는 모델의 시대를 이루게 하셨다. 그게 바로 예루살렘의 기원이었고 회복되어야만 할 본래의 가치였다. 

 

4) 이 다윗 성의 거룩성의 회복을 위하여 택함 받은 무리가 바로 이 날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모인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들이었다. 결코 우연한 행사가 아니었다. 이 왕의 입성에 따른 환영 행사는 비록 다윗 시대만큼의 화려하지는 아니하지만, 그러나 다윗 일행의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5) 그 환영의 특징(特徵)들을 보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일은 오시는 왕의 입성임을 예고한 구약 스가랴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6) 특히 그들 대부분은 가난한 단벌옷의 주인공들이었기에, 그들이 그 때 겉옷을 벗어 예수의 오시는 길목에 깔아드린 일은 일종의 ‘알몸 경배’의 성격을 띈 것으로서, 예전의 다윗의 하체 드러난 해프닝과 연결되면서, 다윗 경배가 재현된 현장이었음을 보여 주었다고 본다. 

 

7) 그 후 예루살렘은 어떻게 되었나? 예수 죽이기에 깊이 동참하였으나, 성령시대를 맞이하면서 회개하며 예수의 백성들로 돌아왔고, 세계교회의 모교회가 되면서 세계선교의 전초(前哨) 기지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바라신 대로였다. 

 

서신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복음이 땅 끝으로 확산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대체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바라 볼 정통성을 가진 새 예루살렘을 마련하셨다. 그게 바로 ‘하늘의 영원한 도성으로서의 새 예루살렘’이다(22-24절). 그것을 전한 내용이 바로 히브리서 본문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땅의 예루살렘에는 소망을 두지 아니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의 피 값으로 하늘에 마련하신 영원한 공동체인 새 예루살렘에는 반드시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 길을 향하여 행진 중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렇다 

 

왕의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의 잃어버린 백성들을 찾아 회복시키려는 확고한 의지와 함께, 새 시대의 개막을 열망했던 백성들의 희망과 꿈이 어우러진 놀라운 생명의 축제현장이었다.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당신의 양들을 향한 주님의 끈질긴 관심과 열정이 놀랍고 놀랍다! 그리고 그 선한 목표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놓으신 그 모습에, 우리의 마음과 관심도 모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 때 관심하다가 지금은 지쳐서 포기하거나 외면하며 살았던 ‘나의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은 없는 지를 다시 찾아보자. 그것은 나의 포기가 곧 주님의 포기는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은 최후 순간까지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선한 부담감’을 주시는 일을 서슴지 않으셨다. 우리가 잘 아는, 행1:8의 유훈이 바로 그 대목이다. 생각해 보라. 예루살렘도, 유다도, 사마리아도, 그리고 땅 끝도-, 사실 그 어느 곳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의 목숨을 걸고 고난을 받아야만 가능한 선교 대상이요 현장들이 아닌가-! 이렇게 요구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원수를 돌려세워 그들로 하나님의 큰일을 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특유한 방법에 눈이 떠야한다. 동시에 그 일에 참여한 우리들도 그 행보를 통하여 타락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시는 주님의 방법에도 눈이 떠야한다. 실로 우리 예수님은 참으로 온 세상의 구주가 분명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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