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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신학교육주일

관리자 2020-02-04 (화) 18:06 1개월전 96  

본문)  막 3:20~35, 롬 8:12-17, 암 9:7-15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가 발원지인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그리고 온 세계까지도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 병원체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안 되고, 또 그것을 제압할 항생제 등이 개발되지 못한 상태이기에, 세상의 두려움은 큰 것으로 보인다. 

 

그 바람에 지금의 중국은 세계의 ‘공공의 적(敵)’처럼 취급받는 모습이어서 딱하기 그지없다. 워낙 덩치가 큰 나라여서, 발원지인 우한은 그 중에 한 적은 덩치일 뿐인 데에도 불구하고 전체 중국인들이 이웃 나라에의 나들이까지도 힘들어진 것이다. 이해는 되지만, 조심해야할 대목이다. 우리나라로서는 모처럼 중국인들의 대규모 관광의 문이 다시 열리고 있던 차였는데-, 이번 일로 또 다시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 된다. 

 

그런 중에도 이번 우한 사태에서 감동적인 일도 있었다. 우한에 체류하던 우리 국민 700여명을 정부가 2차에 걸쳐서 긴급 귀국시키는 과정에서, 그 귀국자들을 수용할 국내 체류지인 충남 아산과 충북 진천의 두 지역에서, 이들에 대한 처음의 거부 태도를 버리고 환영하면서 ‘우리가 아산이다. 편히 잘 쉬고 회복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시라’라고 프랑카드로 따뜻하게 격려하는 모습을 보여 준 장면이었다. 정말 다행스러운 변화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곳의 최덕기 한인회장은 뜨거운 감사의 인사말을 던졌다. ‘국가를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만일 이번 우한에서 재난을 당해 극적으로 탈출해 온 교민들을 우리가 서로 안 받겠다고 끝내 거부했다면, 우리는 어떠했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보다도 더 큰 아픔과 상실을 우리 온 국민들은 맛보게 되었을 것이다. 육체의 질병은 두렵지만, 조금 지나면 끝난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와 배타심은 결코 쉽게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받았으니까 칭찬 받게 되었으나, 거부했으면 우리 국민들 전체가 아주 부끄러운 백성들이 될 뻔하였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요 한 백성이며 한 국민임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미래(未來)도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번의 코로나 바이러스보다도 더 무섭게 위협적인 신종(新種) 질병들이 앞으로는 없을 것 같은가? 그것은 꿈이다! 틀림없이 더 무섭고 위협적인 질병들이 예기치 아니한 때에 속속 등장할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사스와 메르스도 경험하였잖은가? 우리 지구촌 마을은 이미 환경과 기후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깊숙이 빨려 들어가 있고, 자연 생태계가 이미 균형을 잃고, 기상이변으로 세계 처처가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번 호주의 대 산불 사태도 그 일환일 뿐이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대처하는 우리들의 마음과 태도이다. 물론 발생한 질병은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그 질병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우리 국민들 서로가 서로 경계하고 미워하며 배척하는 우리의 태도일 것이다. 국민의식이나 가족의식이 결여된 이기주의와 자기생존 우선주의에 빠져 든 국민들의 마음이 가장 큰 공적(公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번 일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시급히 무장해야할 정신 운동이 있다. 바로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고통하는 이웃들에 대한 위로와 도움을 주고자 하는 동료의식, 가족의식, 국민의식을 갖추는 일이다. 이런 마음에서 우리 국민들이 하나로 결속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신종 질병이나 재앙에서도 아픔은 당하겠지만,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잘되도록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자세이며 성숙한 교회와 백성들의 대응 태도일 것이다. 

 

마침 우리는 얼마 후,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치룬다. 국가 미래를 경영할 정치인들을 선출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인물들을 우리의 지도자들로 선출할 것인가? 우리의 미래를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이들에게 맡길 것인가? 이 점에서 우리는 깨어서 후보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의식(意識)과 말들을 주목해야 한다. 

 

이 부분을 주목(注目)해야만 한다. 후보자의 언행이 분열적인 사고를 하는 자인가, 통합적인 사고를 하는 자인가? 전투적인 사고를 하는 자인가, 융합과 화합적인 사고를 하는 자인가? 국민을 ‘좌파’나 ‘우파’로 분리하여 대처하는 정당인가, 국민 전체를 하나의 백성이나 가족으로 통전하여 보는 정당인가를 봐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진통은 이 두 세력의 처절한 대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중요하다. 분열주의자, 극단주의자들은 반드시 제지되어야 한다. 

