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하 23:13-17, 마10:34-39, 약4:1-10, 시 113
오늘은 창조절 열 번째 주일이다. 11월 맞이 감사의 달 첫 주일이기도 하다. 일기는 지난 여름의 더위가 너무 오래 지속되는 바람에, 가을 단풍철도 약간 길을 잃은 느낌을 준다. 기상이변의 여파가 우리 삶의 곳곳에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날씨는 조석으로 매우 차갑다. 모두들 건강에 유의하여 몸 관리에 차질 없도록 해야겠다.
때마침, 나라가 하도 어수선한 가운데, 북한의 군인들 다수가 러시아에 파병되어 우크라이나 전선에 배치되기 위하여, 전투 훈련에 임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중에 우리 정부는 나토에 군 정보 인사들을 파견하고, 한미일 연합모임을 펼치는 모양이다. 물론 북한 군의 그런 움직임에 대비하고 대처하는 일이야 해야 하겠지만, 무기를 지원한다거나 필요 이상으로 그곳의 전투나 전쟁에 우리의 힘을 보내고자 개입하는 일은 절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 차제에 떠도는, 전쟁 유발을 도모하려는 우리 정부 측의 행동은 절대 막아야 할 일이다. 아무리 정권이 위기이고 몰락의 징후도 보인다 해도, 나라가 불필요한 전쟁에 휘말리게 하는 일은 절대 금물이다. 그렇게 행동하면 그것은 천하의 역적(逆賊) 행위가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동족상잔(同族相殘)은 지난 6.25 한 번으로 끝나야만 한다. 그 어떤 정권이나 정부도 이 민족의 평화 관리만은 목숨걸고 지쳐야 할 절대적이고 엄중한 멍에임을 기억해야 한다.
최근 우리는 주일 강단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에 관련된 메시지를 계속 듣고 있다. 그러면서 이 이중 계명에 담긴 기준선(가이드라인)이 무엇인지도 확인하고 있다. 사랑은 그 내용이 비장하다. 하나님 사랑은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해야만 하고, 이웃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만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사랑이 참 맛을 내고, 그 감추어진 능력과 힘이 제대로 발휘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면, 사랑은 허울만 남고 힘은 상실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은 특히 하나님 사랑에 대한 기준선의 보다 실재적인 지침(指針)들을 자세히 제시하여 준다. 사랑이 무엇이고 그것을 지켜낼 때 오는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밝혀 준다. 특히 구약에서는 목숨을 다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밝혀 주고 있고, 복음서와 서신서에서는 원수 사랑에 대한 증언 부분에서 원수가 누군 지와 그 원수 사랑을 실천할 때,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지도 밝힌다.
1. 구약 / 삼하23:13-17 / ”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니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 “
다윗이 왕위 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좋든 나쁘든 무조건 그에게 충성했던 무리들의 덕택이었다(18:3, 21:17 삼상22:1-2참조). 특히 30 두목(頭目) 같은 무리들이 다윗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하며 섬기었던 까닭이었다(13절). 오늘 본문의 아둘람 굴에서의 세 용사들이 보여준 사건은 그중에 매우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윗의 용사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 주었는지를 선하게 보여준다. 특히 군주(君主)인 다윗에게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얼마나 충성하였는지를 잘 보여준 곳이다.
1) 다윗 왕은 비록 민족은 하나였으나, 주변의 국가들과는 대치 중이기도 했다. 아둘람은 그런 다윗에게는 마치 고향의 피난처와 같은 바위산으로 된 굴이었다. 삼상22:1-2에서 보면,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이곳 아둘람에서 피신하며, 그곳으로 몰려온 시대의 부랑민들(?)을 규합하여 개인 군대를 육성한 곳이다. 그들은 대체로 권리를 빼앗긴 자들, 실패한 자들, 빚을 지고 종살이하다가 달아난 자들, 혹은 상속권이 없는 아들들과 같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도피 중인 다윗의 부하들이 되면서, 후에는 왕이 된 다윗의 최측근 용사들로 활동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다윗과 그들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동지들이었다.
