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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영생주일

관리자 2020-11-16 (월) 22:20 3년전 761  

분문) 창 6:5~22, 막 7:1-18, 롬 1:18-25 

 

창조절 마지막 주일인 열두 번째 주일이다. 해외교회 일부에서는 마지막주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영생주일로도 지킨다. 다음 주일부터 시작되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대림(待臨)주간을 앞두고, 교우 중 한 해 동안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을 추모하며 살아남은 자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갖는 것이다. 이는 산 자들에게 종말의식을 고취하고 다시 오실 구세주를 사모하며 그 분을 영원히 모시고 함께 살게 될 영생신앙을 고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죽음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reality)이다. 특히 요즈음 코로나19로 인하여 인류에게는 죽음이 더욱 가깝고도 생생한 현실이 되었다. 근 1년 가까이 지속된 이 판데믹 때문에 죽어나간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특히 요즈음은 죽어도 코로나로 죽지 아니함을 감사해야할 정도이다. 이 병으로 사망하면 즉시 화장 처분되는 바람에, 가족과의 작별도 제대로 못한 체, 황망히 떠나야만 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충격적인 현상이다. 

 

사실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죽고 백태만상(百態萬狀)으로 죽음을 맞는다. 본질적으로 죽음의 선택권은 내 손에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오히려 날 보내신 분의 손 안에 있고, 그 분이 부르셔야만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죽음의 대응점을 ‘어떻게 살 것이냐’로 전환해야 한다. 비참하고 불행한 죽음이 아니라, 복되고 행복한 삶에 우리의 관심을 모아야한다. 

 

마침 오늘의 본문 중 창세기 내용은, 저 유명한 홍수를 통한 인류 심판과 그 속에서 생존하게 된 노아와 그의 여덟 가족사의 생활상을 차별화하여 담아냈다. 사실 이 노아 이야기는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무거운 경고로 들린다. 그것은 이미 성경 안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에 사는 인류가 받아야할 현장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보라. 우리는 그 동안, 노아가 들었던 그 하나님의 탄식과 심판의 경고를 줄기차게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5-7절)-! 

 

그렇다. 우리는 지구촌의 종말(終末)과 심판(審判)의 경고를 끊임없이 듣고 살아오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급격한 기후변화가 이미 현실화되었다. 환경재앙으로 인한 생태계가 이미 균형을 잃었다. 지금의 판데믹과 같은 예상치 못한 전염병들이 상습화되어간다. 배타주의 및 이기주의의 팽창으로 인한 신고립주의가 등장하여 지구촌과 우리의 삶이 더욱 몰락해 간다. 그러면서도 그 날 그 순간을 극복해내야 할 인간들은 각성 대신에, 더욱 탐욕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비윤리적인 삶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생명과 희망을 등진 모습들이, 노아의 때와 흡사하다. 

 

그런 점에서 ‘미국 최우선주의’를 앞세워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했던 트럼프가 패배하고, 그 기후변화협약에의 복귀를 제일의 과제로 공약한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일은 무척 다행스럽다. 그리고 세계에서 환경오염의 최상위 권을 오랫동안 차지해온 우리나라가 탄소 배출을 억제하고 그린뉴딜 정책을 통한 깨끗한 지구환경조성이 힘을 합치게 되면, 지구촌의 종말은 한층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도 이미 방아쇠를 떠난 총알의 회귀가 불가능한 것과 같다. 아파하고 분노하시는 창조주의 피눈물을 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토록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앞둔 종말론적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까? 우선 자포자기(自暴自棄)는 안 된다. 위기적 상황에서 무능을 드러낸 속수무책(束手無策)의 삶도 안 된다. 그렇다고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세상 풍조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부합한 삶은 무엇인가? 

 

☞ 오늘의 세 본문들은 이 점에서 확연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을 둘로 구별하여 소개한다. 먼저 저주와 버림받을 사람들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예수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인 모습, 그리고 서신서에 나타난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고 살아온 이방인들의 생활상을 좇아서 산다. 반면에 구원 받을 자들은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추구하는 삶을 좇아 산다.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본문 점검에서 확인해 보겠다. 

 

누가 그 날에 멸망(滅亡)을 당할 것인가

세 본문들은 모두 그 심판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과 멸시를 당하게 될 무리들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 노아 시대에도 있었고, 예수 앞에도 있었으며, 성령과 교회 시대에도 있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은혜와 자비를 모든 인류에게 베푸는 분이지만, 그러나 끝내 불신하고 거부하며 엉뚱한 짓을 하거나 등돌리고 있는 대상까지는 포용할 수는 없잖은가?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이미 심판당할 자리에 들어섰음을 보여 준다. 그들의 삶의 특성들도 분명하다. 잘 살펴보면서, 우리의 선 자리가 과연 어떤 지도 성찰해보도록 하자. 

