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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8)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07-21 (화) 11:48 3년전 773  

본문) 계 11:15-19, 사 32:1-4,16-18, 눅 22:24-30

 

오늘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여덟째 주일이다. 우리는 마침 코로나19란 판데믹(세계적 대재앙) 속에서 이 절기를 맞이하고 있어서, 마음이 긴장의 연속이다. 지금도 온 세계는 매일 코로나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의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7.20일자 언론 보도를 보면, 전 세계 하루 확진자만 26만명에 이르렀고, 1,387만명이 감염되어 고생하며, 59만명이나 사망했다. 이는 그 어떤 큰 전쟁으로 인한 참사보다도 훨씬 더한 숫자들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절감한다. 

 

우리의 이런 처지를 헤아려서 일까? 지난 주 말씀에서부터는 지금의 어두운 상황을 뛰어넘을 새로운 영역을 말씀들이 제시하기 시작됐다. 바로 <새 하늘 새 땅>이다. 이것들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완전히 잊게 할 만한 차원의 놀랍고 신선한 것들이다. 그렇다고 그 새 것들은, 저 뿌리 없는 유토피아와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친히 이 땅위에 앞서 보내신 보혜사들, 예수와 그의 성령을 통하여 맛보게 하였던 세계였다. 

 

강림 후 여덟째 주일인 오늘은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준다. 곧 두 메시아들이 보여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밝혀주려 한다. 복음서는 제1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실상을 우리에게 맛보게 하고 있으며, 구약 예언서는 제2 메시아이신 성령으로 보여주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계시하여 주었다. 

 

계시록은 어떤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주와 함께 그곳(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할 자(왕 노릇할 자)가 누구인지를 규명해 주고 있다. 동시에 어떤 자가 죽은 자이며, 심판주이신 주님으로부터 멸망당할 자인지를 구별하신다. 특히 여기에서는, 그 멸망당할 자가 바로 ‘땅을 망(亡/파괴할)하게 할 자’였다는 지적이 주목되는 부분이다(18절). 도대체 그들은 어떤 생활을 하였기에, 그런 지적을 당하게 된 것인지 궁금하다.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주님에게 그런 자들은 어떤 자일까? 

 

코로나 사태는 우리 인류의 기존의 생활에 큰 도전을 안겨주었다. 그 바람에 지금의 세계인들은 직간접으로 뉴모랄(New Moral)을 찾아 살아가고 있다. 이웃과의 거리두기가 일상화되면서 우리의 숨겨진 모습들이 다양하게 드러났다. 내용상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끄러운 부정적인 면들도 많다. 생필품의 사제기를 하는 일, 인종 차별을 하는 일, 자기와 다른 차원의 사람들과 담을 쌓는 일, 폐쇄성이 강화되는 일, 공공성 대신에 이기적 대응에 집중하는 일 등등 어둠의 그늘들이 노정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부적합한 모습들이다. 

 

여기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소명을 받은 우리 교회가 더욱 집중하여 살펴볼 대목이 있다. 이는 오늘 계시록에서 지적한 부분, 곧 바로 ‘우리의 땅을 죽게 하고, 망(亡)치게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다(18절). 그것들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지 못하게 할뿐더러, 우리를 멸망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실상을 현재의 삶에서 찾아내야 하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차단하는 생활을 나아가야 한다. 그게 바로 ‘좁은 문’으로 가는 행보이고(눅13:24), 그것을 이겨내야만 우리에게 약속된 그 영원한 성 <새 예루살렘의 입주자>가 될 것이다! 

 

코로나 시대를 보내는 우리 한국사회 공동체를 크게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요즈음 국가의 최대 현안의 내용들을 직시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들의 삶의 주거지인 아파트 부동산을 재테크 투기장(投機場)으로 만든 일이다. 서울시내 아파트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얼마 전 어느 자매를 만났더니, 수년전 강남에서 마련한 행복주택이 최근에 입주할 때보다 5배 정도로 올라 있다고 말하더라. 정상이 아니다. 진정 미쳤다-! 

 

그러다보니, 요즈음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서울에 아파트 사두기에 골몰하는 모양이다. 돈 있는 지방 사람들도 서울에 아파트 하나 이상 사두(재)기에 열을 내는 모양이다. 다주택 보유자들이 급증한다. 수단방법 안 가린다. 그러다보니, 정작 서울에서 사는 가난한 주민들은 더욱 내 집 마련이 요원해졌다. 저금리시대의 출구가 바로 주택 투기 열풍으로 나타난 것이다. 비극이다. 결국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 ‘돈이 최고’라는 물질주의, 이때를 잡자는 한탕주의 등이 이 시대를 강타하고 있다. 그나마 소박했던 우리의 상식적 모럴이 무너져 내렸다.

