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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 주일

관리자 2020-01-22 (수) 09:15 4년전 1100  

본문)  마 9:9~17, 행 16:25-34, 사 43:18-21,44:21-23

 

오늘은 주현절 셋째 주일이면서, 한국교회가 지키는 설 민속(民俗)주일이다. 설은 추석과 함께 대표적인 민속주일로서, 고향 나들이와 흩어졌던 가족 모임을 통하여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모처럼의 가족 모임이 피차 유익하고 행복을 나누는 기회가 되도록 서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제사(祭事)나 종교적 의례(儀禮) 문제로 모처럼의 가족 만남이 불편하지 않도록 지혜를 모으시기 바란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성숙함을 보여 줄 기회가 되도록 기도하면서 맞이하자. 

 

게다가 설날은 나이를 한 살 더 보태는 날이기도 하다. 삶의 무게가 좀 더 올라가는 때이다. 더더욱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아 일하는 하늘나라의 일꾼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설 명절에는 우리의 삶, 특히 나이 들어감에 대한 성찰도 따랐으면 좋겠다. 어떤 성찰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생각을 나누어 보자. 

 

인간은 누구나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와 미래(未來)를 살다 간다. 과거는 지나 온 세월을 말한다. 내 과거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다양한 삶의 여정들로 얼룩져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것이 밑받침되어 맞이한 삶이 바로 나의 현재이다. 그러기에 나의 현재는 과거의 흔적들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의 현재가 내 과거의 것들만을 대변하게 할 수는 없다. 과거와는 전혀 다르고 새로운 차원의 것을 수용해야만 할 것이 바로내 현재여야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현재는 새로운 고비를 맞는다. 과거에 붙들려 있는 내 현재인지, 미래적인 것이 개입되어 와서, 과거가 극복되어 있는 내 현재인지 여부 때문이다. 이 둘은 그게 그것인가? 아니다. 이 둘은 아주 다르다. 내 현재가 과거 중심적이냐 미래 중심적이냐는 점은 결국 나의 궁극적인 운명(運命)이 걸려 있기에 중요한 문제이다. 구원의 빛은 과거 중심적이 아니라 미래중심적인 삶에 있다. 하나님 나라도 미래중심적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현재를 미래형으로 만들지 못하면,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고집스러워지고 완고해진다. 새 것이 막히고 옛것만의 향수에 빠져 살기 때문이다. 요즈음 말로, ‘꼰대’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래형 인간으로 자신을 형성하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더 나은 것을 향하여 삶을 열어놓고 살기에, 그 삶과 인격이 부드럽고 겸손하다. 계속 배우고 자라며 성장하고 성숙하게 산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산다. 바울이 ‘내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5:16)란 고백처럼 산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이 새 것이며 어디에서 얻어내야 진짜 건강한 새 것을 얻을 수 있을거냐는 점이다. 요즈음은 정보 홍수시대이다. 특히 유투브를 통하여 거짓 정보와 선동적인 정보들이 홍수를 이룬다. 거짓과 진리를 분별할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숱한 태극기부대(?)사람들이 거짓과 왜곡된 정보를 받은 신자들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아니하던가?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거짓 매체들의 정치적 선동에 더욱 빠져살고 있다. 

 

그러기에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주목해야 한다. 그곳에 진정한 미래와 건강과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나 이념도 모두가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며 영원하지 못하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를 하나님의 말씀에다 붙들어 매어 놓아야만 한다. 그래야 진정한 미래위에 기반이 된 나의 현재를 구축할 수 있다. 

 

그러면 내 현재의 삶을 어떤 하나님의 말씀 위에다 올려 세워야할까? 마침 오늘 주현절 셋째 주일에 주시는 세 본문 말씀들은 당신의 백성들이 현재에서 뿐만 아니라 미래와 영원에까지도 주역(主役)이 될 수 있을 그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집중하여 방향을 제시해 준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인간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접하고 내 것으로 품는 일이다. 

 

본문의 말씀들에서 가장 강조되는 영적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을 향한 긍휼(矜恤)이다. 긍휼은 동정하는 마음, 연민의 마음, 측은히 여기심 등을 표현하는 따뜻한 품성을 말한다. 이 속에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empathy(감정이입)등의 깊은 뜻도 담겨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하려면, 이 긍휼을 자비(사랑)와 함께 절대 핵심적 품성으로 알아야만 한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을 소유할 때에 나타나는 일들이다. 먼저는 내 인간이 회개하게 되면서 새로운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그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접하게 되면서, 내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안의 나를 내려놓게 되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새롭게 열린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선교적(宣敎的) 인생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유대교가 실패한 까닭은 하나님의 이 고귀한 품성들을 외면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o 먼저 복음서에 나타난 성자(聖子) 예수님의 긍휼의 품성을 주목하자. 

