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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04-22 (수) 19:14 3년전 886  

본문)  요20:19~31, 사43:8-13, 행10:34-43

 

부활절 셋째 주일이다. 우리는 이번 절기에 들어서서 이미 두 주간에 걸쳐, 부활에 관한 증언들을 통하여 부활신앙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첫 주일에는 부활의 시작과 기원 그리고 부활 역사가 이루어갈 미래의 모습에 대하여서 말씀을 들었다. 둘째 주일에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부활의 맛보기와 체험하기, 그리고 그 방법들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부활 이전의 나사렛 예수와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 예수의 변화된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다. 바로 글로바와 다른 제자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사라지는 모습을 통해서였다(눅24:30-31절 참조). 그 장면을 잠시 복기(復棋)해 보자. 그 때 사라진 예수는 어디로 가셨던가? 분명한 것은 주님은 사라지면서 제자와의 관계를 끊으려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공고한 관계로 나아간 점으로 보아서-, 주님의 사라짐은 결코 증발(蒸發)이 아니었다. 사라짐으로 도리어 ‘그들과 언제나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Immanuel)의 주’가 되시려고 하셨다.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은 부활 이전의 육체적인 한계와 시간과 공간적 제한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존재를 넘어서서, 불가시성(不可視性)과 무제한적인 영광(榮光)의 영적 존재에까지 확장(擴張)된 변화(變化)의 옷을 입게 되면서, 비로소 온 세상의 구세주의 사역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하신 것이다. 즉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업그레이드된 ‘참 인간이면서도 참 하나님’이신 진면모를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 첫 작업이 바로 제자들과의 거리 좁히기였다. 그 방법은, 엠마오의 경우에서처럼, 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마음과 영혼 안에 들어가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확실한 육체적 거리(Physical distance) 차원이 아니라, 확실한 영적 거리(spiritual distance)를 보전하는 일을 하셨다! 곧 그들과의 관계를 상대적(相對的) 차원에서 절대적(絶對的) 차원으로 만들어 놓는 일이었다. 필요할 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같이 있는 차원의 관계를 구축하신 것이다. 

 

그때부터 인간은 주님을 성령과 말씀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존재에 오시되 보혜사(保惠師)로서오신 주님은 그때부터 인간의 미급한 인격과 지식과 의식과 생각 등에 개입하면서 인간 존재를 보다 온전하고 성숙하도록 돕고 깨우쳐 주셨다. 곧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 속에 영으로 들어가셔서, ‘도움자-상담자-위로-치료자’가 되신 것이다(요14:16-20절 참조). 


우리는 이미 참 보혜사의 모습을 엠마오 제자들을 대하던 부활의 예수에게서 확인했고, 그와의 만남으로 즉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 두 제자에게서 보혜사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도 확인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는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을 위대한 걸작(傑作-Masterpiece)으로 재창조하신다. 갈릴리 어부 출신 제자들만 그렇게 걸작으로 만드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와 그의 영인 성령을 받은 모두가 다 그 대상들이다. 지금의 여러분들도 모두 그 은혜를 받고 있잖은가! 

 

그런데 이렇게 인생의 품질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게 하는 특별한 요인이 있다. 그것은 그 동안의 내 인생의 품질을 저하(低下)시켜왔던 것으로서, 첫 사람 아담에게서 흘러와 내 안에 완고하게 자리하고 있던 죄성(罪性)을 부활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처리해주시기 때문이다. 실로 스스로의 처리가 불가능한 죄성을 내 안에 오신 성령이 친히 처분해주시므로, 내 인생 품질이 순수해지고 깨끗해졌기에 가능했던 걸작으로의 새 삶이었다(롬7:20-23참조). 

