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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2)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08-18 (화) 23:47 3년전 845  

본문)  빌 2:12~18, 사 4:2-6, 마 5:13-16 

 

강림 후 열 두 번째 주일이다. 최장기의 장마도 지나고, 기상이변으로 인한 대폭우 피해에 따른 뒤처리로 바쁜 계절이다. 게다가 지난 8.15 보수단체의 무분별한 광화문 집회로 인한 코로나19의 대 확산 조짐이 현실화되면서, 그 동안의 훌륭했던 우리 한국의 방역 수고를 무색하게 하는 상황이 전개(展開)됨으로서, 온 국민의 근심 걱정과 충격은 더욱 커졌다. 코로나 경험에서 확인된 의사(醫師)들 부족 문제 때문에, 의사들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정부 정책에 대하여 반대하는 의사협회의 집단적 반대도 많은 걱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의 코로나 확산의 주범(主犯)이 한국교회 안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마음이 더욱 아프다. 비록 한국교회 내의 일부 극보수 세력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기는 하지만, 같은 배를 타고 항해를 계속해온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분노와 함께 국가와 국민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예수를 주로 믿는 집단이 취할 태도는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의 주이신 하나님에게도 분명히 도발(挑發)한 일이어서, 더욱 분노하게 된다. 아무래도 이번 사태로 우리 한국교회의 입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설 자리를 잃게 될 것 같다. 

 

특히 이런 대립적 사태가 민주당 국회가 180여석의 막강한 힘을 갖고, 그 동안 수 십년 쌓여졌던 적패 청산들을 향한 법 개정을 하나하나 해가기 시작하면서, 반발적으로 터져 나온 일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그들의 도발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그 기저(基底)에는 가진 것을 더 가지려는 탐욕(貪慾)의 힘과 오래 누려왔던 기득권(旣得權)을 보전하려는 수구(守舊) 세력들이, 그것을 이번 기회에 새롭게 개혁하려는 세력들과의 치열한 마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정책에 반발하려는 이들을 보라. 가난하고 힘없는 대수의 임차인의 입장을 전혀 대변하지 않고, 오직 집을 가진 소수의 임대인들의 입장 보전을 위한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의사들의 저항도 국민의 필요 수준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독점 기반 보전에서가 훨씬 강하다. 이른 바 검언(檢言-검사와 언론) 유착(癒着)사건들도 지금까지 탄탄하게 유지해왔던 검사-언론-재벌-보수세력들의 강고한 소수의 기득권적 카르텔을 보전하려고 저토록 완강히 저항하잖은가! 

 

전광훈의 움직임은 그런 검은 세력들의 카르텔에다 보수 기독교 세력들이 한데 얽힌 것이다. 자기 세력 붕괴의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들은 문 대통령에게 특히 막말을 일삼는 전광훈을 자기들의 대변인으로 앞세워서 하나로 뭉쳤다. 전광훈은 자기가 왕인 듯 착각에 빠졌으나, 실상은 그들 노리게가 되었다. 놀랍게도 저들의 공격은 정부의 성공적인 코로나 방어를 실패하게 만드는 일이다. 한국을 이태리처럼 형편없이 코로나에 무너진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스크를 거부하고, 거리에 침을 뱉게 하며, 음식도 나누고, 환자 교우에게는 병원 치료를 거부하게 하고, 거짓 교인들을 전국적으로 만들어내는 행태를 자행하였다. 그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세상 이익 집단들보다도 훨씬 악하다! 그 바람에 우리나라는 전국이 코로나 확산으로 엄청난 위험에 처하게 되고 말았다. 시한폭탄과 같은 위험한 몇몇 교회들 때문이다. 

 

그런데, 더 통탄할 일들은 그런 무분별한 지도를 아무런 비판 없이 맹신적으로 따르는 교인들이다. 그들에게는 예수는 없고 오직 전광훈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오만해진 전광훈이 ‘하나님도 까불면 나에게 혼난다’는 막말을 할 정도가 된 것 아닌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어찌 저런 저질(低質) 기독교가 우리 안에서 횡행하며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 수 있을까-? 

