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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09-18 (수) 18:27 4년전 1104  

본문) 신 30:1-5, 눅 12:22-34, 골 1:3-14

 

추석 민속절기를 보내면서, 산천의 모든 초목들도 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마냥 푸른색 일색이었는데, 이제는 누런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낮의 태양은 여전히 뜨겁지만, 그늘에는 시원함과 함께 건조한 바람까지도 부는 변화의 영향이 그렇게 자연환경과 우리의 삶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참 바람과 계절의 흐름이 무섭고 엄중함을 다시금 절감한다. 

 

이 때, 우리는 이 세상과 시절의 주관자이시도 하신 조물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진정 누구신가? 정말 우리는 그 분을 제대로 알 수는 있을까?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를 아는 일이 우리들에게 어떤 차원에서 축복이 되는가? 사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먼저 진솔하게 고백(告白)할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상대할 때마다,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고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려는 입장보다는, 그에게서 뭔가를 받아내려는 욕망과 그에 따른 내 감정적 대응만이 우리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반응 여하에 따라서, 나는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를 결정하려는 태도’도 보여 왔었다. 그런 나의 일방적인 입장과 자세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고 대응하실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 한마디로 막무가내였고 마구잡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무지몽매한 그런 시절의 나를, 내치거나 외면하지 않고, 다만 참고 견디며 기다려주신 분이 바로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셨다는 것이,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준 결정적인 답변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그런 모습을, 마치 아기들이 태어나 자라면서 온통 자기 필요에 따라서 엄마아빠에게 일방적으로 떼쓰듯 요구하는 모습처럼 보셨으리라 추측된다. ‘자기가 구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한지 해로운지’도 모른 체, 마냥 ‘달라’고 매달리던 철부지 아이들과 같았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는 그런 신앙의 유아기 시절에 겪게 된 시행착오(試行錯誤)들이 많았다. 아버지가 주도하실 일들을 미숙한 자식들이 믿지 못해 주도하려고 나선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 대가는 몹시 혹독했다. 아버지요 창조주의 말씀과 관심을 외면하는 바람에, 그 하늘 아버지께서 베풀어 줄 모든 축복과 풍요와 기쁨의 선물들을 제대로 향유하거나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이 바로 실(失)낙원이요 실(失)에덴의 현상이었다. 

 

하지만 본성이 긍휼과 자비로 가득하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제 모든 시행착오 속에 저주의 상황에 빠져든 당신의 자녀들에게, 다시 돌이킬 기회를 주고자 하셨다(눅15:11-24 참조). 그동안은 제 멋대로 살다가 실패와 고생을 해온 자들이었으니, 이제는 아비의 말씀을 듣고 따르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차근히 입을 여신 것이다. 그 말씀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다. 

 

1) 생존의 방식의 변화로서, 새로운 마음 관리에 나설 것을 요구하셨다. 세상과 재물이 자신을 살린다는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좇는 것이 자신을 살린다는 입장을 택하라고 하셨다(눅12:33-34).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호와께 돌아와야 하고, 그의 말씀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청종(聽從)하면서(신30:1-2), 자신의 가슴속에다 창조주 여호와를 아는 믿음과 지식으로 채우며 자라가야만 하였다(골1:9-10). 

 

2) 그러면 뒤처리는 하늘 아버지가 하신다.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늘 아버지(눅12:32)가 그렇게 돌아온 당신의 자녀와 백성들에게, 그들이 여태껏 생각지 못하고 또 맛보지도 못했던 놀랍고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준비된 사랑과 축복들을 풍성히 안겨줄 것이다(신30:3-5). 탕자가 받았던 그 영광의 자리를 반드시 상속받게 해 주실 것이다(눅12:31하, 골1:11-14). 

 

오늘은 창조절 넷째 주일이다. 주신 세 본문 말씀들을 보면, 당신의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모으시려는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의 열정이 뜨겁게 느껴진다. 어떻게 하든 집나간 자식의 귀가(歸家)가 이루어지고, 실낙원한 아담 가족들에게 복낙원의 길을 열어주고 싶어 하시는 창조주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런 복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과 시선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와 그가 주셨던 말씀들에 집중하여야 된다. 

