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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2-28 (수) 16:46 6년전 1388  

분문 ) 눅15:11-32, 호14:1-9, 요일1:8-2:6 

 

오늘 세 본문의 말씀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상대하는 입장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입장의 차이를 말하는 것으로서, 다음의 세 가지 차원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첫째는, 교회 공동체 안에는 대략 두 가지 형태의 인간상들이 존재한다. 이는 세상의 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 있는 그의 문제 많은 자녀들의 모습들을 소개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 문제들이 무엇인지는 복음서에 나타난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모습으로 대변한다. 

 

둘째는, 이렇게 서로 다른 차원과 입장을 가진 자들은 모두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서 관리되고 보전된다는 점이다. 형제들 사이에 서로 간의 간극(間隙)은 존재하지만, 그러나 아버지 안에서 그들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ONE)이다. 

 

그러기에 이 말씀들의 접근은 두 아들에 대한 각 자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시도할지라도, 그러나 주안점은 그들을 품고 계시는 그들의 아버지의 마음과 통전해내는 아버지의 능력에 주목해야 한다. 그 아버지가 바로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시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 아버지의 입장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서로 다른 형제의 간격이나 문제들도 결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두 자식들 간의 문제는 그들의 아버지의 행동과 마음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는 때에, 자연스럽게 해결되게 된다. 

 

셋째는 ‘율법으로냐 복음으로냐’라는 구원론(救援論)의 충돌로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이야기는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종교로서의 한계를 첫째 아들의 모습을 통하여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 대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화목제물을 통한 자비와 긍휼의 구원론이 있음을 둘째 아들을 용납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보여주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요일2:1-2 참조). 결국 ‘잃은 양’을 찾는 데에는 재물의 손해나 마음의 간절함과 애타게 찾는 등의 그들의 아버지가 보여주신 바와 같은 ‘거룩한 희생’이 없이는 결코 되지 아니함을 복음서가 보여 주려하였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라는 큰 틀에서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용납한다고 하지만, 실재로는 서로의 갈라진 갈등과 대립의 구조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대교와 개신교, 카톨릭과 무슬림, 그리고 개신교들 중에서도 서로들에게 모두 깊은 불신과 갈등의 골을 매우지 못하고 지낸다. 좁게는 성도들 개개인간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왜 그런가? 무엇이 장애인가?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헌신과 수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불효자요 자기들 입장만 고집하는 죄인인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노력을 기우려야할 때이다. 그 분께 돌아가는 일이 시급하다. 너와 나가 따로 없다. 다음의 뜨거운 말씀을 함께 가슴에 담고 말이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엎드려졌느니라’(호14:1)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1) ‘탕자(蕩子)의 비유’로 널리 알려진 복음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매우 대조적인 두 아들   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표적인 두 유형(類型)를 찾아 볼 수 있게 한다. 물론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의 모습과 마음을 대변한다. 

 

그에게는 매사에 모범적인 큰 아들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장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에 성실하였기 때문에, 자기 의와 업적에 대한 주장이 강하다. 또한 자기의 삶이 그러하기에, 자기와 같지 못하게 처신하는 사람(동생)에 대하여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매우 비(非) 포용적이고 독선적이고 계산적이어서, 철부지 동생을 향해서는 물론 아버지의 둘째를 향한 그러한 포용적인 처신까지도 비판하는 입장이다.

 

둘째 아들도 자기주장이 강하긴 마찬가지이다. 부모를 모신 형과는 달리 부모에 대한 무책임적인 태도가 두르러진다. 아버지도 자기를 위한 대상으로 간주할 뿐이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간섭이 항상 부담되어서 독립하기를 원하였고, 나중에는 자기가 받게 될 유산까지도 가불(假拂)을 요구할 정도로 집요하다. 형에 비하여 비(非)계산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삶에 큰 대가를 치르게 된 인물이다. 

 

2) 여기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아버지의 결단(決斷)이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둘째의 그런 무례한 요구를 아무런 전제 없이 그대로 들어준 것이다. 어떤 판단에서였을까? 둘째가 떼어 준 그 분깃으로 잘 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실패할 것으로 보았을까? 

 

내용을 보면(20절), 그 아버지는 둘째가 나간 후부터는 둘째를 매일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둘째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 대신에 매우 염려하고 있었음이 보여준다. 즉 실패할 것을 예측하면서도, 아버지는 그 소중한 분깃을 떼어주었다는 말인데, 그 까닭은 무언가? 

 

3) 다음과 같은 교육적(敎育的) 차원의 배려(配慮) 때문으로 보인다. 

한번 마음이 들뜬 아들을 강제로 끌어 안치는 것보다는 기회를 주어 자유롭게 세상살이를 체험하며 배우는 것이 훨씬 좋다고 본 것이다. 