 

이번 광화문 집회를 주도한 태극기 부대에는 일장기까지 등장한 모양이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노래해야할 그 해방일에 일본 국기가 등장하는 일은 도대체 무슨 심사일까-? 그리고 광복절 행사에서 광복회장이 친일세력의 척결을 강조하고 나오자. 이번에는 보수 야당에서 그 주장을 향해 ‘국론(國論)분열하지 말라’며 반박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에게 국론은 우리 국민이 우리를 지배해 온 친일세력과 무조건 공존하자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우리 내부 안에 친일 세력들이 이토록 뻔뻔하게 큰소리치는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할까-?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믿음의 주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입장을 좇고자 함이다. 또 복음의 가치를 선호하는 정치 세력들이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과 연대하고자 한다. 예수의 관심,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이 성령강림 절기에서 우리가 계속 추구해온 '새 하늘 새 땅'이란-, 힘 있고, 잘나고, 가진 자들의 기득권을 옹호하고 방어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잖은가! 성령은 물론 그들도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그들이 마음을 낮추어 낮은 자와 함께할 때, 그들도 당연히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는 언제나 추구하는 분명한 방향이 있다. 미 클레어몬트 대학교의 김남중 교수가 제시한 내용이 매우 적절해서, 그대로 옮겨 전한다. 

☞ ‘예배는 독점에서 나눔으로, 높음이 낮음으로, 채움이 비움으로, 분열이 일치로, 억압이 해방으로, 고통과 눈물이 웃음으로, 증오가 용서와 사랑으로, 무감각이 공감으로 치유되고 변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총회주제해설서.p.160) 

 

그렇다. 우리의 신앙고백과 행동에는, 이런 방향을 향하는 모든 것들에게는 언제나 ‘YES’이지만, 그 방향을 거스르는 것이나 반대하는 것들에게는 언제나 ‘NO’일 뿐이다. 

 

이런 때일수록, 깨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교회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성도가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어둠의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대응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를 분별하여야만 한다. 지금 우리라도 정신 못 차리고 저들과 다른 차별을 보이지 못하면, 우리나라의 마지막 촛불마저 꺼지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주신 말씀들은 보다 큰 뜻이 담겨있다. 

 

오늘의 큰 주제는 전 주일 말씀과 이어져 있다.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와의 회막이 건립되자, 그때부터 여호와께서는 그곳에 내려오셔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교회의 거친 행보를 인도하시기 시작하셨다. 그 하나님과의 ‘신비(神祕)한 동행(同行)’으로 지구촌에 이스라엘 민족이 태어난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때를 회상하며, 그 때의 구름과 불의 의미를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렇게 해설(解說)해 주었다(사4:5-6절).  

☞ ‘낮에는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과 빛을 만드시고’(5절), 또 초막에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風雨)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6절).   

 

무슨 뜻인가? 광야(廣野)는 한 시도 안전하지 못하다. 낮에는 40-50도의 고온과 태양열로 인한 고통과 목마름과 각종 광야 짐승들의 공격들이 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일은 적절한 구름이 그들 위에 동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광야에는 이런 면도 있다. 일단 태양을 가릴 방패막이 있으면 시원하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베두인들은 수천 년의 전통을 간직하며 천막 중심의 광야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구름은 열기를 막아줄 큰 보호막이며 덮개(canopy-그늘막)이다. 그리고 필요한 풍우도 제공해 줄 방패막도 된다. 광야 40년을 견뎌낸 결정적인 원천이었다. 

 

밤에는 일기도 급변(急變)한다. 영상의 날씨라도 급강하한 연고로 매우 춥다. 온기가 필요하다. 동시에 달이 없을 때에는 전기와 같은 밝은 빛도 필요하다. 이때의 불기둥은 바로 추위와 어둠을 극복해 줄 충분한 대안체이다. 당연히 외부의 침입 세력으로부터도 보호막도 된다. 바로 이런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그를 찾고 믿으며 의지하고 산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지를 밝혀 주신다. 

 

구약은 극심한 민족적 시련을 견디어내면서 영적으로 깨끗해진 남은 자(Remnant)들에게 성부 하나님이 친히 구름기둥과 불기동이 되신 모습을 전한다(5-6절). 복음서에서는 부름받은 제자들 자신이 이제는 세상의 구름과 불기둥 같은 소금이고 빛이어야 함을 일깨우신다(13-14절). 그리고 서신서에서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 빛들로 나타내는 모습을 전한다(15절). 결국 삼위 하나님을 본받아 성도와 교회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덮개가 되고 그늘막이 되어, 구름기둥과 불기둥,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기를 요구하신다.  

 

구약을 보자

본문은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혹독한 민족적 참상과 파괴된 상황 속에서도, 잡초(雜草)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 생존한 자로, 다음 역사를 이어줄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된 이들을 위하여 미래의 구원을 예고하신 여호와의 말씀이다. 

