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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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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12-10 (화) 22:33 4년전 967  

본문) 사 62:10-12, 요 1:19-28, 히 11:32-12:2

 

대림절 셋째 주일에 들어섰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영접하려는 메시아가 누구신지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이미 2000년 전에 오셨던 그 예수님이 아니다는 점이다. 그러면 어떤 메시아인가? 그때 오셔서 십자가에 죽임 당하고, 부활하신 후 하늘의 본향(本鄕)으로 귀향(歸鄕)하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 분이 떠나시면서 다시 오겠다고 확실히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그 약속을 믿고 그 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행1:9-11참조). 

 

재림(Second Coming)이란 단어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신약에서는 그 사건에 대하여 무려 300여회 이상 언급되어 있는데, 주로 ‘파루시아’(parousia)란 용어로 사용되었다(고전15:23,약5:7-8,벧후1:16,요일2:28등). 이 ‘파루시아’란 말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매우 중요한 방문객이 갑작스럽게 방문할 때에 사용되었다(고후7:6-7,빌1:26). 예수의 가르침 속에도 이 재림에 관한 교육이 숱하게 나왔다(마19:28,막13:24-37,눅12:35-48,21:25-28 등등). 

 

예수 부활과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초대교회 공동체들은 바로 이 재림하실 메시아를 사랑하고 고대하며 기다렸다. 초대교회 가족들은 철저한 종말신앙과 재림신앙에 서 있었다. 특히 성찬예식에서는 계22:20과 고전16:22의 말씀을 사용하면서, 마치 교독형식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고백을 올렸다. 잠시 우리들도 낭독자(목사)의 묻는 말에 회중(교우)이 되어, ‘마라나타’(아람어)로 답하면서, 함께 고백해보자(계1:3참조).  

☞ 낭독/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 회중/‘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계22:20) 

☞ 낭독/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 

   회중/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고전16:22)

 

이 신앙 때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나그네의 영성으로 살면서, 소유와 물질과 세속 향락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의 각종 미움과 배척과 따돌림에도 개의치 않고 깨끗한 영혼으로 지낼 수 있었다. 모든 세상적 지위와 명예도 버릴 수 있었고, 지하 땅굴에서의 생활을 200-300년간이나 이을 수 있었다. 잔인한 순교까지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로마의 카타곰배나 터키의 갑바도기아, 괴뢰메, 데린큐유 등의 지하땅굴 유적들이 그들의 신앙을 증언한다. 

 

문제는 지금 우리들의 신앙이다. 조상들의 신앙을 너무도 잇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부끄러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수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그의 사랑의 계명을 거역하고 살며, 기복주의 신앙과 번영신학에 물들어 세속의 물질과 향락에 깊이 빠져들어 산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오시는 주님에 대한 기다림의 영성이 고갈되었고, 영원한 나라의 시민의식도 메말랐다. 사정이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마음에서 나오는 ‘마라나타’를 정직하게 외칠 수 있을까!

 

다시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옛적 우리의 신앙 조상들이 오시는 메시아를 어떤 분으로 보았고, 어떻게 맞이했는지를 다시 배워야 한다. 그래서 다시 오실 메시아를 우리도 제대로 맞이할 삶으로 들어가야 하겠다. 삶의 변화는 바로 그 신앙의 산물이어야 한다. 시간이 여유롭지 아니하다. 금방 우리는 그 분 앞에 서게 된다. 그런 점에서 구약-복음서-서신서 세 본문들을 다시 보자. 매우 다양한 차원에서 본문들은 우리의 메시아 맞이를 잘 안내해 주실 것이다. 

 

구약을 보자

본문은 유대인들을 무려 70여 년간 포로로 이끌던 바벨론 제국을 굴복시킨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고레스가, 그의 제국 원년(元年)에 유대인들에게 본국으로의 귀환을 허락하자-, 전령을 통하여 그 놀랍고 기쁜 소식을 시급히 본국의 예루살렘에 전하게 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런 일은 세계사에서 유래 없는 무혈(無血)의 귀환 사건이었고 모든 빼앗겼던 것의 되돌림의 성격의 귀환이었으니, 그 특혜를 받게 된 유대인들의 기쁨과 감동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그런데, 여기에서의 선지자 이사야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 초능력의 은총의 역사는 전적으로 역사의 주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다음의 이유로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에게는 오랜 범죄의 대가로 70년 복역(服役)을 마감한 데에 따른 조치이었음을 말한다(사40:1-2참조). 그래서 이제는 죄에서 깨끗해진 의인의 신분 때문이었다. 둘째는 당신의 백성을 그동안 채찍질하던 제국 바벨론을 여호와가 용도폐기(用道廢棄)하신 까닭이다. 그 바람에 바벨론은 제국 메대를 거쳐 바사 제국으로 흡수된 것이다. 셋째는 그런 과정을 다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이 위로와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었다. 