 

1) 예수님의 계속된 제자 선택은 그 대상이 마태였다. 그는 가버나움 해변에 있는 세관(稅關)에서 세리(稅吏)로 일하던 공무원이었다(9절). 그 직업은 대체로 돈을 많이 만지는 일이었고, 그것도 많은 돈을 거두어 로마 황제에게 보내야하는 일이어서, 유대교에서는 가장 정죄를 하는 직업군의 인물이었다. 유대교도들은 그런 세리들을 ‘죄인의 괴수’처럼 간주하였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런 직업을 가진 마태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 

 

2) 놀라운 것은 부름을 받았던 당사자 마태의 태도였다. 성서는 그의 응답하는 태도를 매우 담백(淡白)하게 전한다. ‘일어나 (즉시) 따르니라’(9절,하). 이런 모습은 앞선 베드로 형제들과 요한 형제들과도 다를 바 없다. 마태는 어떤 마음에서였을까! 평소 죄인의식에 깊이 시달리는 자기를 예수께서 그토록 무조건적으로 품어주심(긍휼)에 그의 삶이 요동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예수님과 함께라면, 자기의 새 삶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3) 매우 의미 있는 파티(만찬)가 그의 집에서 열렸다(10절.상). 일종의 마태의 예수 제자취임식(就任式)과 같은 식전(式典)이었다! 초대 받은 인사들도 많았다. 많은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 파티에 참여하여 그의 새 출발을 축하해주면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어울렸다(10.후). 유대교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놀랍고 기이(奇異)한 새로운 어울림이었다. 

 

4) 거센 반발도 따랐다. 정죄와 심판에 능한 당시의 유대교 바리새인들로부터 거센 공격이 들어온 것이다. ‘어찌 예수가 세리와 죄인(罪人)들과 함께 잡수느냐’는 것이었다(11절). 그들은 소위 랍비란 자인 예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랍비가 저토록 죄인들과 어울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런 시각 때문에 죄인들을 향한 선교(宣敎)가 막히게 되면서, 자기들의 종교가 죽은 종교로 전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4) 그러면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가능성을 보시고 죄인인 마태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걸까? 기본적으로는 한 인간을 죄인(罪人)이란 멍에를 씌워서 공동체에서 배제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기회를 부여하는 일이 당신의 뜻으로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을 위하여 예수는 모든 죄인들을 정죄 받아 매장시킬 대상이 아니라 치료와 의사가 필요한 환자들로 보셨고, 당신이 바로 그 죄인들의 치료(구원)자로 오신 분임을 밝히 천명하신 것이었다(12-13절). (☞ 이후의 마태는 아마 제자 공동체 속에서 살림 부분에서 많은 기여와 헌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리된 머리로 복음서를 기록하여 예수의 역사를 온 세상에 전한 큰 인물이 되었다!)

 

5) 이 점은 당신의 제자들 교육용임도 분명히 하셨다(13절.상). 호6:6의 내용을 들어서, 하나님이 신도들에게 보다 원하시는 것이 제사가 아니라 긍휼이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제자 공동체는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기에 서로의 부족과 약점을 탓하기보다는 약점을 서로 포용하고 채워주려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좇아 사는 따뜻한 공동체여야만 한다. 그래야 서로 공존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6) 그러자 이번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께 따졌다. ‘왜 자기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하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였다(14절). 그들도 역시 자기 입장 중심의 틀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임을 드러낸 것이다. 보다 다른 입장을 취하는 이들에게서 보다 나은 가치와 새로움을 찾아 볼 눈과 마음이 닫혀 있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그들 역시 메시아 예수가 몰고 온 새 시대, 새 가치, 새 문화에 동참해야만 구원받을 존재들이었다(15-17절). 

 

o 서신서에 나타난 성령(聖靈) 하나님의 은혜로운 긍휼의 품성을 확인하자

 

1)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 선교 차 방문하던 중, 어느 여종 속에 들어있던 점치는 귀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냈다(16-18절 참조). 그러자 예기치 않은 시련이 두 선교사들에게 몰려왔다. 그 여종이 정상인으로 돌아오게 되는 바람에, 그 여자로 인하여 돈을 벌던 주인이 이 두 선교사들을 관(官)에다 ‘지역 소란 죄’등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 바람에 이들은 끌려가 무척 많이 맞고 차꼬에 채운 채, 깊은 옥에 투옥(投獄)되고 말았다(20-24절). 