 

1) 그들은 선택 받은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이지만, 그러나 때가 이르면 여호와의 아름답고 영화로운 싹이 나며 그로인한 소산(筍)으로, 그 안에 들어온 자들이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예고한다(2절). 여기에서 체마(히)로 불리는 ‘싹’은 다윗 후손이나 가지로도 불리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명칭이며, ‘소산’은 그 싹에서 나온 순으로서의 복음(福音)을 말한다. 이 말은 예수와 그의 복음 안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 ‘거룩하다’ 칭함을 받으리라고 예고하신 것이다(3절)

 

2) 본래 주님의 성령은 심판하고 소멸하는 영이시다. 그런데 특히 당신의 백성들에게 임하신 성령은 그 대상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려 하신다. 더러움을 씻겨내고 청결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역사하신다(4절).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인한 씻음의 표지인 물세례나 성령세례가 중요한 까닭도 그것들이 어둠의 시대에 살아 ‘남은 자’의 표지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3) 여호와는 출애굽의 역사와 바벨론에서의 민족 귀환의 대역사를 통하여, 그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동행하고 보호하시면서, 모든 환란과 위험들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시는 덮개(canopy)와 선(善)한 목자이셨음을 충분히 확인시켜 주신 분이셨다(5-6절).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성자 예수께서 지상에 오셔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후, 첫 번째 올리신 제자 교육의 주제들이다. 그 내용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13-14절)였다. 13절의 세상(earth)은 땅이라는 것이었고, 14절의 세상(world)은 세계라는 뜻으로서, 모두 인간 세상 전체를 말한다.

 

주님은 여기에서 새로운 관심 주제들을 제기하셨다. 바로 세상이다! 빛 대신에 어둠과 모순이 지배하고, 진리보다는 거짓과 가짜가 우선하며, 독점이 공존에 앞서고, 평화보다는 폭력이 주인 노릇하는 곳이다. 그런 삶의 현장인데,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너희가 소금이요 빛이다’라는 개혁적 정체성을 부여하셨다. 그 순간 일용할 양식만을 구해오던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모두가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어찌 그 점을 모르실 리 있을까? 그런데도 주님은 새 임무와 역할을 부여하셨다. 거룩한 세상의 왕 노릇을 기대하심이었다

 

1) 첫 임무는 소금이었다(13절).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면 제 모습을 버린다. 그러면서 그 음식의 맛은 살리고, 부패를 막아낸다. 교회와 성도들의 세상을 향한 임무가 바로 이 소금 사역이다. 교회에서 훈련된 인격으로, 가정-직장-이웃-세상을 향해 소금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이다. 그래서 파괴와 부패를 막아서, 세상을 살리기 위한 선행을 힘써야 한다.

 

2) 둘째 임무는 빛이었다(14-16절). 빛은 모두를 비추기 위해 존재한다. 적극적 기능을 가진다. 어둠과 부끄러움을 몰아내고, 모두가 안녕과 평화를 누리도록 자신을 불태운다. 당연히 선교(宣敎)가 강조되고, 실천하는 삶의 모범(模範)이 요청된다. 성도와 교회가 왜 <세상을 위한 타자 중심의 집단>이어야 하는 지를 잘 규정해 주셨다.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에 걸맞는 행동거지로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뉴노멀(New nomal)을 추구하며 살아야 될 존재가 된 것이다. 

 

서신서를 보자

주님의 분부에 따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등장했다. 바로 빌립보교회였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소원을 넣어주시고, 또 함께하시며 인도하셔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 교회, 즉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주님이 함께 하신 교회가 되었다. 

1) 이런 빌립보 교회 공동체에 사도 바울은 강한 영적 긴장을 요구하였다. 즉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강권하였다(12절). 지금 좋다고 계속 좋은 곳은 없다. 지금 잘나간다고 계속 그런 법도 없다. 얼마든지 위험하고 변질될 가능성이 상존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만큼 마귀와 어둠의 세력이 계속 맴도는 곳도 없잖은가-! 

 

2) 그들이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기를 위하여, 바울은 그들의 일 처리하는 데에는 ‘어떠한 원망이나 시비가 없게 하라’고 권하였다(14-15절, 마5:14-16참조).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자, 불신에 쌓여 주저하는 것을 뜻한다. 교회는 물론 방안을 놓고 토론할 수 있다. 하지만 결정하면, 전적인 복종과 화합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론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로 모인 우리 모두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 그러기에 당연히 우리가 들어가면, 맛이 달라져야 하고 거짓과 부패가 방지되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들어가면 인간적인 욕망이나 거짓이나 부끄러움이 씻겨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고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이 되거나 등경 아래에 감추어진 등불 같은 신세가 되면, 우리는 어찌 되겠는가-? 

 

우리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신비한 동행 속에 살고 있다. 우리 안에 일하시는 성령을 결코 근심되게 하지 말자. 내 안에 부여된 하나님의 소원을 소중히 간직하여 흠 없는 품격을 유지하며, 망가진 그리스도의 교회를 살려내고, 주님오실 때 하나님의 영광과 위로의 세계를 상속하는 우리가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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