 

오늘의 말씀은 12제자들의 부활 체험 이야기이지만,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부활의 증인(證人)으로 세움 받게 되는 것이었다. 예수 부활도 본래 예수의 능력과 존재의 과시용(誇示用)에 있지 아니하고, 부활의 은총과 생명을 알려서 그것을 믿는 모든 자들이 구원받고, 그들을 통하여 이 세상까지 살리고자 함이었잖은가! 그 일을 위하여 그 선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은 연대하고 입증해 줄 신실한 증인들이 절대 필요했다. 기독교 역사는 그 증인들의 역사이기도하다! 

 

복음서를 보자

부활하신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뒷정리 부분이기도 하다. 부활의 주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찾으시는 일들이 지난주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이야기에 이어서 계속되고 있다(눅24:13이하). 찾으신 이유는 분명하다. 당신의 하늘 본향으로의 떠남 이전에, 제자들을 당신의 부활 증인들로 온전히 세우시고자 하심 때문이다. 곧 한번이라도 더 제자들을 만나서, 그들로 하여금 부활의 믿음을 갖고 그 은혜를 누리며, 온 세상에까지 부활의 은혜로 채우시고자 하심이었다. 

 

1) 그 날 밤(안식 후 첫날-부활 당일)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군 체’ 함께 모여 있었다. 깊은 두려움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음이다(19절). 예수를 잃자, 인간들이 두렵고 세상이 무서웠다. 

 

2) 그런데 대 반전(反轉)이 발생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서, 그들을 향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며 축복하셨기 때문이다(19절). 그러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보이셨다. 십자가에 박혔고, 창에 의해 찔림을 당했던 그 신체 부위를 직접 드러내 보이시면서, 실제로 죽임 당했다가 다시 사신 그 예수이심을 제자들이 직접 확인하고 믿게 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어땠을까? 당연히 주를 보고 기뻐했다(overjoy-20절). 

 

3) 주님은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의 축복과 새로운 임무들을 부여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절). 이 축복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 예수 당신에게 임하신 그 축복을 제자들에게도 전이(轉移)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걸 ‘너희도 받으라’고 하셨다. 감히 이 세상의 그 어떤 힘과 능력으로는 범접할 수 없고, 오직 하늘에서만 부여할 수 있는 그 죽음에 대한 승리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담은 평화(peace)였다!  

 

3) 파송 임무(任務-mission)도 부여하셨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하). 세상을 넘어서고 평정할 평화의 힘을 부여받은 자들은 주님의 대변인(Speaker)이 되는 사명이 있음을 일깨우셨다. 곧 복을 혼자 누리지 말고, 맛보지 못한 체 어둠과 슬픔과 차별과 배척과 같은 숱한 인간적 사회적 장애들로 신음하며 사는 자들을 향하여, 그 평화의 축복을 전하면서 그들을 해방하고 자유하게 할 임무와 책임(責任)이 있음을 알리신 것이다. 

 

4) 이어서 제자들을 향하여 당신의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Receive the Holy Spirit)라고 외치셨다(22절). 주님의 이 숨을 내품는 행위는 아담을 흙으로 지으신 창조주 여호와께서 그의 육체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모습과 흡사했다(창2:7, 겔37:9참조). 즉 성령을 받은 사람은 생기를 받았기에 생령체(生靈體)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육체 중심의 인간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생긴 영적 존재가 되었음을 확인해주는 조치였다. 또한 이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의 영이기도 해서, 평안을 끼치려는 부활의 증인에게는 절대 필수적 요인이 되었다.

 

5) 성령에 의한 파송인들에게 부여된 매우 특별한 권세도 드러났다. 바로 사죄권(赦罪權)이다(23절). 이 점은 평안(샬롬)를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바로 상대 속에 있는 죄악이기 때문에, 그 부분의 해결 없이는 샬롬의 축복 자체가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밖에 없어서, 그 점을 배려한 사죄의 권세를 선교자들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죄악을 지적하고 치유하여 평안하게 할 권세까지의 일체를 파송자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파송의 진정성을 보게 된다. 