 

오늘은 주현절 다섯째 주일이며, 우리 총회가 제정한 신학교육(神學敎育)주일이기도 하다. 신학교육은 각 교단(敎團)의 신학대학교가 맡고 있는데, 이곳은 교회의 머리와 심장부를 이루고 있는 영역이어서, 그 중요성은 막중하다. 이곳에서 어떤 신학교육을 받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부합된 교회의 지도자들이 배출된다. 그 후, 그 지도자와 목회자들은 섬기는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이끈다. 따라서 그 영향력은 가정과 사회와 세상에까지 막강하게 파급된다. 

 

한국교회에서 장로교는 가장 큰 집단이다. 대체로 두 갈레로 신학교육이 진행되어왔다. 하나는 제도권의 교회 중심적 목회자 양성이었다. 장로교 대부분이 이 경향이었다. 그래서 교회를 키웠고 교인들을 대거 모았다. 그게 구원이고 그게 목회의 성공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이들은 세상에는 어두웠다. 교회만이 구원이라는 일방적 교육이 교인들을 양으로는 키웠으나, 세상에 대응하는 인물로는 키우지 못한 것이다. 정의. 평화. 생명의 차원에는 어두웠다.  

 

다른 갈레도 있었다. 인물 중심으로 신학교육을 추진해 온 흐름이다. 그러기에 여기에서는 목회자이면서도,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마5:13-14)라는 예수의 명령을 좇아, 교회와 세상을 복음화(福音化)시키고자 힘겨운 씨름을 전개해온 그룹들이다. 자연히 제도권의 교회 규모는 크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과 증언은 세상 어둠의 그늘에 있던 이들에게는 빛과 위로가 되고 친구가 된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특히 이 세상을 대처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지금 광화문 광장을 장악하고, 대통령을 공산주의자와 빨갱이로 규정하면서, 하루 속에 끌어내야한다고 밤낮 소리 지르는 소위 ‘전광훈 현상’으로 평가되는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현상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세상을 외면해 온 ‘모이는 교회주의 만능’에 빠져 건강한 기독교인을 키우지 못하고, 광신자와 맹신자들을 더 많이 생산한 신학교육의 열매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지금 문대통령의 평화통일정책이나 국민중심주의나 소득위주의 경제정책이나 부패구조청산정책에 대한 그 철학이나 기본 이해도 없이 마구잡이식 저항하고 있다. 반공. 친미일 사상으로 무장한 담임목사가 문재인이 공산주의자요 사회주의자라고 강단에서 외치기에, 그렇게 거리로 나온 것이다. 진정 목사가 건강한 신학교육과 성서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오히려 적극 지지(支持)할 수도 있는 정책들인데 말이다! 극보수 교회가 국민 분열의 핵이 된 모습이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교 현장의 상황도 우리 한국교회의 수준 낮은 대처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낮은 자 중심, 죄인 중심, 병자와 도움이 필요한 약자 중심의 선교(宣敎)’가 당시의 종교 기득권들에 의하여 극심한 역풍(逆風)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 준 곳이다. 대체 예수님의 선교가 누구에 의하여 어떤 역풍들에 시달리고 있었단 말인가? 

 

1) 예수 선교의 대표적인 훼방꾼들은 놀랍게도 예루살렘 유대교의 핵심 세력들인 서기관들이었다(22절).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며 신학생을 길러내는 신학자(神學者)들이었다. 요즈음의 신학대학교의 신학교수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권위는 당연히 대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이 지금 예수의 갈릴리 선교 현장에까지 내려와서, 예수 선교를 악담하고 있었다. 

 

2) 그들이 퍼뜨린 악담(惡談)의 내용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블에 지펴 있어서, 즉 미쳐서, 그런 귀신이나 사탄을 쫓아내는 일을 한다고 공격을 한 것이다(21-22절). 그런 악 소문을 그대로 두면, 예수 선교는 당장 문을 닫아야할 판이었다. 그 바람에 예수 가족들이 출가하신 예수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찾아올 정도였기 때문이다(30-31절). 

 

3) 예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당신 선교에 대한 그 악 소문을 차단하고 나섰다(23-27절). 예수께서 당사자들에게, 그들 비난의 논리적인 모순을 냉철하게 지적하신 내용은 이러했다. 즉 ‘어느 나라나 집이나 막론하고 스스로 분쟁하면 결국 무너져 내린다’는 논리를 펴시면서, 당신이 지금처럼 사탄을 물리치는 일은 당신이 사탄과 동급이나 동료이기 때문이 펼친 일이 아니라, 더러운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실질적인 권세자(강자)이기 때문임을 밝혀 주신 것이다. 

