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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청년주일

관리자 2020-03-04 (수) 17:05 4년전 958  

본문) 요18:12-18, 25-27, 행3:11-21, 삼하12:1-13  

 

사순절 둘째 주일이다. 우리 총회에서는 오늘을 청년(靑年)주일로도 지킨다. 하지만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주일도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전 교인이 함께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될 듯싶어 마음이 매우 아프다. 감기(感氣)형 전염병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세에 이토록 온 세계와 우리 모두가 얼어붙게 되리라고는 것은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매사에 의미(意味)를 찾아 사는 백성들이고,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를 당신의 선하신 뜻 가운데에도 인도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위기 속에서 맞이하는 사순절은, 차라리 그 여느 때보다도 훨씬 더 주의 음성을 듣기에 근접(近接)해 있다고 믿는다. 

 

특히 이번 주일도, 지난 주일에 이어서, 인간들이 죄(罪)로 인하여 하나님을 배신(背信)하는 범죄의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어서, 우리의 관심은 더욱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의 말씀들과 우리가 처한 상황(狀況)에 집중하게 된다. 오늘도 초집중할 관심의 대상은 역시 이단 신천지이다. 

 

그들은 지금 약 5,000여명 가까운 바이러스 확진자(確診者)들 중에 80%가 훨씬 넘는 환자들을 대구와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퍼뜨렸다. 게다가 적잖은 신자들이 은폐되어 있어서, 코로나를 빨리 제압하려는 정부와 의료 당국에 커다란 고통을 주고 있다. 알고 보면, 전국에서 발병하는 환자들 중에서 자체적으로 발병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그 지역과의 관련에서 발병한 것으로 나왔으니-, 신천지를 통한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사정이 그런데도 최근에 제1야당 대표는, ‘어느 특정 교단(敎團)에게 코로나 책임을 전가하는 일은 안 된다’면서, 그들을 감싸는 듯 말했는데, 그것은 정말 유감이다. 그 까닭은 신천지 이단은 절대로 정상적인 기독교 ‘교단’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무너뜨리고 가정을 파괴하며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적(赤)그리스도 세력이기 때문이다. 자기들도 스스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가족들에게까지도 숨기고 있잖은가-? 

 

그들은 예수교란 이름은 붙였지만, 그 자리에는 진짜 예수가 아니라 교주 이만희가 있다. 그들은 올해 90살 된 교주가 육체적으로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믿는다. 교주가 영생하니, 자기들도 그렇게 영생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 영생의 숫자는 계시록에 나타난 144,000명이다. 문제는 지금의 신천지 요원은 그 숫자가 이미 초과되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이제는 자기들끼리도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경쟁시험을 치러야한다. 모두 무릎 꿇고 꾸부려 시험을 친다

  

여러분, 보셨는가? 그 시험장에는 대규모의 젊은이들이 그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그들의 꼭두각시와 허위의식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들이 강조하는 추수꾼이 되어, 대학교와 직장과 정치 현장과 교회와 가정 등에 침투하여 파괴를 일삼고 있다. 자기들의 영생(永生)을 위한 고가점수 획득을 위한 노리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바로 그곳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렇다! 신천지는 너무 많은 우리 젊은이들의 넋을 빼앗아 갔다. 

 

통계로 보면, 이번 코로나 확진환자의 29%가 20대 젊은이들이다. 큰 충격이다! 젊은이가 적은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건강해서 코로나를 이기며 살아가야할 젊은이들이, 허약해져서 이제 코로나 전파자들이 되어 있다. 어쩌다 젊은이들이 그렇게까지 되었나? 우리 사회와 종교의 책임이 크다. 그런 이기적 신앙을 가진 젊은이들을 통하여, 우리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미래를 형편없이 짓밟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자녀는 지금 어떠한가?  

 

