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창조절(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종교개혁주일. 이단경계주일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창조절(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종교개혁주일. 이단경계주일

관리자 2020-10-20 (화) 14:34 3년전 865  

본문) 출 33:18~23, 눅 10:21-24, 롬 11:33-36

 

창조절 여덟째 주일이다. 코로나19가 온 세상에서 계속 창궐하는 중에도, 우리나라에는 발병자들이 줄어드는 역(逆) 현상을 보여서 무척 다행스럽다. 하지만 더욱 조심하고 또 자중(自重)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해도, 또 다시 그 전염병은 창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염병이 언제 끝날 줄 모르는 기세인데-, 부디 하나님께서 속히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이런 중에 우리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제503주년을 맞이한다. 말이 종교이지 내용으로는 교회의 개혁이다. 그러면서 이단경계(異端警戒)주일도 함께 맞이한다. 종교개혁은 우리 내부의 문제를 겨냥한다면, 이단은 우리 내부에서 이탈(離脫)한 후에, 우리를 공격하거나 혼란하게 만드는 거짓 세력이다. 사실 이단이 드세다는 것은 기존의 우리 교회들에게 문제가 많아졌을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내부와 외부를 함께 다룰 수밖에 없다. 

 

이단 문제는 최근의 신천지가 그 대표적이랄 수 있겠다. 흥미롭게도, 최근의 한국교회는 코로나의 혜택을 크게 보았다. 무슨 혜택이었나? 코로나19의 공세로 이단 신천지의 드세었던 기세가 일단 꺾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코로나는 우리 기존의 교회의 내면적 취약성도 가차 없이 폭로했다. 비대면 예배를 치루면서, 세상으로부터의 신뢰도를 크게 잃을 수밖에 없는 한국교회의 취약한 모습을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국민의 생명이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하여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있을 때, ‘교회는 고난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요 도움이다’는 ‘이타적(利他的)인 공동체’라는 점을 각인시켜주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런 일은 코로나19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고통당하는 세상 사람들의 생명보다는 자기들의 신앙과 모임 보전을 더욱 우선시하는 ‘이기적(利己的)인 집단’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못한 공동체의 결말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의 신학이나 선교의 대전환을 이루지 못하면, ‘죽었다 깨나도 바뀌지 못할 일’이다. 교회가 모든 계명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다가 제일의 가치로 선명하게 설정해 두지 않는 한, 희망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목회를 건물유지와 확장, 사람 숫자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꿈에 좇아서 인간의 삶을 올바르게 세워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굳건히 자리하도록 목회를 하며 설교를 해야만 가능해 질 일들이다.

 

물론 교회와 목회에는 건물도 필요하고 인원도 많으며 재정도 풍부할수록 좋으리라. 하지만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은 그런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자원들이 내 목회와 강단의 일차적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겸손히 따르는 데에서 따라오는 것들이어야 하지, 마치 그것들이 목표인양 매달리는 목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우선 순위가 어긋날 때, 나는 교회 사업가처럼 되어서 본질에서 벗어난 사역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우선 관심해야 할 영역은 가치와 내용을 담은 영적 세계이다. 

 

이를 위하여 교회의 사역자들의 의식 개혁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목자가 늘 고루한데, 양들에게서 신선한 우유가 생산될 리가 없다. 따라서 오늘의 세 본문의 주인공들-모세, 제자들, 바울과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 결과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더 관심 있게 지켜보자. 

 

출애굽 후 가나안을 향해서 수많은 백성들을 인도해가는 모세가 하나님을 자기의 앞에 모시는 일에 목숨을 거는 모습에 주목하자.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이 하늘 아버지께서 펼치시는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일들에 눈이 떠가고 있는 모습에 기뻐하고 계심도 주목하자. 하나님의 선교의 사도인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서로를 활용하셔서,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깊고도 오묘한 지혜와 지식에 감동하는 모습에도 관심을 가지자. 

 

구약을 보자

본문은 출애굽 후, 오랜 광야생활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에게 최대의 위기가 찾아 온 상황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 모세가 오랜 시간을 하나님의 호렙에 올라서 나타나지 아니하자, 불안을 느낀 백성들이 아론을 앞세워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서 그 신상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이라면서, 광란(狂亂)의 축제를 벌린 일이 있었다(출32장 참조). 이를 보신 여호와는 대노하셨고, 그 징벌로 약 3,000명이 레위지파에 의하여 대 참살(慘殺)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25-28절 참조). 출애굽 후 가장 무서운 심판, 곧 자기 살을 도려내신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하나님의 분노가 그 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과의 가나안에의 동행(同行)도 중지하고, 당신의 사자(천사)들만 보내시겠다고 하셨다(33:3). 그 이유는 같이 가다가 또 다시 문제가 보이면, 그때는 하나님이 아예 이스라엘 전체를 진멸할까 염려가 된 까닭이었다. 그러자 모세가 간청하며 매달렸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런 곤경에 처한 모세를 생각하시면서(19절), 당신의 완강했던 입장을 철회(撤回)하시고 당신이 계속 함께 가겠다고 약속하셨다(33:11-14절 참조). 