 

가짜 뉴스시대의 광풍도 대단하다. 야만적 언론인과 위선적인 정치권력의 결탁으로 맺어진 가짜 뉴스의 비극은, 국민의 평화와 일치를 깨고 있다. 그냥 단순한 거짓과 ‘아니면 말고’ 식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진실이 아닌 것을 두고, 국민들을 완전히 양분시키는 일을 하고 있고, 또 거짓과 가짜의 노예가 되어 무가치하고 허망한 존재로 전락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 이들은 지금 국가 공수처 출범을 그토록 총력 저지하려하고 있다. 본인들이 떳떳하게 살고 정치하면 되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공수처를 그토록 반대하고 있는 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우리 공직자들의 정치 윤리와 도덕성은 크게 달라져야 한다. 그 영역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야만 한다. 무엇이 정치인지, 무엇이 큰 것인지, 무엇이 으뜸인지에 대한 식견과 철학부터 갖추고 나와야 할 것이다. 뿌리 얕은 이들이 나서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또 청산되어야 할 큰 과제가 있다. 우리 속에 깊이 뿌리내린 사대주의 의식이다. 사대주의란 약자가 강자를 맹목적으로 쫓는 입장을 말하는데, 우리 국민은 여전히 강대국 선호도가 강하다. 특히 친일 세력의 강고한 움직임들이 너무도 뻔뻔하다. 친미 세력도 마찬가지이다. 보수진영에서는 북한과의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종북(從北)세력’이라고 공격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증진하려는 입장에 대하여 ‘친중(親中)세력’이라고도 매도한다. 그게 정상적인가? 이런 흐름은 결국 망국적 분파(分派)주의를 피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런 강대국 의존주의가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에서 더욱 강하다는 점이다. 진정 큰 모순이며 반신앙적이요 비성서적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 태도이다. 분명한 우상숭배이다. 강대국은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가? 

 

우리나라는 지정학적(地政學的)인 위치에서 보더라도, 주변의 어느 강국들(미,중)의 부속국가처럼 되어서는 아니 될 처지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웃 국가들과 모두의 좋은 친구가 되고 이웃으로 자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스위스처럼 아예 영구(永久) 중립국이 바람직하나, 그것이 힘들면, 국가와 국민의 입장에 보다 유익(有益)할 수 있기 위한 지혜(智慧)와 유연성(柔軟性)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강점들을 계속 개발하고 발전시켜서, 주변의 저들의 약점을 보완해주고 채워줄 능력 있는 이웃이 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이러려면 역량 있는 좋은 지도자가 더욱 필요하다. 주변 강국들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들의 독창성를 제고하면서 그들과의 폭넓은 연대를 강화시켜갈 지도력이 정착되도록 우리 국민들은 깨어 있어야만 한다. 혹이라도 친일. 친미. 친중 등의 어느 한쪽 세력에 경도(傾倒)된 인물이 집권자로 들어서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또 다시 ‘세계의 동네북’이 되고야 말 것이다.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삶의 방식이 세상과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마치 마5장의 팔복(八福)처럼, 세속의 복(福)과는 다른 차원의 복을 추구하듯 해야 한다. 세상 인정 이전에, 하나님의 인정과 국민의 사랑을 우선하는 백성들이 되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 최고의 백성이 되리라(계11:18,중). 그러면, 세세토록 왕 노릇하고 계시는 우리의 모델들 두 분을 만나보자. 

 

먼저 구약 예언서를 보자

본문은 유대 왕국이 B.C 701년 경 앗수르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는 등의 국난의 위기에 봉착하여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을 배경하고 있다. 그때는 부패와 불신으로 나라의 국력이 밑바닥이었다. 예언자는 그 시절을 마치 광풍이 휘몰아쳐대는 순간이었고, 폭우를 피할 수 없는 처지였으며, 곤비하기 짝이 없는 순간으로 묘사하였다(2절). 

 

그러면서도 그들이 취한 대응책은 남부의 제국인 애굽의 도움을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자기들을 여지껏 보호하신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려는 마음은 아예 없었다.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위선적이었고 형식적이었는지를 보여 준 것이다. 선지자는 그런 그들에게 애굽(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를 찾으라고 강력히 권했으나, 깊은 불신과 불의에 깊이 빠져 있던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청각장애와 시각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두려움의 터널에 갇혀 산 것이다. 

 

그런 중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에 의해서가 아닌 당신 자신의 자비로운 선택으로, 그들의 미래에 지금과는 전혀 비교되지 아니할 의(義)의 나라가 임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셨다. 그를 위하여 여호와는 한 왕(王/메시아)을 그들에게 보내시겠다고 하셨다. 그 왕의 특성은 무엇인가?. 바로 공의(公義/righteousness)와 정의(正義/justice)였다(1절). 오실 그 왕은 누군가? 위로부터 내리신 성령이시다(15절)! 창조 때에 혼란을 질서로 바로 잡으신 그 성령 하나님이셨다(창1:2참조). 

 

그의 통치 아래에서 모든 백성들은 기존의 것과는 아주 다른 체험과 생활 속에 살게 된다. 곧 <새 하늘, 새 땅>을 경험하게 된다. 맛보기도 하고 만들어가는 위치에 선다. 그게 바로 ‘왕 노릇하는 모습’이다(계11:15,17절). 그래서 광풍을 피하고, 폭우를 막아내며, 마른 땅에서 만난 냇물 같고, 무더위에 만난 큰 바위 그늘 같음을 맛보게 된다(2절). 그 뿐 아니다.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리며, 마음에 지식과 지혜도 자리 잡으며, 어눌한 혀마저 정확하게 입이 열리는 은혜가 주어진다(3-4절). 그 내린 복이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자연계에도 작용한다. 그 메시아의 정의와 공의를 통한 지배가 실현될 때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 

-‘공의의 열매는 화평(和平/peace)이요 결과는 영원한 평안(平安)과 안전(安全)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16-18절).  

