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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추수감사절

관리자 2019-11-12 (화) 21:41 23일전 51  

본문) 신 26:4~15, 마 25:31-46, 약 2:14-26

 

이스라엘 백성은 매우 독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구촌에서 창조주 여호와란 신(神)의 택함을 최초로 받은 무리들이었고, 그를 만나서 그가 주신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 민족이 되었으며, 온 세상을 향하여서는 자기들이 믿게 된 여호와를 구원의 신으로 전하는 소명(召命)도 수행하였던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세상 만민들은 저들 유대인들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이 받았던 구원의 은혜까지 공유(共有)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매우 독특한 방법에 따른 것이었다. 신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당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그가 택하신 무리들을 앞세워, 주변의 다른 인간들을 사랑하고 살게 하려는 방법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그 결정적인 역할을 앞장서 해주어야만 할 대상이 꼭 필요한데-, 바로 그 대상에 이스라엘 히브리 족이 선택 받았던 것이다. 마치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시듯, 창조주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택하신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응답해야만 할까? 엘리트의식으로 독선적이어야할까, 아니면 겸손(謙遜)해야만 할까?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어떻게 응답했는가? 하나님의 뜻과 선택에 순복하였는가, 아니면 교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로 주인의 뜻을 저버렸는가? 우리는 답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래저래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이 맞아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누가 나의 비위(脾胃)를 완전히 맞출 수 있을까? 부모도, 자식도, 부부도, 친구도, 아무도 없다-! 그것을 내 자신 모르고 살기에, 나는 평생 불평 속에 살고 있잖은가! 알고 보면, 나란 존재는, 되지도 못하고 마치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존재로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기에 한편, 내 인생에는 그런 나를 풀어주고 조정하며, 제압까지 해 줄 절대자가 필요하다. 단, 같은 처지 한계에 허덕이는 인간은 아니다! 

 

그러면 그게 누구일까? 자기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비위를 맞출 수 있고, 자기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조절해 줄 존재가 있다면, 그건 전능자요 절대자인 신뿐이다! 그를 만드신 제조자요 창조주뿐이다! 창세기를 보면, 최초의 인간은 그런 절대자에게까지도 의심하고 자기주장으로 맞선 존재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 유일하게 복종하려는 대상은 창조주뿐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운명은 ‘그 창조주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고 사느냐’에서 결정된다. 

 

우리에게 예배가 절대 필요한 이유가 있다. 곧 우리는 ‘언제 어떻게 날뛸지 모르는 나’(?)를 전능자께서 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잘 다스려달라고 엎드려 도움을 청하며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라도 평화와 응답을 받아야, 비로소 나는 마음에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성경이 전하는 신앙 역사의 흐름을 보면, 처음에는 개인사 중심이었다. 그러다가 공동체와 집단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그 후에는 온 세상의 차원으로 확대되면서 지금에 이르렀고,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이런 여호와를 향한 신앙 역사의 흐름을 거의 매주일, 강단의 삼위일체론적(三位一體論的) 세 본문 중심의 설교를 통하여 계속 확인하며 은혜를 받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신앙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 민족적이고 집단적 차원으로 자리하게 된 시작은 창조주 여호와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후손들에게서 불리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우리가 성경에서 <믿음장>으로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의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 이전의 세 믿음의 사람들이 올라와 있다. 아벨과 에녹과 노아가 대표적인 신앙인들이었다(4-7절 참조). 그들은 모두 자기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물들이었다(6절). 

 

그들의 믿음들에는 나름대로 특성이 있었다. 아벨은 더 나은 제사(예물)로 그의 믿음을 보였다(4절). 성경의 첫 승천(昇天)자로 전해지는 에녹은 하나님과의 전적인 동행(同行)으로 그의 믿음을 보였다(5절,창5:22). 대홍수 재앙에서 방주로 가족과 함께 구원을 받았던 노아는 미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에 대한 대비한 삶으로 그의 믿음을 보였다(7절). 이들은 모두 하나의 믿음아래, 다양한 응답의 모습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신앙인들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아브라함 때부터는 지금까지 신앙의 줄기가 하나로 전승되기 시작하게 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가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지금까지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줄기가 무엇이었나? 예전에도 계속 소개한 바 있는, 창세기 12:2-3절에서 그가 여호와로부터 받았던 복과 그 복의 전승하는 일이다. 복습(復習)차, 확인해보자. 그가 받았던 복이 무엇이었나? 