 

6)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이야기는 부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갖추어야할 마음의 자세를 일깨워주는 일화(逸話)이다(24-29절). 이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뵙지 못하고도 믿어야했던 초대교회 신도들의 난처했던 신앙상의 문제를 압축해 올리면서, 그 답을 제시한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기만-! 중요한 점들을 확인해 본다 : 

 

① 부활의 복음의 기본은 역시 평화(peace)에서 나온다(26절). 세상을 이긴 여유와 승리에서 나온 평안이 선교사의 밑받침이어야 한다. 그 놀라운 힘의 물결이 흘러 들어가면, 생명체가 다 살아나고 번성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창조주의 축복이 현실화된다. 

② 이 부활 복음의 능력은 언제 맛보게 되는가? 듣는 자가 그 초대의 말씀에 의심 없이 믿음으로 응답할 때이다(Stop doubting and believe). 믿고 자기 마음의 문을 열어 영접하게 되면, 부활의 주님의 들어오셔서 그와의 기쁨의 파티를 펼쳐주신다!(계3:20,요3:16참조). 

③ 반드시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의 주를 향한 신앙고백이 도마가 했던 것처럼 분명하게 터져 나와야만 한다. -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7-28절).

④ ‘더 큰 믿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도 믿는 것이다(29-30절). 즉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 표적이나 기적에 의한 믿음보다도 더 큰 믿음임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를 향한 권고이기도 하다. 주님은 말씀으로 찾아오시잖은가! 

 

구약을 보자

증인들을 앞세워서 당신을 알리고 뜻을 펴시는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오랜 관행이었음이 드러났다. 먼저는 성부이신 여호와 하나님도 마찬가지였다. 구약 내용을 보면, 여호와는 특정인과 집단을 당신의 대변인(Speaker)이나 증인으로 선택하고 앞세워서 당신과 당신이 하시는 일들을 알리셨다. 소위 ‘대변인(代辯人) 시대’를 삼위일체 하나님이 여신 것이다. 

 

☞ 이번 총선에서도 대통령의 대변인들이 출마하였는데, 그 중 직전 대변인으로서 광진을에 출마한 고민정 후보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기가 대통령의 뜻과 철학을 곁에서 가장 잘 배우고 익힌 후보이기에, 당선되면 대통령의 뜻을 잘 반영시킬 의원이 되겠다고 유권자를 설득하여, 결국 실력 있던 야당 중진을 주저앉게 하였다. 증인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 

 

1) 증인들이 목표할 대상(對象)들이 드러났다. 대상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들이었다(8절). 즉 영적 시청각 장애인들이 하나님의 증인들이 상대할 대상들이었다. 그들은 누구였나? 바로 포로로 지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아무리 모였어도 제대로 알고 분별하여 나아갈 길을 깨우쳐 줄 지도자(하나님의 증인)가 없었기에, 여전히 길 잃은 양들일 뿐이었다(9절). 하나님은 바로 그들에게 증인을 보내셨다. 

 

2) 그러면 하나님에게 ‘너는(너희는) 나의 증인(證人)이다’(9-10,12절)라고 선택 받은 자들은 누구인가? 예언자 개인이기도 하고(8-9절), 페르시아 제국의 대왕인 고레스 같은 시대의 이방 집권자이기도 하며(10-11절), 포로기를 마치고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기도 하다(12-13절). 

 

3) 증언의 내용은 살아계시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여호와를 알리며, 태초부터 존재하신 진정한 구원자인 하나님을 전하여 믿게 하여 그들을 구원받게 하는 일이었다(전체내용). 

 

서신서를 보자

사도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증인으로 직접 선택 받은 대표 제자였다. 그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적 시청각 장애에 빠져 있어서 주님을 향한 시행착오도 많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선택과 파송의 위임을 받았고 충만한 성령도 받으면서, 부활의 증인으로 활발히 선교하는 사도였다. 성령 하나님은 그런 그를 이방인 로마 장교이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던 고넬료 가정에 보내셨다. 부활의 복음이 유대를 넘어 땅 끝으로 향하는 순간이었고(행1:8), 이방인 선교의 첫 무대여서 사도의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하였다. 