2) 이날도 다윗은 블레셋과 국경을 이룬 곳인 아둘람을 찾았는데, 30두목 중의 세 사람이 다윗을 찾아왔다. 그 셋의 이름은 요셉밧세벨, 엘로아살, 삼마였다(23:8-12절). 그때의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었다. 다윗에게는 고향 땅이 적진의 휘하에 있는 샘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다윗은 갑자기 고향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이 그리워졌다. 시원하게 한 모금 마시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불쑥 나온 말이, ‘누가 그 물을 내게 마시게 할까’라는 말이었다.
3) 그러자 얼마 후, 다윗이 마시고 싶어했던 그 베들레헴 우물물이 자기 앞에 올라와 있었다. 그것은 다윗 왕의 마음을 헤아린 세 용사들이 즉시 그곳으로 출정하여,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서, 그 성문 곁 우물을 길어 가지고 왔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귀환하였기에 다행이지, ‘엇차’ 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매우 위험천만한 출정이었다. 다윗은 자기 한마디에 그토록 엄청난 모험을 하면서 가져온 그 우물물을 보면서, 결국 마실 것을 포기한다.
4) 그 물이 그 순간에는 피로 보였기 때문이다(17절). 엄청난 부하 장수들의 충성심에서 나온 헌신의 제물인 물을 마시기에는 불편해졌고, 마실 수 없는 생명의 피의 잔으로 보인 것이다. 그렇게 생명을 담지(擔持)한 피로 보였다면, 다윗은 더더욱 노아가 받은 말씀에 따라서도 절대로 마실 수 없었다(창9:4 참조). 그렇다면 그냥 버릴 것인가? 아니다. 그 피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물을 결국 여호와께 부어 드린 것이다(16절 참조).
5) 다윗은 부하들이 그토록 자기에게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충성하는 그 뜨거움을 맛보면서, 자신의 삶도 참 주인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자로 살 것을 다짐하는 은혜롭고 감격적인 순간을 그렇게 경험한 것이다.
2, 복음서 / 마10:34-39 /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성자이신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매우 자극적이면서 단호한 결단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던지셨다. 곧 사람들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가족(家族)이 분명한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가족 사랑을 당신 사랑에 비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거나 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주님은 왜 그렇게 단호히 당신 중심의 삶을 제자들 모두에게 강권하신 건가? 분명한 것은 가족 사랑을 부정하시거나 격하시키신 것은 아니다는 점이다. 다만 부부라도 서로 사랑은 하지만, 서로에게는 부족함도 항상 있어서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이다. 부모 자식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가족 서로의 사랑하는 관계 속에 예수 사랑이 모퉁잇돌처럼 자리하고 있다면(엡2:20-22 참조), 그들은 모두 서로의 사랑이 거의 온전해지게 된다.
곧 예수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며, 예수 사랑으로 자식들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 모든 서로의 사랑의 내용과 구조를 온전하고 건강하게 붙잡아 세워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없이 부부만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의 사랑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 본래 자기 안에서는 선한 것보다는 탐욕과 이기심이 솟아 나와 서로를 온전히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를 향한 우선적인 사랑이 가족들 사이에까지 상존(尙存)한다면, 그 가족은 세상과 육신의 가족이 됨은 물론, 하늘 가족에까지도 이어지는 축복을 받는다.
1) 본문에서 예수님 당신이 온 것은 가족들이 서로 불화(不和)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까지 말씀하신 것은(35-36절), 가족들 사이에 예수란 매체가 구주로 자리하지 못할 때에 그렇게 된다는 뜻이지, 본래의 가족 관계를 파기하시고자 오셨다는 점을 말씀하시려 한 것은 아니다. 어찌 가족을 우리에게 안겨주신 분이 가족 서로를 원수가 되어 살게 하시겠는가--? 다만 창조주가 원하시는 가족의 기본적인 구도는 당신을 가운데에 두고 가족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제대로 된 가족이 되라’ 하신 것이다.
