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사순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본문 바로가기

설교자료 HOME > 원장코너 > 설교자료

사순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3-14 (수) 17:08 6년전 1337  

분문 ) 요11:17-57, 레16:1-10, 20-22, 히9:11-15 

 

우리 기독교는 구원을 이야기할 때, 그 결정적인 원인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때문임을 말한다. 즉 ‘보혈(寶血)’로 불리는 예수의 거룩한 피의 공로 때문임을 말한다. 

 

그렇다. 100% 옳은 고백이다. 예수 보혈의 은혜가 우리를 살리고 구속하셨다! 그렇다면, 그렇게 우리를 구원했다고 할 수 있었던 그 피는 우리 피와 무엇이 다른가? 적어도 예수의 보혈은 다음의 두 가지 다름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흠이 없는 피였기 때문이다. 흠을 가진 자는 본질적으로 죄인들을 속죄할 자격이 없다. 그런 점에서 세상 그 누구도 모든 죄인을 속죄할 자격자는 없다. 모두가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령으로 탄생하셨고 죄와 악에 대하여 흠 없는 인생을 사셔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속죄 제물이 될 자격자가 되신 것이다(히9:14). 

 

둘째는 예수의 피에는 세상의 죄인들처럼 자신의 범죄의 책임을 ‘남의 피’로 전가(轉嫁)시키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자신에게 돌리는 희생의 영성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그 어떤 세상 영웅이나 지도자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어서 모두를 무릎 꿇게 한다.

           

세상의 왕들이나 지도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과오에 대한 모든 책임과 그 국면을 모면하기 위하여 진실을 거짓으로 조작하고 ‘남의 피(희생/목숨)’로 그 위기를 벗어나곤 해왔다. 그런 행태가 결국 자기 몰락의 함정이 될 줄도 모른 체 취해온, 공통적인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우리는 세월호의 경우나 우리의 어리석은 지도자들의 경우에서 이미 충분히 확인한 일이다. 

 

그 바람에, 수많은 생명들이 그 지도자들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애꿎게 희생을 당해야만 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소위 ‘갑질(甲質)의 횡포와 폭력’ 앞에 수많은 생명들이 애꿎은 희생과 죽임을 당해 온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원한이 저 아벨의 피의 호소처럼 어찌 하늘에 가득 차 있지 아니하겠는가!

 

그렇다. 지금의 세상은, 로마서 말씀에서처럼, 피조물의 탄식과 간절한 소원이 하늘에 가득 차 있다(롬8:19참조). 그들은 자기들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시켜 줄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을 애타게 고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정한 해방의 영을 받은 자녀들이 나타나 이 땅에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씻어 줄 희년(禧年)의 세상을 열어 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의 영의 따라 피조물들의 탄식에 위로와 기쁨을 안겨줄 수 있을건가? 도대체 이미 예수의 피의 씻음의 은혜를 입은 나의 피의 무게와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 지금의 내 생명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세상 구원이나 역사의 발전이나 후대의 전진을 위한 헌신의 삶의 발자국이 나에게는 과연 있는 건가? 두루두루 물어오는 본문 말씀들이다. 

 

다시 ‘그 예수’로 집중할 수밖에 없다. 세례 요한은 일찍부터 그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증언했는데(요1:29), 알고 보면 예수 보혈의 은혜는 인간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죄악 때문에 애꿎게 희생당했던 수많은 짐승들(구약의 내용)까지도 해방하는 은혜도 끼쳤다. 즉 주의 보혈은 온 생태계에까지도 기쁜 소식을 준 것이다.

 

O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역사적 예수의 죽음이 어떤 차원에서 세상 모든 위기를 풀어 줄 구원자의 자리였는지를 보여 준다. 

 

1) 예루살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긴박한 회동(공회)에서의 의제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올 예수를 어떻게 상대해야할 것이냐’는 점이었다(47-48절). 매우 뜨거운 위기감에서 모인 그 회동의 배경(背景)은 예수께서 죽어 무덤에 매장되었던 나사로를 살려낸 놀라운 일로 인하여(요11장-), 모든 유대 백성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그를 왕으로 옹립하면서(?) 발생할 여러 가지 예상되는 염려 사항들을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도 임박한 유월절 절기로 인하여 전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집결할 시점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저들의 염려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백성들이 자기들을 외면하고 예수에게 몰려갈 상황에 서 발생할 소위 ‘백성들로부터의 패싱(passing)당할 위기’를 두려워했다. 또 하나는 그렇게 되어 예수 중심의 새 왕국 건설운동이라도 벌어지게 되면, 로마정권이 반드시 밀고 들어와 유다를 완전 초토화시킬 터인데, 그 상황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점이었다(47-48절). 

