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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청년주일

관리자 2018-03-08 (목) 10:06 6년전 1369  

분문 ) 요16:25-33, 사63:1-6, 롬8:18-27  / 청년주일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폭풍처럼 우리에게 몰려오고 있다. 우리 한반도에 그토록 짙게 드리웠던 전쟁의 먹구름이 어느덧 가시고,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4월 말에 우리 측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개최하는 반가운 일이 발생했다. 세계의 시선이 우리 한반도로 집결되고 있다. 

 

또 하나의 놀라운 조짐(兆朕)이 있다. 소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운동의 파고가 우리 사회의 깊은 병폐를 씻어내고 있다. 이 일로 그 동안 각 분야에서 가짜와 진짜의 정체들이 계속 폭로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전반에 부는 이 바람도 역시 태풍이다! 

 

두렵다. 하지만 반갑다. 오랜 적패세력들의 쇄신이 옹골차게 진행되는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많이 아프고, 충격 또한 크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묵은 땅이 기경되고 새로운 속살이 돋아나 새 시대 새 한반도의 주역으로 교체되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촛불 혁명의 불꽃은 이제 우리 모두의 의식에까지 변화를 가져오리라 확신한다. 이 모든 일은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베푸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 믿는다. 이런 때일수록, 특히 우리 기독청년들은 어떤 존재로 준비되어야 하겠는가? 새 시대를 승계(承繼)할 탄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쉼 없는 씨름꾼이며 싸움꾼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지내던 생활 속에서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삶의 국면(局面)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만나 그의 진리의 세계에 몸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새로운 대상과 차원을 향하여 씨름하고 싸우는 존재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등장한 나의 적수(敵手)는 누구며 무엇인가? 놀랍게도 그 대상은 바로 우리가 몸담고 살아 온 이 세상이며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은 그렇다고 해도, 세상이 우리의 새로운 적수라는 말이 웬 말인가? 내가 몸담고 있고 내 삶을 받쳐주는 그릇이기도 한 세상을 어떻게 적수로 볼 수 있단 말인가? 

         

기본적으로 신앙의 이해가 필요하다. 신앙은 현상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갱신과 개혁을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이 ‘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는 말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예수의 소명을 받은 제자들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마5:13-14)라는 말씀을 받은 무리들이었다는 점을 깊이 성찰하면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예수 통하여 우리는 너무도 보배로운 새로운 세계와 새 인생을 찾았다. ‘하나님의 나라’와 희년(禧年)의 세계란 포기할 수 없고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새 영역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성이 아닌 시작이라는 점과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는 고난과 인내도 반드시 감내해야 됨을 함께 본 것이다. 마치 태아를 임신한 임산부처럼 말이다. 여기에 우리의 고난과 영광이 함께 담겨있다(롬8:18 참조). 여기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거룩한 싸움과 씨름이 있다. 새로운 생명을 생산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야할 책임감이 부여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 대응해야 한다. 먹히지 않기 위한 싸움과 이루어내기 위한 씨름을 동시에 전개하는 존재가 되었기에 그렇다. 특히 우리의 의지와 목표가 분명할수록,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란 잘못된 제도권이나 문화가 우리의 새 가치관과 진리를 향한 행보에 제동을 걸고, 한발 더 나아가 우리의 것들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끈질기게 훼방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 싸움의 주역이셨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치열하게 거짓과 위선의 세상과 맞섰고 그 공세와 싸우며 어려움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그 때의 당한 공격을 환란(患亂)이라 표현하셨고(요16:33), 바울은 ‘고난(苦難)’이라고 표현하였다(롬8:18). 

        

예수님은 세상과의 싸움에서의 승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아셨다. 세상에 대한 승리야말로 전인미답(全人未踏)의 영역이어서, 당신마저 세상에 패배하게 되면, 세상 모든 죄인들의 구원은 물거품이 되는 일임을 잘 아셨다. 그 승리의 길을 당신이 선명히 보여주셔야만, 비로소 당신의 뒤를 따라 세상에 승리할 무리들이 등장할 수 있음을 잘 아셨다.

 

문제는 승리의 방법이다. 예수님은 물론 그 방법도 이미 잘 알고 오셨다. 바로 온갖 세상 죄악과 모순들이 빨려 들어가 있는 십자가(十字架)의 한복판에서 죄 없는 당신이 그 속죄(贖罪)의 제물로 죽는 일이었다. 그 일이 예수님의 마지막 승부수로서, 그 끝자락에서 취할 죄악과 사망에 대한 영원한 승리(勝利)를 여시는 일이었다. 거기에서 최후의 남은 과제는 무엇인가? 그 과정에서 발생할 육체적인 참혹한 고통의 잔을 피하지 않고 마시는 일이었다(마26:42참조). 결국 그 각오가 없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선언이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에서 터져 나왔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膽大)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절)

 

엄격히 보면, 이 선언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곧 다가올 시련의 계절을 맞게 될 당신의 제자들을 강건하게 세우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었다. 세상의 환란과 박해에 주저앉는 제자들이 아니라, 환란을 이겨내어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는 제자들이 되기를 소망하시면서, 세상 이겨낼 비결을 전하고자 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승리 선언은 그 동안 ‘세상은 이길 수 없다’는 잘못된 공식을 거부하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나 세상에 대하여서도 백전백패(百戰百敗)가 아닌 백전백승(百戰百勝)한다’는 점을 각인시키게 된 것이다.  

