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문) 사 55:6-13, 마6:5-15, 벧전 1:13-21
오늘은 창조절 셋째 주일이다. 밤낮없던 불별 더위도 백로(白鷺)를 기점으로 하여, 이제는 분명히 한풀 꺾인 것이 분명하다. 늘 다니는 이곳 위례의 장치 천(川)엔 때맞춰 흰색의 백로들 군락(群落)을 이루어 자태를 뽐내어 주변에 놀라움을 주었었는데-, 자기 계절을 확실히 알아서 그랬던 듯하다. 놀라울 뿐이다. 그런가 하면 밤하늘 창공엔 떠 있는 달의 자태(姿態)도 예사롭지 않다. 곧 맞이할 팔월 보름 한가위를 준비하느라 그런 가 보다. 멋진 자연 세계이다!
때맞춰서 우리 교단은 오늘을 남(男)신도회 주일로 지킨다. 우리 교단 교회들의 중추 그룹들인 남신도회 회원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며, 더욱 성숙한 복음의 일꾼으로 나아가도록 기도하고자 함이다.
사실 우리 남신도회 회원들 모두는 삶의 가장 무거운 멍에를 매고 사는 무리들이다. 가정의 가장(家長)으로써의 책임, 한 아내의 남편이요 아이들의 아빠의 무게, 본가와 처가 양가의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의무, 직장인으로서의 걸머진 사회적 공인의 책무, 집안 어른들을 섬겨야 할 멍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종이요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교회와 세상에서의 영적 책임과 보존해야 할 품위(品位) 등등 --, 실로 헤아릴 수 없이 걸머진 멍에가 많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외로우며, 남달리 걸머진 책무와 멍에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 온 가족과 교회가 그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을 보내야 함이 마땅하다. 하나님께서 절대 붙들어 주시고 함께 해주셔야만 그래도 원만이 감당할 몫들이다.
그런 중에 금주엔 민속 명절인 팔월 한가위 추석(秋夕) 명절도 있다. 우리는 이 주일을 감사(感謝)주일로 지킨다. 평소에 다소 소홀했던 감사와 기쁨을 나누자는 뜻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조상님께 감사하며, 가까운 이웃들과도 감사하며 지내자는 취지이다. 이 기회에 고향으로 나들이 하는 분들은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요즈음 의료 행정의 마비 사태로, 응급실 기능이 정지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좋은 취지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주의 돌보심을 더욱 힘입자.
오늘 창조절 셋째 주일에 주신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 남신도 회원들이 더욱 귀담아듣고, 새 힘을 얻어야 할 생명의 말씀이다. 무엇일까? 우리 개개인의 영적인 힘, 곧 내적인 힘이 될 신앙의 지침들이 함께 올라와 있다. 구약 예언서는 우리의 삶의 관심을 여호와께로 향(向)하자는 말씀을 주신다. 복음서는 그 향하는 구체적 방법과 내용으로서의 구(求)하는 삶을 제시한다. 곧 기도하는 삶이다. 그러면서 서신서는 우리 삶이 그리스도처럼 거룩해지기를 요구하신다.
‘향(向)하고, 구(求)하며, 거룩하라’는 오늘의 지침은 분명히 우리를 살리는 영적 계명이 될 것이다. 이 영적 구조의 틀을 흔들림 없이 꾸준히 견지해 간다면, 이는 마6:33의 내용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이기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그 축복의 공식(公式)에 따라서, 그 사람은 분명히 어려운 삶의 여정도 탄탄히 헤쳐 나갈 것이다.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과 축복의 힘으로, 그는 이 험난한 삶의 여정을 두려움 없이 풍부하고도 역량 있게 항해해 갈 것이다.
1. 예언서 / 사 55:6-13 / “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矜恤)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容恕)하시리라 ”
70여 년의 오랜 포로기 생활은 당사자인 유대인들에게 사고의 장애를 크게 안겨 준 것이 사실이다. 그중에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크게 손상(損傷)당한 일이었다. 이런 장애물이 왜 그 시점에서 큰 과제였나? 곧 있게 될 본국에로의 민족의 귀환 대역사가 여호와의 주도로 전개될 터인데, 그런 여호와에 대한 소극적 내지 부정적 인식이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귀환 일정은 이상해질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포로 된 백성들은 그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바를 자신의 제한된 생각으로 재어보는 태도를 계속해 왔다. 예컨대,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사40:27)거나, 그러기에 그런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가 청각 장애인과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사42:18-20). 그리고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나를 잊으셨다’(사49:14)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미워하는 여인처럼 버리셨고 이는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파기하신 것이 분명하다는 언동까지 나아갔다(사50:1참조).