 

1) 선지자는 특별히 강조했다. 귀환 길에 오른 백성들을 이끈 이는 어느 특정 인간이 아니라, 바로 역사의 주이시자 이스라엘의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이시다는 것이다(40:5,11절). 요10장에서 나온 예수님의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는 자기 계시 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11-15절참조). 

2) 그러면 백성들은 오시는 메시아 영접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성문 밖으로 나아가 길을 닦고, 무너진 길을 수축(修築)하며, 기치(旗幟)를 만들어 안내판을 세워 알려야만’ 하였다(10절). 

 

☞ 이스라엘의 삶의 대 변혁을 요구한 내용이다. 무능과 체념, 안이와 나태, 원망과 불신앙, 절망과 무기력-, 이 모든 것을 일시에 쓸어 내버릴 새로운 역동적 삶이 시작된 것이다. 황무지와 폐허였던 길들을 고르게 수축하고, 모든 이들이 편안히 통행할 길들로 만드는 작업은 그 동안의 삶의 스타일을 완전히 버려야만 가능했다. 즉 마치 ‘떠나가셨던 하나님을 다시 모시게 된 일’, 즉 임마누엘 하나님을 새롭게 영접하는 일은 환골탈태해야 가능함을 말한 것이다. 

 

3) 즉 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는 이들에게는 그 삶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오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과 상급과 보상을 안겨주시기 때문이다(11절). 이전에도 스가랴서에서, 복원될 예루살렘은 더 이상 절망과 폐허의 성이 아니라 평화와 희망으로 가득한 새 예루살렘으로 약속받은 것과 같다(슥2:1-참조)

4) 그 뿐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오시자, 세상도 큰 반응들을 보였다. 그들의 귀환 소식을 접한 주변의 숱한 나라와 백성들로부터 놀랍고도 가슴 벅찬 부러움의 칭송을 듣게 된 것이다. 마치 다니엘서에서 바사드락-메삭-아벳느고가 불의 시험 끝에 들었던 바로 그 놀라운 칭송(-단3:28참조)을 듣게 됨을 통보 받았다. 곧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요,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들이며, ‘찾은바 된 자요 버림받지 아니한 성읍이다’라며 공인 받은 것이다(12절).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고하였던 바에 따라서, 나사렛 예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와서, 메시아 예수의 길을 곧게 하려고 활동했던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초첨은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전개한 운동이 무엇이었느냐는 점이다. 

 

물로 세례를 주는 행위였다. 물세례도 그냥 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선포한 외침(말씀)에 따라서, 회개한 자들에게 그 죄악의 씻음의 증표로서 준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물세례 운동은 회개운동이었다. 즉 삶의 변화와 갱신을 불러오는 회개 없이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물세례를 받게 하여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새긴 거룩한 작업이었다. 

 

☞ 기존의 우리 수세자들도 자신이 받았던 물세례의 의미를 되새김할 필요가 있다. 처음의 회개하며 받았던 그 물세례의 의미와 가치가 내 안에 아직도 살아있는지, 혹은 퇴색하여 변질되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진정어린 재(再)회개의 시간을 가져야 마땅하다. 회개는 말로만의 것일 수가 없다. 삶의 갱신과 변화가 동반되어야만 한다. 요한의 외침이 쏟아질 때, 거기에 모인 군중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3:10-12)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개인별 맞춤형 회개의 지침들을 요한으로부터 받으면서 물세례를 받았었다(3:13-14절 참조). 우리의 회개도 반드시 구체적이어야 하고 행동으로 답해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용서가 따른다. 

 

1) 당시 요한의 외침은 온 나라를 흔들었다. 예언자들의 외침이 그친 지 오랜만에 터져 나온 일이라서, 요한의 외침은 매우 뜨거운 반응들을 얻었다. 장소가 광야인데도 그 소리를 듣고자 수많은 백성들이 모였고, 특히 유대 지도층에서까지도 관심을 갖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찾아오기까지 했을 정도였다(19절). 그때의 요한의 회개와 물세례 운동은 진정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핵심적 발판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2) 하지만 유대인의 최대의 관심은 ‘요한이 과연 오실 그리스도이냐’라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몰려드는 군중들과 그 반응을 보면서, 요한의 위상(位相)을 크게 보되, 종교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보았다. 하지만 주의 길잡이로서의 소명의식이 철저한 요한의 입장은 분명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다’라고 응수하면서 정치적 접근을 경계하며, 오직 오실 분 소개에 전념하였다(20-23절 참조). ‘나는 내 뒤에 오시는 그이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27절)며 자신을 더 낮췄다. 