 

믿는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자기중심과 자기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을 생각하는 입장은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한다. 특히 자신이 이제 신앙의 유아기를 벗어나 성장기에 들어섰다면, 이제는 영적 질서와 분별력도 성숙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믿는 아버지와 그의 뜻을 우선적으로 구하는 일을 습관화하고, 아버지의 폭넓은 배려 속에서 내 문제까지도 잘 되리라는 믿음을 절대적으로 갖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절대적인 재량(裁量)권을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이 겨냥하는 대상들도 모두 그런 부류(部類)들이다. 기존의 자기중심의 믿음의 틀을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믿음의 질서에 편입(編入)을 요청받은 이들이다. 

 

☞ 신명기는 바벨론 포로기를 끝내고 귀환을 앞둔 유대인들을 다시 품으시려는 여호와의 따뜻한 말씀이 담겨 있다고 보인다(1절 참조).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도, 그 믿음과 약속을 저버리며 살다가 패망하여 강대국에 포로와 노예로 살았던 비운의 인물들이었다. 민족 차원의 또 다른 탕자(蕩子)들이었다. 

☞ 복음서의 대상들은 예수로 인하여 새 시대의 새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제자들 일행들이었다. 주님은 그들의 가치관과 신앙관의 대변혁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형성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 서신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하였다. 그들은 율법 중심의 유대인과는 달리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믿음-소망-사랑에 자신의 삶을 구축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 건설하도록 부름을 받은 전위대들이었다. 

 

구약이다

(이 본문은 자칫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 후의 상황으로 보려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본문 내용의 정황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신명기서의 기록이 포로기 때인 점과 내용상의 배경을 참조하더라도, 이 본문의 내용은 포로기를 마감하는 유대인들을 향함이 분명하다)

 

그들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던 흔적들이 마음에 남아 있는 대상들이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금방 회상(回想)할 수 있는 말씀들이 많았다. 그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래, 그들은 모세의 율법, 예언, 지혜서를 비롯한 다양하고도 풍부한 여호와의 말씀들을 보유(保有)하고 있었던 족속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백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런 소중한 생명의 달고 오묘한 말씀들을, 우상과 세상에 빼앗기고 다 팽개쳐서 몸과 마음을 탕녀처럼 다 빼앗겨 살다가(호세아 증언), 여호와의 벌과 저주를 그토록 심판으로 받았던 족속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제 결정적인 회복과 만회(挽回)의 기회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바벨론 제국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고레스에 의하여 건립되면서, 여호와께서는 전격적으로 이스라엘의 70년의 복역(服役)을 끝내게 하시면서 그리던 고국으로 무사 귀국할 기회를 열어주셨기 때문이었다. 마치 복낙원의 여정이 특별히 허락된 것이다. 하지만 몸들만의 귀환이 전부가 아니다. 껍데기만 가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보다는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떠받쳐줄 여호와의 말씀들이 채워지는 일이 보다 중요하였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매우 특별한 당부(當付)를 주셨다. 

 

1) 여호와께서 일찍이 그들에게 주셨던 복과 저주의 내용이(신28장 참조) 자기들에게 결국 나라 패망과 포로생활을 통하여 임했었다는 점이 마음에서 기억(記憶)이 되거든(1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즉시 다시 여호와께 돌아와, 마음과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청종하라고 요구하셨다(2절). 

 

2) 그러면 여호와께서도 그들에 대한 실망의 마음을 거두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그들을 모으고 품으시며 이끄실 것이다. 그곳은 조상들이 차지했던 땅인데, 그곳을 다시 차지하게 하시되, 선을 베푸셔서 옛 조상들 시절보다 더 번성(繁盛)하게 하시리라는 언약을 주셨다(3-5절). 

 

복음서를 보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택하신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제대로 된 참 신앙인의 모습을 요구하셨다(28절-믿음이 작은 자들아!). 우선은 자신이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통감(痛感)하는 일이다. 그 바탕위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진짜 아버지를 상대하는 자식들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바라셨다. 그래야 아버지가 자녀들의 필요한 모든 것을 제대로 챙겨주시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늘 아버지를 제대로 아는 지식에 부유해지기를 바라셨다. 걱정과 염려 위주의 생활문화는 마땅히 중단되어야 했다(22-31절). 