 

오늘의 세 본문들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과 자녀들로 하여금 진리로 세상을 이겨낼 사람들이 되도록 입체적(立體的)으로 돕는 지를 제시하고 있다.

 

o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자들이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성자(聖子) 예수님의 구체적인 방법을 전한다. 그것은 제자들이 당신 이후부터는 당신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께 직접 기도를 드리는 일이었다(26절).

지금까지의 하늘 아버지를 향한 기도는 전적으로 아들 예수의 몫이었다. 물론 제자들에게 평소 기도(祈禱)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지만, 그러나 그 기도가 제자들에게는 생활로 자리하지 못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반드시 직접 기도의 시절에 들어가야만 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직접 교제가 가능한 영적 핫라인(Hot-Line)이다. 예수 떠난 시대에도 하늘의 예수와 통신이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하늘 아버지께 아들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직접 기도하는 일 자체가 제자들의 세상 싸움과 씨름을 이겨내게 하는 결정적인 지혜요 방식임을 전수해 주려 하셨다(26, 28절). 기도의 생활화, 습관화로 세상을 이겨낼 제자들이 되기를 지시하신 것이다. 이 기도의 가르침이 그 후 마가 요한의 다락방 기도로 이어졌고, 나중엔 성령시대와 사도시대 여는 열쇠가 되었다(행1장-).

 

기도가 왜 그렇게 중요하나? 기도하면 그 때부터는 아들 예수께서 입으셨던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사랑과 은혜를 직접 받게 되면서(27절), 세상이 주는 환란 중에서도 하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은혜를 누리게 되어, 세상에 대한 영적 우위를 점하게 하기 때문이다(32-33절).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영적 효력을 누리는 일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o 이사야서는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성부(聖父)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박해하는 원수로부터 이겨내도록 일하시는 모습을 소개한다. 

본문의 에돔은 야곱의 형(兄)인 에서의 후손으로서(창36장), 이스라엘과는 핏줄 형제 족이다(신2:4, 23:7-8). 하지만 이 에돔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당했고(삼하8:13-14), 솔로몬 때에는 독립하기도 하면서 이스라엘과는 오랫동안 힘 겨누기를 해왔다(왕상11:21-22). 그러다가 B.C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파괴되어 유다가 무너지자, 에돔이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거민을 살육까지 자행하였다(시137:7,욥1:1-14참조). 

 

그때부터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한 원수의 상징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이 받게 될 대상이 되었다. 남도 아닌 형제의 곤궁을 악용하여 괴롬을 주는 에돔의 행태는 정의의 차원에서도 하나님의 가장 극렬한 심판을 받게 되는 대상이 된 것이다(1-5절). 에돔은 후에 기원 전 300년경 나바트 사람들의 공격으로 본토를 빼앗겼고, ‘이두매’(헬라식 이름)도 함락을 당하였다. A,D 70년 전쟁 이후, 역사에서 이두매인도 사라졌다. 

 

o 로마서는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성령(聖靈)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녀들을 세상 속에서 승리하도록 돕는 모습을 담고 있다. 즉 사도 바울은 세상 유혹과 도전 앞에 탄식하고 아파하는 피조물들의 신음을 들으면서, 그를 위해 주의 성령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교회 공동체)를 돕고 계시는 지를 점층법(漸層法)적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우리를 격려한다.

 

①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전 피조물(creation)의 희망임을 통감하고 정체성을 굳세게    견지해야 한다. 그것은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하여 자신들이 썩어짐의 종노릇에   서 해방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19-22절).

②하지만 하나님의 자녀 된 이들 역시 비록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목표가 아닌 과정에 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어서 속히 삶의 시련과 썩어짐에서 해방되어   전적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탄식하고 고대하며 산다(23-25절). 

③그런 모습을 본 성령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돕기 위하여 깊은 안타까움으로 친히 간구해 주신다. 이러한 성령의 편(便)들어주심으로 지금의 나약한 우리가 이렇게라도 거룩한 그 날을 향해 버티고 싸우고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26-27절)! 성령의 간구가 큰 도움인 까닭은 우리가 미쳐 못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드릴 간구’를 성령께서 해주시기 때문이다(27절). 이런 성령의 지원을 받은 자에게 남은 일은 무엇인가? 바로 참음으로 기다리는 일이다(25절)! 

 

o 결론은 이렇다

 

그렇다. 예수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승리로 이어져야만 한다. 예수님에게 우리는 당신의 미래이며 또 당신의 이 지상 사역의 계승자이기도 한 존재들이기에, 우리들은 반드시 예수처럼 이 부조리하고 악한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존재로 살아남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오늘의 말씀들이 제시해 주신 내용으로 더욱 무장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 아버지께 직접 기도하는 인물들이 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또 원수 갚으려고 맞서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까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의 수치를 막아주실 터이니까!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한다. 성령 받은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희망이기에, 우리는 반드시 참고 기다림에서도 승리해야 한다. 성령이 도우신다. 세상의 변화에도 말씀과 믿음으로 그 주역되어 살아남자. 그 영광과 위로의 카이로스가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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