한국교회가 크게 회개할 일이다. 교회가 그런 젋은이들을 건강하게 지켜내지 못하고 그 음흉한 사탄에게 황망히 그들을 빼앗긴 연고 때문이다. 부실한 신앙교육이 신천지란 괴물(怪物)집단을 키워낸 과오도 정직히 회개해야 한다. 동시에 이제 그 젊은이들을 구출하는 일에도 매진해야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잘못하고 있음을 전혀 모르고, 끌려 들어가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게 주목할 면도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우리 사회와 역사 변혁에 또 다른 큰 선물도 안겨 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선물인가? 바로 그러한 음험한 범죄 집단의 노예로 살아가던 안타까운 무리들과,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있는 집단들이 상당 부분 폭로되기 시작한 일이다. 코로나가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그로 인하여 드러났다. 정부가 치료의 근원을 발본하고자 신천지 명단을 확보하게 되자, 거기 음습한 곳들의 속살이 드러나면서, 그 동안 예상치 못했던 고리들과 부패한 묵은 냄새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하여 신천지는 분명히 서리를 맞을 것이다. 교주 이만희가 박근혜 시계를 차고 엎드려 국민 앞에 사죄의 절을 한 것도 의미가 크다. 영생자가 하찮은 인간들 앞에 엎드려 사죄하였고 코로나 검사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4.15 선거를 앞두고, 이런 일들은 국민들의 선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랜 적패(積敗)세력들과 오랫동안 결탁해 온 부패 정치의 바이러스 세력들, 가짜 바이러스 권력들을 속아내게 되는 절호의 기회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늘은 신천지 이단만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부족과 허물로 발생한 사생아(私生兒)들이기도 하기에, 이제는 그들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 자신의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 우리의 갱신을 더욱 도모(圖謀)하는 기회를 갖자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 말씀도 하나님을 향한 배신(背信)을 말한다. 하지만 지난 주일과의 큰 차이가 있다. 지난 주일은 가룟 유다가 중심이 되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을 이야기 했다면, 오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용서 받을 수 있는 배신에 대하여 증언했다는 점이다. 용서만 받는 것이 아니다. 배신에 따른 수치와 아픔까지 씻어내고, 이전보다 더 소중히 쓰임을 받게 되는 놀라운 길까지도 전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복음은 배신자를 배척하려는 관심보다는, 배신자를 새롭게 고쳐 사용하는 일에 더욱 관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우리는 지난주일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간이 아무리 경건하고 주님과 가까이 지내며 산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죄와 악에 취약함을 가지고 산다는 점을 주의 받았다. 즉 가룟 유다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존재한다는 경고도 들은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들 속에서, 제자 가룟 유다 못지않게 내면에 존재하는 죄와 악에 취약해 있던 두 사람을 새로 만나게 된다. 예수의 제자 시몬 베드로와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이 그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모두 허망하고도 실망스러운 수치들을 다 보여 준 인물들이었다. 스스로도 부정하고 심은 부끄러운 함정에 허망하게 빠져 들고 만 자들이었다. 평소의 자신들로서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배신을 저질러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이다.

 

이제 복음서를 통하여, 시몬 베드로의 실패(失敗)의 경우를 먼저 들여다보자. 그 후에 서신서를 통하여는, 그런 실패자가 놀랍게 변신하여 원시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구원의 새 역사를 위해 앞장 서 일하고 있는 승리(勝利)의 모습도 이어서 들여다보자.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놀라운 변신(變身)이 가능했던가’에 대하여서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복음서를 보자

여기에서는 시몬 베드로가 무려 세 번이나 ‘나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17,25,27절)라면서, 자신의 제자의 신분을 부정하였다. 이런 모습은 얼마 전, 예수를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으로부터 과분의 칭찬과 영예로운 신분을 부여받게 된 처지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오비이락(烏飛梨落)의 자기 거부(拒否)임이 분명하다. 도대체 어떻게 그가 그렇게까지 비겁하고 옹졸한 처신을 할 수 있었을까? 정말로 평소의 시몬의 처지를 생각하면, 진정 이해가 불가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몬의 현실(現實)이었다. 그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가 얼마나 죽음의 위협 앞에 비굴한 존재인지, 그가 얼마나 비판적인 주변의 환경에 취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던 죄의 유혹에 물렁한 존재인지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배신자인 그에게서 주목할 부분은 있었다. 그의 배신이 가룟 유다의 것과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예수를 얕보거나 이용의 대상으로 상대해 왔기에 끝까지 자기 길을 갔지만, 시몬은 자기가 나약하고 부족해서 그랬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비겁하였다. 예수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살려고 무서워서 순간 도피(逃避)한 것이다. 고의적이 아니라, 쫓겨서 그랬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런 사람은 그 상황이 지나면, 자신의 그런 비굴한 모습에 무척 괴로워하고 미안해한다. 나중에 시몬 베드로가 양심에 고통을 느끼며,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던’(눅22:62)것도 바로 그 연유 때문이었다. 

 

그의 그런 인간적 취약한 점은 또 다른 긍정적인 요인으로 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것은 배신당한 상대가 자신의 그런 부끄러운 부분을 깊이 이해하고 용서하며 긍휼(矜恤)의 은혜를 베풀 때 나타난다. 즉 상대가 베푸는 긍휼과 용서의 은혜가 그에게 밀려올 때, 그는  그 선물을 잘 받아들이면서, 깊은 감사와 감격의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다시는 그 비겁함의  포로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거듭남을 체험한다. 그 점에서도 상대의 용서와 긍휼을 받아들일 품이 아예 없었던 유다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그 점이 둘의 운명을 갈랐다. 