 

2) 옥중(獄中)에서 터져 나온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의 영성이 놀랍다(25절)! 그들의 찬송과 기도의 파장이 컸다. 그곳에 큰 지진(地震)이 발생했고 옥 터가 흔들리면서 옥문들이 다 열리고 모든 죄수들의 매인 것까지도 모두 벗겨졌다. 하늘의 기적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 뿐 아니다. 그곳을 지키던 간수가 죄수들이 다 탈출한 줄 알고, 그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자살하려는 순간에, 옥중의 바울이 급히 제지하면서 그 간수를 살려내는 일까지 발생하였다(27-28절). 그 바람에 간수가 전도 받게 되어,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세례 받고 큰 기쁨까지 누렸다! 

 

3)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바울과 실라가 성령이 준 위로와 비전을 통하여 감사의 기도와 은혜의 찬송을 하나님께 올리는 믿음을 택하였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만일 그들이 상황에 굴복하여 분노하고 억울해 하였다면, 그런 역사는 절대 기대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고난을 귀하게 사용하시는 성령께 감사하며, 자신들이 주님의 십자가 사역에 동참하게 됨을 찬양하게 될 때, 은혜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그렇게 보여주신 것이었다. 동시에 그런 것을 모르고 자살로 자신의 고통을 면하려던 간수를 긍휼(矜恤)히 여기면서 그의 자결(自決)을 막고, 그와 그의 가족에게까지 구원의 복음과 하늘의 기쁨을 전할 수 있었다(27-34절 참조). 

 

☞ 바울과 실라를 통하여, 귀신에서 해방된 여자와 또 허망한 죽음을 면하고 예수를 영접한 간수와 그의 가족들은 그 후 어떤 인물들이 되었을까? 분명히 빌립보교회의 기둥이 됐으리라! 

 

o 구약의 예언서에 나타난 성부(聖父) 하나님의 긍휼의 품성을 확인하자 

 

1)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나약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創造)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이 본문의 내용에 올라와 있다. 그들은 이제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통하여 죗값을 치렀고, 그만큼 미래를 향한 장애물로부터 해방된 족속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과거의 어두운 상황에서 발목이 잡혀 있었거나 하나님이 자기들을 잊어버리셔서 자기들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마음이 그들의 열린 미래를 막고 있었다. 

 

2) 그런 상황을 불쌍히 보신 성부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문제 해결책으로 그의 백성들이 기억하지 말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을 동시에 제시해 주셨다. 

 

☞ 첫째는 기억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 것들이다(43:18). 기억하지 말 것은, ‘이전 일과 옛날 일’이었다. 벌 받고 고생했던 일들이었다. 그것들은 이미 다 청산된 과거의 일들이었다. 따라서 그런 것을 계속 기억하고 있으면, 그들에게 열리고 있는 밝고 축복된 미래를 받아낼 마음의 공간은 없게 된다. 하나님은 이미 바사제국의 고레스 황제를 통하여 그들의 귀환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면서, 하늘과 땅이 놀라워할만한 새 일들을 시작하셨다. 광야에 물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면서 그가 택한 백성들의 목마름을 해소시킬 새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당신을 찬송하게 하도록 새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19-21절). 우리도 이 새해 아침을 그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잊을 것은 잊고, 기억에서 버릴 것을 버리면서 말이다!

 

☞ 둘째는 반드시 기억하고 명심해야할 것들이다(44:21).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하신 소명(Calling)과 정체성(Identity)이다. 그들은 본래 여호와가 당신을 찬송하도록 창조하신 족속이고(43:21), 그의 종(從)으로 지으신 자들이어서, 여호와께서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구속(救贖)하신 대상이다(44:21). 여호와께서는 귀환조치를 통하여 이미 그 크신 긍휼을 베푸셨다. 이제는 그 점을 기억하며 여호와께 돌아오면 된다. 그럴 때 그들은 밝은 미래를 보장받는다. 우리는 이 새해 아침에 더욱 우리의 소명을 굳게 잡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겠다!

 

o 결론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어 그의 택함을 받았고 그의 일꾼이 되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긍휼의 마음을 품고 이웃과 세상을 상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5:7). 정죄와 심판의 마음은 버려야 한다. 오직 따뜻한 긍휼과 자비의 영성으로 무장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 하셔서, 예수와 바울과 실라가 경험하였던 하늘의 세계를 공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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