 

첫째는 그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이 땅의 복의 시작(근원)이 되는 일이었다(2절). 둘째는 그와 그의 후손이 자신이 받은 그 복을 온 세상 만민에게 나누고 베풀어주신 복이었다(3절). 단 이 둘의 분리는 절대 불가였다. 한 묶음(페키지) 복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 둘을 함께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분리하면 후손이 못되는 것이다!

 

이 미션(임무)이 유대인에게 부여되었는데, 처음에는 유지되었다가 도중에 큰 훼손을 당하면서 그들이 저주(咀呪)의 나락에 떨어진다. 예수가 오셔서, 그것을 복원하시는 작업을 십자가에서 하셨고, 그의 제자들이 성령의 인도 하에서 온 세계로 전파되게 활동하였다. 세계교회 운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도 바로 그 영역이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늘은 창조절 열두 번째 주일이면서,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로 지키는 절기이기도하다. 본문들은 대체로, 전능자의 은혜와 복을 받고 살아온 그의 백성들이 어떤 응답을 하며 감사에 참여할 지에 대한 말씀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그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살고 있는 지, 그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그의 신앙은 의롭고 온전해야지, 죽어서 헛되고 쓸모없는 것으로 판정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동시에 전능자를 뵈올 인생의 그 날에 더욱 접근해가면서, 우리는 보다 내 신앙의 껍질들을 벗겨나가야 할 때이다. 위선과 거짓과 허영의 껍질은 벗고, 신실과 겸손과 온유의 여문 알맹이의 모습을 드러내야할 때이다. 점검하고 확인해 보자. 나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지수는 어떠한가? 예전에만 못 미쳤는가, 비슷한가, 조금씩 알곡화 되는 것인가?

 

구약을 보자

전반부 내용은 이미 추수의 계절에 들어간 창조절(6)에서 접한 바 있다(1-11절 참조). 언약의 땅 가나안에 입주하여 기름진 땅에서 소출한 곡식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창조주 하나님께,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어느 곳에서 감사제를 드려야하는 지에 관한 지침을 주신 내용이었다. 

 

1) 전반부(4-10절)까지는 하나님 사랑의 차원에서 진행된 내용이다. 즉 온 백성이 성소의 제  사장에게 나아와,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과 그들의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자기들에게 능력의 편 팔로 크신 은혜 베푸심을 기억하고, 주신 이 땅에서 수확한 일을 감사하며 그 첫 열매를 드린다. 그 후에도 귀가(歸家)해서는 레위인과 객(客)을 초청하여 대접하여야만 했다(11절). 

 

2) 후반부의 시작은 이웃 사랑을 실천할 지침을 담았다. 여기에서는 셋째 해마다 모든 소산의 십일조(十一條)를 구제비(救濟費)로 성별하여 드리는 일이다. 이때의 돌아볼 대상은 성안에 있는 레위인-객(손님/나그네)-고아-과부들이었고, 그들을 먹게하고 배부르게 하여야 했다(12절). 

 

3) 그 때의 십일조는 성물(聖物-거룩한 하나님의 것)이다(13절,상). 그러기에 그가 성물로 구제하고 어려운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했음을 하나님께,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않았고 잊지도 않았습니다’-라고 직접 보고 드려야만 하였다(13절.하). 어디 이 뿐인가? 

 

4) 그 성물은 그 어떤 용도 전용(轉用)도 없이 온전히 목적대로만 사용했음도 보고해야만 하였다(14절). 용도 전용은 성물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애곡(哀哭)의 부정한 곳,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여러 계기, 죽은 자를 위해 사용하는 일은 절대 금지했다. 

 

5) 이런 기본적 이웃 사랑의 행위를 거룩히 성수하여야, 비로소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신다고 선언한 것이다(15절). 

 

☞ 실로 대단한 이웃 사랑의 실천 계명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 사랑 못잖게 이웃 사랑의 실천도 요구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려면, 그런 차원을 수용해야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들의 이웃 사랑이 수준과 자세는 어떠한가? 주님은 나를 어떻게 보실까? 