 

시몬 베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다로 되돌아간 시몬을 찾아가셔서, 그를 조건 없이 만나 주시고 그의 위축되어 있는 당신을 향한 마음의 사랑을 되살려 주시며, 그의 모든 허물을 덮고 그에게 예전에 부여하신 소명(召命)을 다시 부여하셨을 때, 시몬은 진정한 제자 베드로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요21:1-19참조). 그게 그가 원시교회의 공적 지도자로 새 출발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서신서를 보자

성령 하나님은 주의 은혜로 배신의 굴레를 벗어나게 낸 시몬 베드로와 동료 제자인 요한을 본격적으로 들어 써 주시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선 무대는 어디였나?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요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12,17절). 그들은 누구였나? 얼마 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 선 사나운 무리들이었다(14-15절). 하나님의 아들을 처형하는데, 앞장 선 배신자 집단이었다. 성령은 그런 자들 앞에 이 거듭난 배신자 출신들인 사도들을 맞세우신 것이다.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이적을 통하여(행3장), 그 강팎한 사람들을 흔들어대신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앞세우셔서, ‘회개하고 돌아와 죄 용서함을 받으라’고 외치셨다(19절). 사도들은 자기 같은 배신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과 그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지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어서, 다른 비속죄 경험자보다도 훨씬 더 진정성 있게 설교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의 악한 행위도 본래 예수를 모른 데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그것을 헤아리고 계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오면, 누구나 주의 사죄의 긍휼함을 입는다고 선포했다(17절). 

 

구약을 보자

성부 하나님도 당신 앞에서 배은망덕한 행위로 한순간 당신과 당신의 말씀을 업신여겼던 왕 다윗이, 당신의 준엄한 책망 앞에서(1-9절) 진심을 다하여 회개하며 자신의 죄를 스스로 탄핵하고 나오자(13절), 결국 그의 범한 죄 값은 엄히 물으시면서도(9-12절) 그러나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내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신 은혜를 베푸셨다(마1장 참조). 

 

왕 다윗은 권력의 남용으로 두 가지 범죄에 빠져 들었다. 하나는 충신 우리야를 죽인 살인죄(9절)요, 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빼앗아 들인 간음죄(10절)였다. 그 일은 다윗 마음속에 연약한 신하에 대한 긍휼(矜恤)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저지른 범죄였다(6절). 이에 다윗은 결국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책망과 함께, 칼과 재앙의 선고(宣告)받는다(7절). 율법에 의해 4배의 배상을 치러야 되는 무서운 벌(罰)이었다(출22:1). 살인죄로는 자기 아들들 넷을 잃게 되는 일이었고(19,13:28-29,18:14-15,왕상2:24-25참조), 간음죄로는 그의 아내들이 대낮에 주변인들과 동침하는 일들로 인해 치르게 된 치욕(恥辱)이었다(11절). 

 

그럼에도 다윗이 그 험한 역경을 뚫고 살아남은 비결은 무엇이었나? 그가 자기의 범죄와 과오를 겸손히 인정하고 잘못을 시인하며 가해질 벌칙에 순복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과 말씀에 강팎하지 아니하고, 그의 긍휼과 용서를 받아들일 마음의 그릇이 활짝 열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다. 비록 아무리 영적 훈련을 잘 받았다고 해도, 우리는 순식간에 죄의 유혹과 충동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는 항상 주의 도움과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한시도 잊지 말고, 오직 겸손히 의지하며 사는 일이다. 

 

결론이다

베드로와 다윗의 범죄와 실패를 잊지 말라. 또한 그들을 무너뜨렸던 죄의 힘이 내 안에도 무섭게 자리하고 있음도 기억하지 바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명심할 것도 있다. 우리 하늘 아버지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로 씻어주실 넓고도 큰 품이 있음이다! 우리가 고의가 아닌 연약하여서 무너진 것이나 알지 못해서 저지른 것은, 용서해 주실 하늘 아버지의 품도 있음을 꼭 명심하자. 우리의 소중한 젊음이 죄악에 발목이 잡혀서 무력해지지 않도록 경계하며 살자. 

 

특히 신천지 집단에 알지 못하고 빠져든 우리 젊은이들을 깨우쳐 돌아오게 할 힘과 지혜를 구하자. 잘못 얽혀 있는 모든 구조적 범죄인들도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기도하자. 진실로 집나간 배신자들을 돌아오는 계절이 되게 하자. 다시 들어 쓰실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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