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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8-02-22 (목) 13:59 6년전 1434  

본문 ) 눅15:1-10, 렘31:10-14, 벧전2:18-25 / 3.1절 99주년 기념주일 (2.25)

 

우리는 지난주일, 하나님의 잃은 양(민족)이었던 사마리아를 찾으시던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예수의 ‘잃은 양’ 찾는 일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고 이유임도 알았다(눅9:55참조). 게다가 오늘 세 본문에서는 당신의 마지막 행보인 사순절의 여정을 바로 그 잃은 양들을 찾는 일에 집중하고 계심을 다시금 확실히 하셨다. 

 

복음서에는 ‘잃은 자’란 직접적인 표현들이 가득한데(5번 정도), 그렇다면 잃어버린 자들은 대체로 누구인가? 그 의미는 이렇다. 한때는 목자의 울안에 함께 있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흩어졌거나 빼앗겼거나 그 어딘가에서 빠져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양들(민족, 영역, 개인 모두 포함)로서, 목자 입장에서는 반드시 되찾아 와야 할 대상들이다. 그런 점에서 잃은 양은 원천적으로 불신자이거나 이방인이라기보다는, 주 안에서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야할 대상들이다. 그대로 버려두면, 생명 자체를 마귀에게 완전히 빼앗길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잃은 양을 찾아 나섰던 예수님의 접촉 대상자들은 확실히 우리와는 달랐다. 그 두드러진 차이가 무엇일까? 놀랍게도 몇 일전, 나의 카톡(Katalk) 통신에 이광천 장로께서 <나와 예수님의 다른 점>이라는 제목의 내용을 이렇게 전해 주셔서(2.21) 크게 공감하고 감사를 표하며 그 전문(全文)을 올린다. 

 

나는 양 아흔 아홉 마리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양 한 마리 편에 서 있습니다.

나는 숫자를 중히 여기지만 예수님은 한 영혼을 중히 여기십니다. 

나는 의로운 군중 속에 서있지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 편에 서 계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죄를 보지만 예수님은 대신 죽어줄 사람을 보십니다. 

나는 어른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 편에 서 계십니다.

나는 강자를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약자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나는 화려한 의상을 걸친 사람편이지만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편이십니다.

나는 외모를 보지만 예수님은 살려야할 사람을 보십니다. 

나는 즐기는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편에 서 계십니다.

나는 쾌락을 즐기지만 예수님은 아픔을 함께 나누십니다. 

나는 잔치 집을 보지만 예수님은 초상집을 보십니다.

나는 웃음을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눈물로 돌보심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나는 건강한 사람들 편에 서 있지만 예수님은 병자들 편에 서 계십니다.

나는 도와줄 사람을 보지만 예수님은 섬길 사람을 보십니다. 

나는 부자 편에 서 있고 예수님은 가난한자 편에 서 계십니다.

나는 재물을 보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보십니다. 

나는 삯군 목자 편에 서 있고 예수님은 선한 목자 편에 서 계십니다.

나는 직분을 보지만 예수님은 희생을 보십니다.  아멘.

 

o 복음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다음의 두 가지 차원으로 이 내용을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1)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장 큰 기쁨을 맛보며 즐겼던 일이 바로 ‘잃은 양 찾기’였다. 

  그 일을 위해 주님의 보여주신 행보는 ‘현장 찾아가시기’였다. 그래서 그들을 기꺼이 ‘영접하며 음식을 같이 먹으셨다’(2절). 이런 모습은 엄청난 파격이었고 혁명이었다. 아주 낯선 행보였다. 생명을 구원하는 행위가 얼마나 큰 기쁨이며 지고의 가치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이 일의 추진과 기쁨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울안에 두고 떠나는 목자의 간절하고도 절박한 심정과 그래서 찾게 된 양으로 인하여 품게 된 목자의 기쁨이 얼마나 크고 뜨거운 것인지를 비유로 설명하셨다(4-7절 참조). 이 비유도 부족하셔서, 예수님은 아주 하찮게 보이는 드라크마 한 잎을 어둔 방에서 떨어뜨려 그것을 찾느라고 애를 타다가 그것을 찾고 나서는 너무 기뻐서 이웃들을 불러 기쁨을 나누는 한 가난한 여인의 경우까지 추가하여 소개하시기도 했다(8-9절 참조). 

 

궁금하다! 100마리 중의 1마리의 양, 10개의 드라크마 중에 1개의 잃음에 어찌 그리 신경을 쓰며, 그토록 되찾는 일에 열중하는 것일까? 그만한 가치는 있는 것일까? 아니, 그만큼 잃은 것(양)이 남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이어서 그런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잃은 양일수록 더 내용과 품질 상으로는 더 불량하거나 염려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더 찾는 것이고 더 챙기려는 것이기도 하다. 목자의 손길이 더 절실히 필요한 존재이기에 목자가 더 애타게 찾는 것이다. ‘내가 돌보지 않으면 저는 못 산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대상이 바로 잃은 자이다. 여기에 대한 이해는 비교 우위론이 아닌 부모와 자식 논리라면 가능하다. 