 

☞ 이런 요한을 통하여 우리가 취한 영적 양식은 무엇인가? 주 앞에서 회개와 겸손을 회복하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보다 세상을, 믿음보다 물질을, 주님보다 나를 더 앞세우며 빠져든 삶에서 어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의 반열에서 이탈(離脫)한 모습들을 크게 자각하고 되돌아가야만 하겠다. 

 

서신서를 보자

본문은 우리가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11장의 내용이다. 이어진 12장에서는 우리의 믿음의 주되신 예수의 믿음까지도 소개한다. 무엇을 말하려는가? 한마디로 주님을 기다리고 그의 재림을 대비하며 종말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이 무엇인지를 집중해서 전하려고 한다. 바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이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가 계신 것을 확인하며, 또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됨을 전하고자 하였다(11:6절). 

 

1) 믿음의 위인들이 그들에게 가해진 역경과 시련을 극복했던 승리담(勝利談)들은 참으로 눈부시다. 거론된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많은 선지자들은 모두 믿음으로 역사의 어둠을 밝혔던 위인들이다.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도 막았으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였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전쟁에서 용감하여 이방의 진용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여자의 경우에는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기도 하였고, 더 좋은 부활을 바라는 이들은 심한 고문에서도 구명(救命)받기를 원치 않기도 하였다(33-35절 참조). 

 

2) 믿음으로 그들은 조롱과 채찍, 결박과 투옥 당함, 돌 맞는 일과 심지어 톱으로 켜는 것, 칼로 죽임을 당하는 일과 양과 염소 가죽 옷을 입고 광야와 산과 토굴 등으로 유리하며 떠돌이로 사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궁핍과 환란과 학대가 그들의 양식이었으나, 그들은 믿음 때문에 물러나지 않았다(36-38절). 실로 세상이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로 살았던 것이다. 세상을 이길 유일한 것이 바로 믿음의 힘임을 입증하며 산 위인들이다. 

 

3) 하지만 그런 신앙의 조상들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서의 믿음’(히11:1)이란 증거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더 좋은 것’인 종말론적 성취(成就)의 표징까지는 받지 못하였다. 이 좋은 것은 하나님이 시간 이전에 계획하신 것으로서, 마지막 세대가 올 때에 맛볼 영역이었기 때문이다(39-40절).

 

4) 남은 최후의 과제는 무엇인가? 히브리기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다음의 두 가지를 우리가 엄수해야할 신앙의 과제들로 제시하였다. 

 

① 무거운 죄의 멍에를 절대 걸머지지 말라는 것이다. 죄책감에 양심이 발목 잡히면, 그 사람은 결코 더 좋은 세계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의 여정은 경주자의 여생과 같다. 따라서 경주자는 잘 참아내야만 한다. 목표 앞에서 참아내지 못하면, 다 잃게 되잖은가?(12:1) 

②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일이다(12:2). 경주자는 절대 목표인 예수에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예수는 믿음의 경주자들에게 다음 몇 가지 집중할 시선거리들을 제공하셨다. 먼저 목표지점 너머에 있는 기쁨을 미리 보셨다. ‘더 좋은 것’(40절)이 있는 세계를 미리 보신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하여, 그 어떤 훼방거리들도 기꺼이 무시하고 개의치 않으시면서 참아내셨다. 십자가의 고통과 거기에서 당하는 수치들까지도 기꺼이 용납하셨다. 그래서 그가 바라신 목표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신 것이다(12:2절). 

 

☞ 이 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 나라(주가 가신 곳)는 십자가와 그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취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기에, 그곳을 향해 순례(巡禮)길에 오른 모든 우리들도 예수의 그 정신과 믿음을 확실히 계승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결론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재림 신앙을 회복하자. 그 신앙 회복은 나태와 게으름, 체념과 무기력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위한 섬김에 열심을 내게 한다. 교만을 꺾고 무능은 말씀 안에다 묻자. 무엇보다도 물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회개하자. 그러면서, 머잖아 대면할 우리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을 기억하면서, 그 분의 승리의 신앙을 본받아 살자. 우리 문 앞에까지 거의 다가오신 그 분의 발걸음과 숨결을 느끼며 사는 여러분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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