 

☞ 베드로는 성령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그곳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선포하였다:

① 하나님은 진정 사람을 외모(外貌)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과 세계 어느 민족 누구든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르게 사는 사람은 모두 다 받으시는 분이심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34-35절). 

② 그것은 ‘만유(萬有)의 주(主)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기인한 화평의 복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실 나사렛 예수의 복음은 처음부터 민족이나 신분이나 성별이나 종교에 구애 받음이 없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베풀어진 것이었다. 선행으로 하셨고, 마귀에 눌린 사람은 누구나 고쳐주셨다(38절). 이것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화평의 복음에 기반을 둔 ‘만유의 주’이심을 말한다. 

③ 그런 주님이 유대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임도 당하셨는데, 하나님이 그를 제3일에 다시 살리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때부터 미리 택하신 증인들이자 그를 모시고 음식까지 먹었던 자기들에게 계속 당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자기들은 바로 그 부활의 증인이라 했다(39-41절).  

④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분부는,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 되셨다는 점과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의 이름을 힘입어 구원(救援)을 받는다고 내용을 전하는 것이었다(42-43절). 

 

결론이다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 방법은 성령과 말씀(진리)로 오신다. 

사정이 이러한 데-, 우리가 부활의 주이신 예수님과 그가 보내신 성령을 받지 아니해도 되겠는가? 이제 우리는 저 유명한 율법학자요 진실한 신앙인이었던 니고데모를 향해서 주님이 단호하게 요구하셨던 말씀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3,5참조). 보혜사 성령의 임재와 도움을 꼭 받아야만 된다. 

 

우리의 받은 성령은 부활의 영이시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모든 고난과 사망 권세를 제압하시고 이루어낸 평화의 복음이다. 성령과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우리를 주의 증인으로 세웠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자유하게 하시는 성령을 힘입어, 이 땅에 죄와 불의의 노예로 살고 있는 모든 불쌍한 영혼들이 그 굴레에서 해방되도록 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겠다. 

 

 

<참조자료> 

((참고로, 기독교 역사학자 김용호 목사가 전한 <초대교회가 세계적인 대전염병을 대처한 모습>에 관한 글을 소개한다. 팬데믹의 위협 아래 있는 지금의 우리의 신앙적 대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초대교회는 제2세기와 3세기에 두 번의 대 전염병을 맞이했다. 한번 시작하면 십 수 년간계속되는 바람에, 수천만 명의 희생이 뒤따랐다. 그때마다 로마 황제들은 그 원인이 ‘이방신을 믿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그랬다’며 교회를 박해하였다. 하지만 결국 교회는 그 박해 속에서 일어나 승리하였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나? 몇 가지 요점만 소개한다. 

 

① 교회는 그 때를 이웃사랑을 실천할 기회로 삼고 활동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감염자들을 보살피고 소생할 수 있도록  음식을  제공하며  환자 스스로 병을 이겨낼 수 있는 면역력을 키우게 도왔다. 그러다 병이 옮으면 그 아픔을 십자가 사랑으로 기꺼이 품으며 고통을 감내했다 

② 사랑하되, 신자만이 아니라 이교도까지도 차별 없이 돌보았다. 그리스도의 화평의 복음에 근거한 올바른 이웃 사랑을 그들이 말씀에서 배운 대로, 제대로 된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③ 버려져서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시신들 수습에 앞장섰다. 자신들도 도피하여 무덤에 살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한밤중에 검은 옷을 입고 시신들을 수습하며 거리들을 깨끗하게 하였다. 

④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 주님의 부활 신앙을 품고, 구원과 영생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불안에 떠는 숱한 병자들에게 희망의 천국 복음을 깊이 전했다.   

 

☞ 이런 차별화된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팬데믹의 큰 위협들은 교회를 죽이지 못하고 도리어 살리고 그들을 구원하며 온 세상의 희망의 종교가 되게 한 것이다. 이 자리를 우리 교회들이 회복해야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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