 

1) 그때의 모세의 맞대응이 놀라웠다. 그가 하나님의 그런 약속에 대한 인증을 요구하듯,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요구하고 나온 것이다(18절). 이는 사실상 모세가 불가능한 일을 요구한 일이었다. 본래 인간이 신에게 ‘얼굴을 보여 달라’는 요구는 최대의 금기사항이었다. 그런 요구는 무례를 넘어 격(格)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정작 뵙게 되는 순간에는 감당치 못하여서 결국은 죽음을 면치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20절 참조). 

 

☞ 모세는 그 점을 몰랐겠는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시점에서의 모세의 마음은 그만큼 전능자 하나님 자신의 동행하심만이 이 가나안에로의 행진을 가능케 하는 최후의 절대 조건임을 하나님께 보여드린 것이다. 천사들만으로도 안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서 하나님 자신이 앞장 서주셔야만 되는 일임을 분명히 전하고자했다. 

☞ 이런 모세의 변화도 눈부시다. 처음의 모세는 주의 현현과 부르시는 음성에 두려움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렸는데(출3:6)-, 지금의 모세는 그 여호와의 얼굴을 자기가 뵙게 해달라고 요구할 정도가 된 것이다(18절).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놀라운 발전(發展)이 아닐 수 없다-! 

 

2) 게다가 여기에서의 ‘영광(榮光)’은 주님의 본체요 신성의 모든 것으로서 여호와의 존귀함과 화려함과 영광의 본체를 요구한 내용이기에, 더욱 놀랍다. 지상적 존재가 피안적 영역에서만 가능한 접촉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 파격적(破格的)인 요구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모세가 오만해지거나 교만해져서도 아니다. 오히려 모세가 그런 요구를 감히 하나님께 올릴 수 있을 만큼 모세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은 차원에서 얽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33:11). 

 

3) 당시 ‘하나님에게 모세는 어떤 존재였는가’가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모세는 그냥 모든 백성 중의 일원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솔하여 데리고 가는,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일꾼(동역자)이었다. 따라서 그런 그에게는 단순한 능력 이상의 초월적인 리더십이 필요했다. 그를 좇는 모든 백성들의 끊임없는 도전과 반발과 잡음들을 잠재울 위로부터 내린 신적인 지혜와 능력의 카리스마가 절실히 필요했다. 

☞ 하나님께서 바로 그 절박한 입장의 모세를 왜 모르셨겠는가? 그가 왜 당신의 얼굴까지 보여 달라는 지를 왜 모르시겠는가? 아셨다! 힘을 실어주셔야만 했다. 그의 가치를 인정하시고, 오히려 소중히 돌보시며 당신만이 가진 거룩한 지혜와 지식도 분배해야 됨도 잘 알고 계셨다. 

 

4) 그러기에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그런 요청을 수용하시되, 상처 없이 그가 얻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얻도록 배려하셨다. 그 하나님의 절묘한 공급의 내용들이 무엇이었나? 

 

① 우선은 안 될 일부터 통보하셨다.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일은 그 자신을 위하여서도 허락할 수 없으며, 그러기에 당신의 얼굴을 보여 줄 수가 없음을 전하셨다(20,23절 참조). 본래 여호와는 영(靈)으로서,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빛이시다. 동시에 인간을 녹이게 하는 광채이시다(24:17,신5:24-25,딤전6:16참조). 직접 대면은 불가한 분이시다

 

② 하지만 여호와의 얼굴은 또 다른 면을 담고 있다. 그의 얼굴이 있는 곳에서는 그의 은혜와 관심과 함께 하심과 사랑이 머물기 때문이다(민6:25-26,시69:17,104:29 참조). 그런 연고로 모세는 자기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신으로서의 여호와의 얼굴(영광)을 구하였던 것이다. 

 

③ 그 대신 하나님은 모세를 위하여 두 가지 선물들은 마련하셨다. 

첫째는 모세란 존재를 영광스럽게(모두에게서 인정(認定)받도록) 하시는 일이었다(19절). 당신의 모든 선한 것을 그의 앞으로 지나가게 하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그 앞에서 선포하게 하신 일이었다. (여기에서 ‘모든 선한 것’(콜 투브/히)은 존귀함, 화려함, 영광을 뜻하며,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특성을 드러낸다). 이런 조치는 고단한 마음의 모세를 위로하고 돌보시는 배려의 것이다.

 

둘째는 모세 자신을 보호하시는 손길을 펴셨다(22-23절). 하나님의 존재(영광)이 지나가실 때, 그를 보지 못하여 죽지 않도록 모세를 반석(그리스도) 틈에 감추시고 여호와의 손으로 그를 가리셨다가, 나중에서야 여호와의 등(back)만이라도 보게 배려하셨다. 이 점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계셨음을 모세에게 확증케 하고, 동행에 대한 더 큰 확신을 갖게 하심을 뜻한다. 