 

동시에, 자신의 미래와 구원이 자신들의 소유물이나 재물(부)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환상과 허상에서 벗어나, 오직 불안정하고 도둑과 좀도 먹는 이 땅이 아닌 하늘에 마음을 두고,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만 전심전력(全心全力)할 것을 요구하셨다(33-34절). 

 

1) 하나님을 부모로 둔 자녀들의 입장은 한결같아야 한다. 자신들은 공중의 까마귀보다 낫고, 들판의 백합화보다 더 귀한 존재로서(24,27절), 하나님이 그것들보다도 훨씬 더 책임지고 기르시고 먹이시는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늘 아버지 앞에서 의식주 문제를 구할 필요도 없다! 어느 자식이 멀쩡한 아버지를 앞에 두고 자기의 의식주를 늘 걱정하며 사는가? 그 행위는 아버지에 대한 불신이며 모독이다! 자신이 믿음이 없는 자임을 입증할 뿐이다. 

 

2) 자식이 필요한 것을 늘 살피고, 또 자식에게 늘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하늘 아버지임을 믿는 그들은 이제 마음과 관심의 차원을 바꿔야 한다. 마치 세상의 불신자들과 같은 행태(의심.불안,걱정,염려 등)를 빨리 청산해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필요한 것들은 아버지께 맡기고(29-30절), 자신들은 하늘 아버지의 관심과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서 그것에 도움을 드리고 싶어 하는 자식의 (효도의) 마음을 보이는 것이 마땅함을 말씀하셨다(31절). 

 

3) 무엇이 그의 나라를 구하는 모습일까? 바로 내 마음을 세상과 재물에다 두지 아니하고, 구제와 나눔에 힘쓰며,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마음과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삶을 말한다(33-34절 참조).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없게 사는 일이다. 그런 이들의 헌신의 보물들은 모두 하늘 곡간에 저축될 터이니 말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근심은 얻어낼 것을 없게 만든다. 하지만 올바른 근심과 관심은 얻어낼 것들이 가득하다. 이제라도 우리는 내 중심의 판단과 관심에서, 하늘 아버지인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전환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면 알수록 복이 되는 분이시다.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도 커진다. 우리의 삶은 오직 거기에서만 새로운 차원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서신서를 보자

바울은 그의 파송 선교동역자인 에바브라를 통하여(7-8절), 골로새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 대한 여러 아름다운 소식을 접하면서, 너무 기쁘고 반가웠다. 그러면서 그들의 미래를 향한 자신의 마음과 기대를 전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들의 지금의 아름다운 신앙이 앞으로도 숱한 도전과 역경을 만날 터인데-, 그 때에도 골로새 공동체가 그 시련을 잘 견디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들을 향한 자신의 애정의 마음과 기도를 서신(書信)으로 전한 것이다. 

 

1) 그들은 에바브라로부터 복음을 받은 이후, 그리스도인의 표지요 정체성인 믿음-소망-사랑을 굳건하게 견지(堅持)하면서 사방에까지 믿음의 아름다운 소문을 낼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는 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며, 온 천하에까지도 선교의 열매까지 맺었음을 말한다(3-6절). 

 

2) 바울은 주마가편(走馬加鞭)의 심정으로 그들을 위한 간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들을 위한 바울의 이러한 기도 제목들은 종말을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하나같이 필요한 것이어서, 더욱 주목이 되는 주제들이다. 그 내용들은 이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삶이 채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크면 클수록 절대 복이 되기 때문이다(9절). 주의 뜻에 부합된 행위로 선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계속 자라게 되고(10절), 주의 영광에서 얻은 능력으로 기쁨 중에 인내를 이루며,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함을 얻어 새 생명에 가담하고 그의 통치 아래로 옮겨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삶을 산다는 점이다(9-14절 참조). 절대 필요한 요소가 아닌가! 

 

결론이다

신앙의 열매를 생각하는 계절이다. 그 열매가 어디에서 ‘더 그리고 제대로’ 맺을까? 나의 욕망과 소원이 성취될 때일까, 하늘 아버지의 거룩한 소망이 내 안에 채워질 때일까? 복은 내게서가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그 분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기를 갈망하자. 그를 더욱 배우자. 내 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 마음 관리와 선택이 내 운명을 결정한다. 믿음이 적은 자들에게서 믿음이 부한 자들이 되자. ‘이 모든 것 외에 더하여 주시는 그 분’을 더욱 맛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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