2) 그럼에도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될 경우도 있다. 가족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려는 일을 거부하거나 부정해서 끝까지 하나님의 뜻하신 가족 구도를 훼손하게 되는 경우엔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는 가족이 영적으로 진정한 원수(怨讐)일 수밖에 없다. 그게 지나치면, 가족에 의해서 박해와 핍박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순교(殉敎)까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34절). 이런 경우, 예수 편에 굳게 선 사람은 가족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 자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인물이기에, 주님에게서 합당한 복을 받게 된다(38-39절 참조)
4) 일찍이 구약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을 주신 적이 있다(미7:5-7 참조). 하나님이 더 이상 자기 기준이 되지 않고 자기의 이익만이 기준이 되는 인간 공동체는 결국은 커지는 불신 때문에 망가지고 만다(렘9:2-9, 시55:11-14 참조). 그러니 잊지 말라. 도움과 변화는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이를 위해 주신 말씀은 이러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여야 할 이유이다.
-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이로다’(6절)
3. 서신서 / 약 4:1-10 / ”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 “
본문은 교회의 사도인 야고보가 성도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불통(不通)의 현실들을 주목하면서,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그 문제 해결이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제시해 준다.
1) 먼저 야고보는 교회 안에서 종종 발생하는 싸움과 다툼들을 주목한다(1절). 대체로 그 원인은 이기적인 정욕에서 나온 것이다. 성도들 사이의 싸움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고 신나 하는 일이 분명하다. 그렇게 싸우는 일로는 아무것도 이루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으며, 되는 것이라곤 서로 상처받고 시험 들어 주의 가족 행세를 못하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2) 사도는 기도하고 얻으려고 애써도 도무지 얻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음을 주목한다(2-4절). 대체로 마음의 동기(動機)들이 은혜롭지 못하고 불편한 것에서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미움에서 나오고, 시기에서 나오며, 다툼에서 나오고, 정욕으로 쓰려고 나온 기도의 행위들은 아무리 구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두지 못하고 세상에 두고 살기에, 그는 이미 영적 간음자(姦淫者)요 하나님과도 원수가 된 자들이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께서 그들의 요구에 순수하게 응답해 주실 수 있겠는가!
3) 그럼에도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하신다. 이는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그의 생령(生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창2:7 참조). 이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분명함을 밝힌 내용이면서도, 계속 그 질서와 뜻에서 벗어나려 하는 우리 인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도 강한 질투심도 갖고 계신다는 점에 대하여서도 말해 준다(5절).
4) 따라서 하나님의 이러한 본심을 이해하고, 그 앞에 더욱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우리를 향한 징벌이나 심판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주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다. 다만 앞에서 인간(가족) 사이에 예수란 디딤돌(모퉁잇돌)을 놓고 사는 자라야 주님은 복이 되시고 평화가 되시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저항이 아닌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견지하는 자들이라야 하나님께서 주고 싶어 하시는 ‘더 큰 은혜’를 차지하여 누리며 살게 된다(6절, 마23:12).
5) 사도는 우리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자세는 피하라는 말이다. 그 방법은 하나님께는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자세를 취하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두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게 마음을 성결(聖潔)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둠의 권세인 마귀에 대하여서는 단호히 대적(對敵)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이때의 무기는 확고한 믿음이다. 그래야 마귀는 우리를 피(避)하게 된다.(7-8절, 막3:27 참조).
6) 결론적인 증언은 우리의 회개(悔改)와 마음을 낮추는 겸손(謙遜)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자신의 부족과 과오를 애통해 하며, 안타까워 하는 마음으로 주앞에 나아가는 일이다. 그럴 때, 주께서는 우리를 높여 주시고 웃게 해주실 것이다(9-10절).
o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을 들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 다윗의 장수들이 다윗에게 복종하고 사랑하듯 해야 한다. 내 가족을 위해서도 주님을 더욱 사랑해야 한다. 그게 실패하면 가족은 나에게 원수가 되는 고통을 면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두 마음을 품지 않고 겸손과 회개로 그 앞에 서야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웃게 하시고 높여 주시는 ‘더 큰 은혜’를 누리게 되어야 한다.
그렇다. 목숨을 다하는 사랑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사랑은 더욱 빛을 내고 힘을 발한다. 그런 은혜와 축복의 자리에 들어가는 우리가 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