 

복음서를 보자

예수님의 감사와 기쁨이 어디에 있는 지를 잘 드러낸 본문이다. 전체 내용은 70인 제자들의 전도사역에 대한 보고를 들으신 주님의 반응이 올라와 있다. 본문 전반부(21-22절)은 하늘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찬양과 감사의 내용이고, 후반부(23-24절)는 당신의 제자들이 비로소 보아야할 것을 보기 시작한 일에 대한 기쁨과 축복이 담겨 있다. 그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1) 성령을 통한 충만한 기쁨이 예수께 전달되면서, 예수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당신의 아버지를 뜨겁게 찬양한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제자들의 복음 전파 속에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退位당하는) 모습을 확인하셨기 때문이었다(18절). 이런 하나님 나라가 열리는 일은 오직 메시아인 당신에게서만 가능한 일이었는데, 이번 제자들 사역에서까지도 사탄의 몰락이 이루어지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22절 참조). 이런 예상치 못한 큰일의 발생에 성령도 크게 기뻐했고, 성자도 감사와 찬양을 성부에게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 아들 예수님은 당신의 몫이 당신을 믿는 자들(계시를 받는 자)에게까지 확대되어 나타나는 일을 결코 시기하거나 제지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이제 그 영광스런 구원의 사역에 동역한 자들이 당신과 아버지를 보다 잘 알고 관계도 확실하게 됨으로서, 그들 자신의 이름들도 하늘의 구원자의 생명책에도 확실히 오르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감사하셨다(20,22절,마11:25-27참조). 

 

3) 그런 변화된 신분에 이른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의 축복이 선포되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23절). 그 사탄이 무너지고 구원의 왕국이 건설되는 장면을 옛적 선지자나 임금들은 그토록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했는데, 그들이 직접 보고 듣기에까지 이르렀기에, 복이 있다고 축복해 주신 것이다(24절). 이는 메시아의 구원의 때가 예수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목격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자격부여이며, 구원의 확실성도 선언하신 내용이었다(벧전1:10-12). 

☞ 우리는 어떤가? 진정 우리도 ‘보는 것을 보고 있는가’ 마귀의 왕국이 무너지는 현장은 있는가? 이는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이룩해야할 장면이고 회복되어야할 생생한 구원의 역사이다. 

 

서신서를 보자

바울은 이방인 선교가 활발히 열리는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서, 유대인에게 집중되었던 그 역사가 이제는 온 세계 만민들(이방인)에까지 공유되고 확산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그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높고 크신 지혜와 지식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특히 하나님의 길은 인간이 찾지 못하게 펼쳐지고 있음을 놀라워하였다(33절). ‘아넼시크니아스토이’(헬)란 말은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다만 그의 흔적을 추적하여 맛볼 뿐임을 말한다. 

 

1) 바울에게 비쳐진 하나님의 구원의 오묘(奧妙)함은 어떤 것이었나? 하나님은 당신의 긍휼에 따른 구원의 성취를 위하여, 이방인을 위하여서는 이스라엘을 도구로 쓰셨고, 이스라엘 구원을 위하여서는 이방인을 도구로 쓰고 계심을 보았다. 구원의 물결이 이스라엘에게 막히면 이방인에게로 흘러들어가게 하시고, 이방인에게서 막히면 이스라엘에게로 흘러가게 하시는 방법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온 세상과 만물의 주관자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심을 본 것이다. 

 

2)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깊은 지혜와 지식을 활용하시고 계심도 보았다. 지혜는 영원한 진리와 구원에 대한 종합적(綜合的) 통찰이라면, 지식은 그 원리를 밑받침해주는 각론적이며 구체적인 지적 능력이다. 하나님에게는 이런 종합적 능력과 구체적 능력이 막힘없이 발휘되면서, 그의 세상과 만물을 향한 구원의 역사가 막힘없이 펼쳐지도록 주도하심을 보이셨다(33절). 이 일에는 그 누구의 조언이나 수고를 빌림도 없이, 오직 만물의 주인이시고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의 권능으로 만으로 충분하셨다(34-35절). 

 

3) 그 점을 바울은 이렇게 찬양하며 선포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절). 이는 만물의 시작(from him)과 과정(througth him)과 최종(to him)이 그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그 손안에 있다는 것이고, 근원과 집행과 목적까지도 그의 손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선포한 내용이어서 주목된다. 우리도 하나님의 이런 원대한 경륜과 손길에 눈이 떠야 하겠다-!!!

 

결론이다

우리의 문제는 언제나 그의 일부분만을 보고 경험하며 증언하고 지내며 사는 데에서 나온다. 그의 통합적이고 융합적인 솜씨를 맛보고 증언할 수 있다면, 우리가 보다 주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잖을까! 우선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하도록 성실하자. 그의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한 백성들이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신앙개혁이나 이단경계의 문제도 이 크신 하나님을 향한 관계를 정립하면 당연히 해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바로 세우는 일부터 하자.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