 

매우 흥미로운 증언이 있었다. <목자가 본 시23편>을 쓴 필립 켈러의 경험에 의하면, 양은 성질이 온순하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아주 못된 습관이란 습관은 다 가진 동물이어서 다루기가 아주 까다롭다고 한다. 목자들이 한 눈을 팔면 금방 없어지고 목자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풀만 뜯으며 가기 때문에 목자들은 양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고, 손도 많이 가야만 되는 짐승이어서, 한 마리 한 마리 다 애지중지하며 키우게 되고, 그 과정에서 미운 정 고운 정이 깊이 들어 결국은 가족이요 식구처럼 된다고 한다.  

 

따라서 실종된 양이 생기면, 목자는 남은 양들은 우리에 두고, 그 집 떠난 양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어디에서 죽었는지 짐승 밥에 되었는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목자는 애타는 마음으로 찾아 나선다. 그러다가 고생 끝에 찾게 되면, 목자의 기쁨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큰 기쁨 파티를 하게 된다. (목회란 다름 아닌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목자 예수의 참으로 낯선 행보와 시각을 익히지 못하면, 어찌 우리가 제대로 된 목회를 할 수 있으랴!)

 

2) 하지만 그 일은 숱한 질시와 미움과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감당해야만 했던 일이다. 

  놀랍게도 세상은 잃은 양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 회복 등으로 섬기려는 사람보다는, 그들을 비판하고 비교 우위에서 자기들의 우월이나 권위나 탁월함을 자랑하려는 자들이 생각 밖에 많다. 따라서 그들을 섬기려는 이들은 좋은 일을 하면서도 예상 밖의 견제와 비난과 시비를 당하게 된다. 그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서의 지적들은 매우 예리한 지적들을 담고 있다(벧전2:18-20참조). 선행하는 이들에게 닥치는 예상 밖의 난관들을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지혜로운 지를 제시한 본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런 잃은 양 찾기 행보도 당시의 기득권자들(정통 종교권력자들)로부터 끝없이 감시당하고 미움을 당하며 시비를 불러왔다(눅15:1-2참조).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시선에도 전혀 게의치 않고, 당신의 아름다운 일에 집중하셨다.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세상이 그들을 죄인으로 정죄한 규정에 주님은 전혀 동의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도록 희년의 기회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2)그들을 죄인이라는 시각 보다는 치유 받아야할 대상이요 도움 받아야할 대상으로 보셨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인이란 정죄의 굴레가 아니라 은혜와 긍휼이다고 보신 것이다. 

3)죄인들에게도 주어진 은사와 가능성이 죄의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   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회개한 죄인의 능력은 항상 기존판을 흔들잖은가!

4)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올 자들에게 승리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벧전2:21). 

 

o 예언서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방 세계에 ‘흩어진 당신의 잃은 양들’을 다시 불러 모으시는 이스라엘의 목자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목격하며 그 사실을 천하에 증언하고 외치게한 내용이다. 

 

여기에서의 특징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을 찾아 돌아오게 하실 때, 그 상대가 당시 최고의 권력과 무력의 위세를 떨치던 제국들(이집트& 바벨론& 바사 등)이었다(11절). 결코 약자들이 아닌 세계 최강들을 극복해낸 값진 승리였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얻어낸 자유과 기쁨과 해방의 감격은 마치 금메달을 딴 것처럼 최고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렘31:12-14절).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가 된 일의 의미를 되살려내게 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무기력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범죄한 이스라엘을 회개 시키기 위함이었고, 하나님은 그 어떤 세상 권력 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요 ‘세상 만민의 주’이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예수의 ‘잃은 양 찾기’도 당시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에 짓눌려 살아오던 자들을 자유인으로 찾아내오는 씨름이었고 승리였다는 점에서 그 회복의 감동과 파장이 컸던 것이다. 

 

o 서신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잃은 양을 찾는 선행에는 부당한 고난이 상존하고 있음을 일깨우면서(18-20절), 그럼에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22-24절), 그 ‘잃은 양 찾기’에 부르심을 받았음을 명심하고 참여할 것을 독려한 내용이다(21절). 그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역시 예전에는 ‘잃은 양’들이었으나, 그 예수님 때문에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게 된 ‘찾은 양’이 되었기 때문이다(25절). 이것이 종말에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영적 자세와 책임이다.

 

o 결론은 이렇다

마침 이번 주일은 3.1절 제99주년 기념주일이다. 기미 3.1운동은 하나님이 일제 억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을 되찾아야 할 ‘잃은 양’으로 여기셔서, 당신의 희년의 영를 부어주시므로서 당신의 깨어 있는 일꾼들을 앞세워 ‘자유와 해방’을 달라며 외치게 하신 놀라운 은총의 선물이었다. 그래서 이 3.1 정신은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의 근간을 이룬 주춧돌이 되었다. 

 

길 잃은 양 찾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선교의 과제이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잃은 양 찾기에 참여하면서 하늘의 기쁨과 감격과 기적을 맛보며 살아가야 한다.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그 대임(大任)을 수행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하지만 고난도 피할 수 없다. 우리의 행진을 가로막고 있는 세력은 제국들이며 강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그 위에 계셔서 우리를 이끄신다. 바로 이점을 선포하고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대응하는 자세로 나아가자. 

 

특히 북한은 저 사마리아처럼 우리가 찾아야할 최대의 ‘잃은 양’이다. 모처럼 열린 남북교류의 장이 열렸는데, 평화통일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되는 놀라운 하늘의 기쁨과 감격과 기적들을 맛보도록 전력을 다하자. 3.1정신을 재현할 희년의 영이 충만하도록 준비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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