 

1)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질서를 무시하며 생존할 권리를 놓친 자들이다. 창조주의 자비의 판단 수준을 넘어선 자들이다. 조물주로부터 ‘이대로는 안 된다’, ‘이것은 아니다’라는 마음을 불러일으켜서, 조물주의 마음에 아픔과 후회와 괴로움을 안겨드린 자들이었다. 구약의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5절)이라는 지적은 바로 그 사람들의 상태를 말한다. 

☞ 요한 칼빈은 이 부분을 ‘인간의 전적 타락(墮落)설’의 근거로 본다. 인간에게 자리한 내재적 죄성이 너무도 뿌리 깊고 지속적이어서, 인간 스스로는 선행할 능력이 없음을 말하였다. 

 

2) 여호와는 노아시대의 세상 사람들의 총체적 죄악상을 지적하셨다. 그들의 마음은 부패(腐敗)하고 행동은 포악(暴惡)했다(11-12절). 마음들은 이기심, 탐욕, 정육, 사욕, 배타심, 독점, 아집 등으로 가득했다. 그런 마음에서 토해낸 배설물들을 받게 된 세상 모든 영역도 자연히 평화와 안정이 실종되면서, 공격적-파괴적인 싸움판이 되고야 말았다. 세상 전체가 다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런 인간의 영향 하에 있는 자연과 생태계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색깔로 보면 온 세상이 어두운 흑색 천지였다. 이런 모습은 진정 현재의 우리네 세상과 같지 아니한가! 

 

3) 예수님은 종교계의 부패와 타락상을 고발하신다. 이런 문제 제기는 예수 공동체를 조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파견 나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저들은 제자들이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보고서, 제자들이 ‘외출 후엔 손과 그릇 씻기’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아니한 짓이라며 힐난한 데서 나온 것이다(1-5절 참조).  

 

예수님은 즉시 반격하셨다. 그런 주장은 마음은 없고 말말 앞세운 허위의식에서 나온 비판임을 지적하시면서‘(사29:13 참조), 그들이야말로 인간이 만든 계명을 앞세워서 하나님이 친히 내려주신 계명은 무력화시키는 타락한 자들이라고 격하게 비판하셨다(6-9절). 즉, 그들은 ’겉단장인 손 씻기에만 집중하나, 정작 필요한 속단장인 마음 씻기는 외면한다. 내실보다는 형식에 매달렸고, 정신보다는 의식(율법조항)에만 집착한다. 마음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입술 중심의 신앙에 몰두하며 산다. 말씀과 생활이 완전히 별개이다‘. 소위 고르반 전통(하나님께 드렸으니, 부모 공경할 의무는 없다)이 그 모순의 결정적 열매임을 지적하셨다(10-13절 참조). 

 

4) 성령께서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불신자(不信者)들을 비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찍부터 당신을 알만한 근거가 될 진리와 뜻을 당신이 만드신 만물(피조물)속에다 충분히 드러내셨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아예 모른다고 핑계할 수만을 없다고 선언했다(19-20절). 문제는 이런 내면의 일깨움에도 불구하고(21,상), 그들은 반신(反神)적으로 치닫고 산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불의를 행하며(18절), 불신에 빠져 감사도 외면하고 허망한 데 마음을 두면서, 그 마음이 어둡고 어리석게 되어 산다. 그래서 썩지 않을 영광을 썩어 없어질 우상(偶像)숭배로 대체하며 살아가고 있다(23절). 

☞이들을 향한 심판은 ‘몸이 서로 욕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었다(24,26-27,28절 참조)

 

누가 그 날에 구원(救援)을 받을 것인가

하나님의 심판이나 구원은 언제나 정의롭다. 군대식인 단체 기합형 심판은 없다. 구원하실 자는 어떤 환란과 위기에서도 구원해내신다. 소돔에서의 롯의 가족들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과 사랑을 간직한 자들은 심판이나 환란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노아 가족들은 종말의 때에 매우 주목할 만한 모범을 보였다. 그들은 심판의 그날을 대비한 생존을 위한 매뉴얼을 갖추고 산 모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요 사항을 대략 짚어본다 :

 

1) 그들은 종말 신앙으로 항상(평상시의 삶) 깨어 살았다. 세상의 것과 육신적인 것으로 배 부르려 하지 않고, 하늘과 영적인 것으로 풍성한 삶을 지향하며 살았다. 땅의 것으로 위로받으려는 것 대신에, 하늘의 것으로 부유한 인생으로 살고자 더욱 헌신하며 살았다(9절). 보다 철저한 나그네 의식과 천국시민권자의 의식으로 여생(餘生)을 산 것이다(벧전1:11,빌3:20참조). 