 

2) 그런 논의를 잠재울 발언이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 생각하지 아니하느냐’(49-50절)

이 말은 예수의 존재와 그 제거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무지에서 뛰어 나온 말이었으나, 그 내용 자체는 예수께서 감당할 운명을 확실하게 짚어 준 예언적 성격을 담은 말이었다. 즉 그 의미는 예수께서 그 민족은 물론, 갈가리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이방 민족들 포함)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희생 제물로 죽게 되실 것을 미리 말한 것이었다(52절).

 

3) 이 발언으로 가야바 자신은 자신들의 곤경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희생양(남의 피)과 먹잇감을 찾는 세상 죄인의 모델임을 보여주었으나, 그들로 인해 죽임 당하실 예수야말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을 떠맡게 됨으로서, 모든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당한 의인의 영원한 모델임을 세상에 고한 자가 되기도 했다. 

 

4) 이때부터 예수는 지명 수배자(受配者)가 되었으며, 그 바람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북쪽 20km 지점의 에브라임으로 일시 피신하여 머물게 되셨다. 그 해의 유월절 분위기는 ‘예수께서 과연 이런 흉흉한 분위기에서도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냐 아니냐’에 몰려 있었다(53-57절). 당사자인 예수님의 대응이 궁금한 순간이기도 했다.

 

o 구약 레위기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런 속죄 제도가 이스라엘 제사법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던 내용이었음을 알려준다.

 

1) 당시의 속죄제물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소나 염소나 양)을 통하여 시행되고 있었다. 

 

2) 죄를 씻기 위한 속죄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 보통 때의 속죄 예법은 숫염소나 숫양을 잡아 제단에 뿌림으로 해결되었다. 

-또 하나, 속죄일이란 특별한 날이 있었는데 그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씻기 위한 속죄제사가 있었다. 

 

3) ‘아사셀 염소’로 구별된 염소의 머리 위에 대제사장 아론이 그의 두 손을 얹고 안수하여 백성들의 모든 죄악과 불의를 그 염소의 머리에 씌운 후, 미리 정한 사람의 손에 맡겨 그 염소를 광야로 끌어간다. 그 때의 아사셀 염소는 백성들의 모든 불의와 허물을 걸머지고 광야로 나아가 결국은 비참하게 죽는다. 이것이 아사셀 염소의 운명이었다(7-10, 20-22절). 

☞ 오늘 말씀은 이 속죄 제물인 아사셀 염소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제물의 예표로 본다. 

 

4) 짐승제사의 문제는 무엇인가? 짐승들의 애꿎은 희생으로 그 때의 죄는 용서를 받지만, 그러나 그것으로는 인간 본래의 양심(良心)과 마음까지 변화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즉 짐승 희생에서는 인간의 죄의 습성과 반복을 제지할 능력이 행사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죄인을 대신하여 매를 맞는 곤장(棍杖)요법이 있었지만, 문제는 그런 면피가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내면의 핵심인 양심까지도 뒤흔들어서, 아예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낼 속죄법이 나와야 했다. 그게 무엇인가?

 

o 히브리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에 대한 정리된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1) 세례 요한의 증언(요1:29)에는 예수께서 바로 구약의 아사셀 염소처럼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만민들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아사셀 현장과 같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제물)이심이 들어있다. 

 

2) 그의 죽으심은 흠투성이인 자가 받아야할 형벌의 몫을 ‘자기 피’로 씻어내겠다고 자청하신 의로운 희생이어서, 지금까지 그 어떤 짐승 피들로 해결 안 된 죄책감마저 씻어주었고, 면피(面皮) 불감증에 빠져 있었던 우리 양심까지도 흔들어 깨워 주는 것이 되었다(14절).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마음으로부터 ‘그의 은혜와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아니 된다’는 강한 각성을 유도하면서, 그를 믿는 사람 자체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였다(15절 참조)

 

3) 그런 점에서 그의 피의 제사는 모든 시대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유효한 속죄 행위가 되었다(11-15절).

 

o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아사셀 염소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은혜와 영성을 부여 받은 존재들이다. 이제 내 자신의 삶이나 세상의 문제 해결의 접근을 ‘남의 피’로 할 것인가, ‘나의 피’로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나의 구원도 그의 방식을 좇는 데서 찾아야 한다. 

 

예수의 선택은 순간이 아니라, 영원을 선택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순간 지향적인 세상의 방법의 결과는 죽음뿐이지만, 영원 지향적인 방법을 취하면 모두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세상 죄를 지우신 분이셨다. 그럼으로써 제1 아담의 사망의 늪에서 허덕이는 인류들을 새롭게 구원해 내신 제2 아담이 되셨다. 그 예수의 삶과 행보를 따라가자!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