 

복음서를 보자

세계 심판의 날에 있을 내용 중 하나다. 여기에서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이중(二重) 계명(22:34-40참조)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라는 내용으로, 매우 절묘하고 경이로운 방법으로 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1) 인자가 왕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영광중에 올 때에, 모든 민족을 상대로 하여, 영벌(永罰)에 들어갈 죄인과 영생(永生)에 들어갈 의인을 완전히 구별한다(31,46절). 그 구별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 할 터인데, 양은 오른 편에 두고 염소는 왼편에 둔다(32-33절). 

 

2) 왕은 먼저 그의 오른 편에 배치된 자들을 축복한다. 그들은 그의 아버지의 복을 받아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相續)받게 된다(34절). 그들의 수상(受賞) 이유들도 분명했다. 곧 주께서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病)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는 것이다(34-35절). 그들이 고난 중인 주님을 너무도 잘 돌보고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3) 그러자 정작 수상자들은 충격 속에서 반문했다-‘우리가 언제 주님에게 그렇게 했느냐? ’즉, 자기들은 평소 고통하는 이들에게는 선행의 손길을 펴긴 했으나, 주님에게는 한 적이 전혀 없었는데-, 어찌 자기들 보고 주님에게 그런 선행을 했다고 말씀하시느냐는 것이었다(37-39절). 

 

4) 왕의 그 이유를 밝혔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었다’(40,45절). 놀라운 차원의 평가였다. 하나님께서 당신 때문에 이 땅에서 고통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지대하고 뜨거운 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복음 때문에, 예수의 이름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박해당하고 얻어맞고 갇히고 굶주리고 병들고 헐벗는 자들과 주님은 항상 함께 하심도 밝힌 것이다. 

 

5) 그 후, 왕은 왼편에 배치된 무리들을 저주한다. 그들은 버림을 당하여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이 들어갈 자들이었다(41절). 그 죄목(罪目)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작은 자들의 고통과 신음을 외면하면서, 그들을 섬기지 못하고 배신을 행하였기 때문이었다(42-45절). 여기에서도 주님은 당신의 작은 자들의 고통을 바로 당신의 것으로 간주하셨다. 

 

☞ 결국, 주님의 심판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만 할 선행을 하지 아니한 것에서 나왔다(45절). 입술만의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도 결코 구원 받을 조건이 되지 못한다(약2:15-16절). 여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은 물론, 비(非)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도 포함된다고 보인다.

 

서신서를 보자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우리가 가진 신앙을 산 신앙과 죽은 신앙으로 구별한다. 특히 산 신앙의 참 모델을 아브라함과 라합의 경우를 들면서 우리의 산 신앙을 고취하였다. 

 

1) 행함으로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는 이들은 의(義)롭다. 아브라함은 창15:6과 창22장에서의 믿음의 행동으로, 그의 믿음이 참 믿음이었음을 입증하였다. 이방인이지만 여리고의 기생이었던 라합이 자기 생명을 여호와께 의탁하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준 행위도 참 믿음의 모습을 보여 준 구체적인 사례였다(21-25절).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벗이 되었고(요15:15),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이 될 수 있었다(마1:1-4참조). 

 

2) 행함이 없는 믿음, 예컨대 입술 위주의 믿음이나 헌신과 사랑이 밑받침되지 못한 믿음은 무용한 것(헛것)이며 죽은 것이다(15-17,20절). 그런 신앙은 마치 영혼 없는 몸과 같다(26절). 

 

결론이다

추수절을 맞으며 다시금 강조한다. 우리의 사랑의 지수를 높이자. 하나님 사랑도 더욱 뜨거워야만 한다. 감사는 구체적이어야 하고, 진정성 있는 고백과 함께 하여야 한다. 그리고 드림도 정성이 담겨야만 한다. 이웃 사랑도 강해져야 한다. 그게 하나님 사랑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내 주변의 어려운 믿음의 식구들을 향한 관심과 배려의 손길을 강화해가자. 말로도 하고 기도로도 해야 한다. 하지만 물질의 손길도 인색하면 안 된다. 그들에게 물질은 고난을 이겨낼 삶에 매우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부디 쓸 것도 함께 줌으로서, 행함이 있는 생명력 넘친 신앙의 주인공들이 되자. 우리도 주님 앞에 설 그 날이 가까이 오기에,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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