사실 좋은 것(아버지와 가정과 환경 등)을 좋은 줄 모르는 자를 깨우치는 방법은 이외로 많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거절당해 집안에 눌러 있게 된 아들에게서 새로운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럴수록 부자관계도 더욱 악화되어 더욱 아버지를 압박하고 계속 괴롭히는 짓을 하는 둘째가 될 것으로 본 것이다

 

4) 결국 그 아버지의 그런 선택은 최상의 결과를 얻게 된다. 

집 떠나기 전의 아들이 아닌 전혀 새로운 아들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표현대로라면, 둘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였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자’였다(24, 32절). 세상살이의 비정함과 혹독함을 몸소 체험하면서, 둘째는 정말 몸과 마음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세계의 귀하고 소중하며 풍요로움을 새삼 알게 되었고, 자신의 어리석음도 통절(痛切)하게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큰 품과 자신의 옹졸한 모습에 눈이 뜨면서, 어리석은 아들로서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에 회개(悔改)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 왔다(17절). 호세아의 요구대로,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 돌아온 탕자’였다(호14:2절 참조). 

 

5) 아버지의 또 다른 의외성(意外性)의 선한 공세가 또 한 번 우리를 놀랍게 한다. 

세상 부모들은 아마도 그렇게 탕진하고 돌아온 자식에게는 혹독한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고, 그가 가정과 부모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적절한 벌칙을 부가했을 터인데, 이 아버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아버지는 최고 최상 최선을 다하여 이 둘째를 환영하고 아들로 영접해 주었다. 아들의 짧은 참회고백 한마디에(21절), 아버지의 위로와 환영의 서비스는 끝이 없이 펼쳐졌다! ‘잃은 양을 찾아낸 목자’의 큰 기쁨의 표시가 지금 아버지의 그 마음 자체였다.

 

나는 이 잔치가 아버지의 매우 의도성을 가진 액션이라고 본다. 즉 진짜 내 자식으로의 복귀를 공인하는 공인식(公認式)을 마련하면서, 돌아온 둘째가 아들로서의 정상적이고 공식적인 행보를 하게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라고 본다. 뒷소리에 시달리지 아니하는 당당한 아들 되게 하신 아버지의 배려 말이다. 우리도 공인식이나 취임식의 의미가 그 당사자에게 얼마나 확실한 위치 보장을 해주는가를 잘 안다! 그 이후의 둘째의 모습은 어땠을까? 더 이상 자기를 주장하는 아들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속 깊은 진짜 아들이 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6) 그런 아버지의 행위에 노발대발(怒發大發)하며 저항한 이는 놀랍게도 첫째 아들이었다. 

그에게 동생은 당연히 응징을 받아야할 죄인이었다. 심판과 정죄를 받아야 마땅한 둘째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아버지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파티 참여 권유도 거부하였다. 그 바람에 첫째는 실질적인 불효자의 진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첫째의 큰 문제는 무엇인가? 함께 살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릴 줄 모른 일이다. 그는 돌아온 동생으로 인하여, 앞으로 가정과 부모에게 미칠 긍정적인 효과에는 매우 무지하였다. 돌아온 아들을 위한 잔치는 바로 아버지를 위한 잔치이고, 좋은 동생을 새롭게 얻게 된 형 자신의 것이기도 함을 첫째는 모르고 있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신자는 결국 끝까지 불효자(첫째)일 뿐임을 말해 준다. 그런 점에서 첫째도 회개해야할 또 다른 죄인이다. 

 

호세아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본문은 둘째를 영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신 예수님의 비유의 근거가 되는 내용으로서, 잃은 양을 찾은 목자가 베풀 은혜들을 전한다. 

 

1) 이스라엘이 아스르와 그의 우상 종교 숭배를 어서 회개하고, (저 둘째처럼) 여호와께 말씀(죄의 고백)을 가지고 돌아올 것을 촉구한다(1-3절). 

2)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긍휼과 자비를, 마치 둘째에게 베풀어 주신 아버지의 환대처럼, 온갖 선하고 좋은 것들을 다 쏟아 부어 주실 것을 뜨겁게 약속하신다(4-8절)

 

서신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복음서의 비유에 나타난 두 아들의 경우를 정리하여 전하는 내용이다. 

 

1) 둘째처럼, 회개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줄을 드러내게 된다. 

2) 첫째처럼 거부하면, 그는 말씀이 없는 자로서 의로우신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이해가 안 되는)로 간주하는 범죄자가 될 것임을 경고하였다(10절). 

 

결론은 이렇다 :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려면, 먼저 아버지(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자녀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나와 다른 형제자매들까지도 사랑하고 포용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하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 자신부터 스스로 ‘잃은 자’처럼 될 뿐만 아니라, 돌아온 자들을 배척하고 정죄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될 것이다. 첫째의 모습처럼 정죄와 심판자 연(然)하는 율법적 신앙인의 틀에서 벗어나, 돌아온 둘째처럼 겸손과 회개의 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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