 

4) 그러면서 주님은 매우 무거운 정죄(定罪)를 그들에게 선포하셨다. 즉 자기들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면서도 정작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는 무지하여, 그 일이 마치 악령의 일인 양 정죄하며 혐오와 배제를 일삼으며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자들은, 다른 범죄와는 다르게, 절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신 것이다(28-29절). 이런 입장은 성자 예수님만의 것이 아니었다.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한결같은 공동의 경고이기도 하다. 

 

☞ 성자 예수님의 이 모습은, 오늘 구약 아모스에서 드러난 성부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자만과 오만한 죄인들을 찾아내서 기필코 심판하신다는 내용과(암9:10), 성령 하나님의 선고의 말씀, 즉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다’(롬8:13.상)라는 말씀과도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5)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런 경고를 듣다보면, 서기관과 같은 지도적 위치,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전하고 가르치는 신학자와 목회자와 같은 이들은 매우 엄중하고 두려운 자신의 영적 책임에 대한 각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그들 역시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모든 세계를 다 아는 듯하고 살면 안 된다. 오히려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진지하게 구하며 살아야 한다. 선생보다는 신학도처럼, 더 겸손히 성령의 가르침을 구하는 자리에 서서 살피며 살아가야 옳다. 

 

6) 그러면서 주님은 그런 어리석은 서기관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구원에 자리에 서게 될 주인공들에 대한 대안(代案) 제시를 하고 나오셨다. 그들이 과연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가족(家族)이 될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가족이란 매우 특수한 대상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하실 수밖에 없는 대상들로 구원의 무대 위에 올려놓으신 것이다(31-35절 참조). 

 

☞ 누가 구원 받을 하나님의 가족이 될 사람들인가 (막3:33, 롬8:14, 암9:11-12) 

이 물음이 왜 중요한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이다. 가족은 피로 맺은 혈맹 공동체이다. 조상으로 부여받은 운명과 삶을 공유하는 식구(食口)들이다. 관계가 조건적이 아니라 무조건적이다. 공로나 허물도 멍에로 공유하며 산다. 배제나 혐오는 없다. 오직 긍휼과 자비로 하나된 공동체가 가족이다. 넘치는 것이나 부족한 것까지도 다 함께 한다. 이런 가족의 질서는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주신 것이며, 당신도 그 택한 가족을 통하여 뜻을 펼쳐 주시고 계신다. 

 

이 점을 철저하게 간파(看破)하신 성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가장 비중을 두고 가르치신 주제가, 바로 당신의 하늘 아버지를 이 땅 죄인들의 아버지로 연결시켜 주신 일이었다. 주기도에서 예수가 이렇게 다리를 놓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 이 가르침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복음이 아닌가! 도저히 부모-자식 관계가 불가능한데, 그 호칭으로 절대적(?)관계가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아버지’라고 부르고 나오는 자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정하실 가족 자격의 지침들을 제공한다. 

1) 예수께서 인정하시는 가족(형제-자내-어머니)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지켜 사는 자들이다(막3:35절). 여기에는 인종이나 성별이나 신분이나 차별은 없다. 어느 누구나 다 해당된다. 아무리 핏줄 가족이라도 구원의 보장은 없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으면 다 해당된다. 

 

2) 성령 하나님을 영접한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성령은 양자(養子)의 영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성령 받은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게 되면서, 자녀로서의 영광은 물론 고난까지도 기꺼이 공유하고자 헌신하게 된다(14-17절). 

 

3) 성부 하나님은 무너진 이스라엘 이외에 인류의 나머지가 하나님께 돌아오고 모든 이방인들이 새 이스라엘(종말적 이스라엘)에 편입되도록 헌신하는 모든 이들을 파종하는 자, 곡식 추수하는 자, 포도를 밟는 자들로 아시고, 그들을 당신의 (영원한) 땅에다 심으신다(11-15절). 

 

결론이다

한국의 신학교육 기관과 신학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고 행하는 지도자들이 되도록 기도하자.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한 감동 속에서 일하도록 기도하자. 교회가 건강한 신앙인들과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온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으로 구원해 내도록 기도하자.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하나 되게 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대거 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인정받을 자되게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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