 

☞ 메시아이신 성령의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성령이해와는 너무도 차이가 크다. 우리는 성령이 불의하고 불공평한 인간 세상의 판을 정상화시키는 정의와 공의의 주역으로 보고 상대하지 못했다. 오히려 성령을 인간의 기복(祈福)수단으로 삼아왔을 뿐이다. 그런 경도된 성령이해 때문에, 사회정의와 평화공동체 운동에 헌신하는 진보진영도 정작 평화와 정의 사역을 펼치시는 성령의 역사에는 무관심하거나 외면하고 지내왔다. 얼마나 큰 손실인가? 따라서 이제는 성령의 이러한 정의와 평화를 위한 사역들에도 새롭게 눈이 떠야만 하겠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제1 보혜사이자 영원하신 성자 예수께서 이 세상에 파송되어 오셔서, 그가 이 땅에서 실현하시고자 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진면모가 어떤 것인지를 소개한다. 물론 주님의 새로운 시범(示範)들은 복음서 전체에 가득하지만, 그러나 이 본문은 예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의 지고(至高)의 관심사인 ‘누가 크냐’(24절)라는 부분에 대한 대답으로서 주어진 말씀이요 시범이어서, 그 의미와 가치가 크다. 

 

주님은 입과 몸으로 당신의 나라의 영원한 가치인 새 하늘 새 땅의 뉴 모럴을 전하셨다. 

1) 제자들에게는 세상의 임금들처럼, 자기가 말로 지시하고 주도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은인(Benefactors)인양 행세하는 자가 되지 말 것을 요구하셨다(25절). 그 대신 가장 어린 자로 활동하면서 모두에게 실질적인 필요자가 되는 것과, 가장 밑바닥에서 모두를 섬김으로서 실질적으로 전체를 움직이는(control) 실력자가 되라고 하셨다(26절). 명분(名分)보다 실질(實質)을 추구하는 인물상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適合)하다고 보신 것이다. 

 

2) 제자들과는 식탁에서 당신의 모습을 잘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제자 공동체에서 자주 식사봉사를 떠맡아 감당하시면서 낮은 자를 섬기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27절 참조). 이는 군림하고 지배하며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낮은 자와 어울리고 협력하며 돕는 따뜻한 신의 파격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는 주인이 종을 섬기고 선생이 제자를 섬기며, 지배자가 백성을 섬기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새로운 차원의 하늘 리더십을 역사의 무대 위에다 올리신 일이었다. 

 

예수님의 이러한 섬김의 행보와 교육은 그를 따르는 교회와 제자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그 수명이 다함이 없는 영원히 왕 노릇하는 집단이 되게 하였다. 주님이 그들과 늘 함께 계셨고, 고난 속에서도 그 행보를 묵묵히 감당하는 그들에게 감동과 생명을 안긴 연고이다(28-30절).  

 

서신서인 계시록을 보자

계시록은 인류가 살아온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다. 두 가지 내용을 전하는데, 첫째는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는 놀라운 모습을 전한다(15절). 곧 세상 존재가 하늘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대상이 되는 기적의 모습을 증언하였다. 

둘째는 그 나라에서는 상(償)받을 자와 망(亡)할 자가 분리됨을 전한다. 상 받을 자는 세상 풍조를 쫓지 않고 주의 이름을 흔들림 없이 경외하며 지낸 자들이다. 멸망할 자는 마치 죽은 물고기처럼 세상 풍조대로 따라 쉽게 살면서, 앞에서 지적한대로, 땅(인간 세상)을 망하게 하는 일에 한통속이 되어 살아온 자들이었다(18절). 그래서 땅 주인의 분노를 피하지 못한 것이다. 나의 지금의 모습은 어느 쪽인가!

 

결론이다

우리는 이제 새 하늘 새 땅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죽어서 택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심판자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베풀어 주실 몫이니, 믿고 맡기면 된다. 우리는 다만 우리 안에 와 있는 그 세상, 즉 두 보혜사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제시된 그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인 새 하늘과 새 땅 만을 취하고 살아야 한다. 그 나라는 처음 것에 대한 단절은 물론, 섬김과 교제와 나눔으로 통하여 얻어진 평화와 쉼과 안전한 세상이다. 좁은 길이지만, 꼭 가야만 할 길이다-! 

 

만일 이런 주어진 구원과 은혜의 질서를 외면하거나 거부하면 어떻게 되나? 그런 자의 삶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요(계3:1),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망하게 하는 악한 짓을 하고 살아온 자이기에, 하나님이 내리실 영원한 심판을 피하지 못하리라. 부디 우리 앞에 활짝 보이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과 그 안에 있는 언약궤가 밝히 보이는 눈이 되길 축원한다(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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