 

2) 그들은 종말 후에는 심판의 때가 온다는 점을 세상과 이웃에 알리고 전하였다(벧후2:5). 하나님의 구원이 자기들만이 아니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며 사는 불쌍한 이웃들과 세상에도 공유되기를 원했다. 에스겔 선지자가 받았던 그 경고를 좇은 것이다(겔33장-참조). 상대가 듣던지 아니 듣던지, 알릴 일은 성실히 전하며 살았다. 누가 언제 회개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가오는 그 나라를 그 시대에 전하는 사역을 꾸준히 수행하였다. 

 

3) 그들은 자신과 가족을 위한 방주(方舟-ark)를 마련하였다. 방주란 어떤 것인가? 방주는 본래 상자를 뜻하는데, 이는 자신만을 위한 구원과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공간 영역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개별적 관계(1:1) 강화에도 힘썼다. 기도는 뜨겁고 예배도 오직 하나님 중심적이도록 힘썼다(요4:23). 외부적 환란의 격랑이 크게 밀려올수록, 예배 문화의 변화도 불가피해진다. 모이는 대면예배 중심에서 개인과 소그룹으로 모이는 비대면 예배가 강화되어야만 했다. 

 

☞ 이 예배에는 가족이 기초 단위가 될 수밖에 없다. 노아의 여덟 가족들은 그 점에서 하나가 되어 승리하고, 홍수심판도 극복하며 그 이후의 새 시대까지 상속받았다(18절). 대비하자. 집단 예배만 전부가 아니다. 집단은 개인들의 힘의 결집으로 이루어질 뿐이다. 개별적 신앙을 살리지 못한 집단 예배가, 어찌 산 예배가 될 수 있을까? 홀로 드릴 예배부터 살리자. 기초단위인 가족들 예배부터 살리자. 노아 방주도 가족들의 일치의 산물이 아니었나! 성서의 모든 위인들은 모두가 이 비대면 예배의 승리자들이었다. 집단과 이웃은 그 이후의 차원이다.

 

☞ 그런데 이 방주 공동체에서 가장 필요한 신앙은 언약(言約-covenant)신앙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순종하며 동행하는 의인(義人)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억하며 은혜(恩惠)를 베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는 것이다(8-10,18-22절 참조). 그래서 노아처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살았다. 우리도 이 언약신앙으로 심판의 그 날을 맞이하면 된다! 

 

4)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절대 외식(外飾)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하셨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나 가치를 희석시키는 인위적인 장난은 절대 해서는 안 되었다. 그 어떤 인간의 계명도 창조주의 말씀과 계명의 의미를 변질시키는 일은 죄악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 해결은 마음과 입의 고백이 하나 될 때 가능하다(6-8절). 

 

5) 유대 장로들이 만든 전통 계율인 고르반(Corban)의 메시지을 향한 예수의 비판의 의미도 살려야 한다.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고 인간을 향한 사랑에는 무관심 하는 일은 모순이다. 하나님 사랑은 인간 사랑을 함께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아버지를 향한 의무에도 헌신해야하지만, 육신의 부모에게도 헌신해야 된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이면서 동시에 땅의 시민권자도 되기 때문이다(9-13절).

 

6) 그리스도인들은 상대를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내면부터 점검하고 살펴야 한다. 그래서 자기 내면의 죄악이나 회개할 일부터 제거하고 난 이후에 이웃을 향하여 입을 열어야 된다. 그렇게 하여 자기모순을 극복하고, 내 속에서 나가서 상대를 더럽히는 부정적인 일들을 예방해야 되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19 때는 손씻기가 강조되는 때이다. 그럴수록 손 씻기에 앞서서 마음 씻기를 먼저 하여야 한다. 그래서 형식에 앞서서 내실에도 집중하고, 의식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14-18절). 

 

☞ 이런 자신에 엄격하고 이웃에게 올바른 태도로 나아가려는 이들을 주님은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다. 그리고 이런 이들을 사용하셔서, 주님은 당신의 사랑과 뜻을 전하고 펼치게 하신다. 외식이 아니라 진실을, 위선이 아니라 성실을, 거짓이 아니라 정직을, 비판이 아니라 이해를, 과시가 아니라 겸손을, 배척이 아니라 포용을 선택하는 사람들-, 이들이 주님이 마지막 시대에 쓰실 자들이며, 그의 심판대에서 주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게 될 자들이다. 

 

결론이다

노아 홍수 심판 이야기를 옛날이야기로 듣지 말라. 오늘의 우리들 이야기이며 우리의 미래를 향한 경고이며 예고이다. 그의 심판의 때는 그가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이다. 지금은 그런 그를 겸손히 기다리는 때이다. 

종말신앙으로 깨어 살자. 언약신앙 위에 굳게 서자. 심판은 결코 피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피난처 되신 주님이 계시다. 노아와 그의 가족처럼, 주님과의 만남과 대면 예배를 강화시키자. 환란 날을 대비한 구원의 방주를 마련하자. 기도의 다락방, 야곱의 얍복강 영성으로 무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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