그들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헤아리신 여호와는 그러기에 당신의 백성들의 본국과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역사란 대업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선지자 이사야를 백성들에게 보내서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인식과 왜곡된 견해들을 본격적으로 손보기(?)에 나서셨다. 그 문제가 된 결정적인 사고(思考) 내용의 핵심으로 지적된 본문은 바로 8-9절의 내용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참모습은, 아무리 자녀들이요 친 백성이라도 범죄와 잘못을 범하면 거기에 부합된 징벌과 책임을 부과해서라도 회개하고 갱신하게 하도록 하신다는 점과, 그런 과정을 통하여 반성과 함께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결코 그를 배제하거나 내치지 않으시고 다 받아주신다는 점이다. 기다리되 끝까지 돌아오기를 기대하시면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 돌봄의 모습은 우리 인간들의 내용과 사뭇 큰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인간 대부분의 자녀 사랑은 어떤가? 특히 잘못할 때, 단호하거나 엄격히 통제하고 재훈련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익애(溺愛)형 사랑으로 자식을 망치게 하는 경향이 크다. 그리고 그래도 못 고치는 자식들을 절대 못 버린다. 그 바람에 자식의 완고함에 끌려 들어가서, 오히려 자식의 최후의 비극과 함께 부모도 비참한 노년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당신 백성에 대한 태도와 엄격한 훈련은 깊은 오해를 안겨 준 게 사실이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선지자는 10-11절의 말씀을 준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말씀을 주시면 그것은 성취되어 이루어지고 그 말씀을 보낸 일이 이루어져 열매를 맺기까지 결단코 헛되이 되돌아오거나 되풀이 하지도 아니함을 말씀한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을 확고히 믿고 인내와 겸손으로 좇아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를 바탕으로 선지자는 역설하여 우리를 초청한다.
1) 너희의 마음과 시선(始線)과 관심(關心)을 여호와께 향(向)하라(6-7절). 방향을 확실히 제시한 말씀이다. 사실 사람의 운명은 무엇을 보느냐에서 결정된다. 보면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 따른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여호와께서 그들과 가까이 와 계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적기가 됐으니, 여호와를 찾아야 하고 불러야 한다. 특히 지금까지의 자기 생각을 버리고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여호와 역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셔서, 그들의 고국에의 귀환에 따른 새출발을 평탄케 하실 것이다.
2) 마음가짐도 중요하다(12-13절). 기쁨으로 나아가면 산천초목도 노래하고 손뼉 치며 화답할 것이다. 더 이상 가시나무나 찔레는 없다. 그들은 이제 종살이 시대가 끝났음이다. 구속자 여호와의 놀랍고 은혜로운 손길만이 펼쳐질 것이다.
2. 복음서/ 마 6:5-15 / “ 너는 기도 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과 함께 일할 사람을 제자로 택하여 불러 세우시면서, 가장 중요한 신앙 훈련으로 하나님께 드릴 기도를 가르치셨다. 특히 기도할 때 이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이심도 가르쳤다(9절). 이는 당신의 기도의 차원을 제자들에게도 개방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도,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하여 소통하며 지낼 수 있도록 연결 다리를 놓아 주셨다. 그러면서도 기도에 유의(有意)할 점도 깊이 가르치셨다.
그것은 주변의 바리새인들이 보여준 잘못된 기도 행태 때문이었다. 그들의 기도는 전적으로 외식적(外飾的)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기도하는 경건한 자’라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며 인정받으려고 모든 사람이 다 보이는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는 전혀 응답하지 않으셨다. 이미 받아낼 것을 사람들에게서 얻어냈기 때문이었다(5절).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많이 기도하는 자들임을 보여주려고 중언부언(重言復言)하기도 했다. 그들은 기도를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분이라고 판단한 까닭이다(7절). 그야말로 이방인이 취하는 기도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제자들의 기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1) 골방 기도를 권하셨다(6절).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럴 때, 은밀한 중에 보시고 들으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신다고 밝혀 주셨다. 동시에 오랜 기도를 중시하여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식의 중언부언의 기도도 금하셨다(7절). 그 이유는 구하기 전에 하늘 아버지는 이미 그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8절). 이런 기도의 원칙을 바탕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 모범(模範)을 알리고 가르치셨다(9-13절).
2)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은 반드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셔야 한다(9절). 그 이름부터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9절). 그 이름에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인격과 세계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아울러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10절). 내 것 올리기 전에 먼저 올릴 내용들이다.
3) 내 필요한 것들도 구해야 한다(11-13절). 먼저는 일용할 양식(糧食)이다(11절). 삶에 필요한 양식도 하늘 아버지께서 공급해 주실 분이기 때문이다. 죄 용서(容恕)도 구해야 한다(12절). 다만 나도 남을 용서한 일을 근거로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할 수 있음도 기억하게 하셨다. 영적 세계에도 주고받는 상식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 원칙과 상식을 깨는 일은 하나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아니함도 경고해 주셨다(14-15절). 선(先)용서가 매우 중요함이 새삼스럽다.
4) 시험(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여야 하되, 그 일로 좌와 악에서 구해달라는 간구도 올리게 하셨다(13절). 우리는 항상 연약하기에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보전하는 일이 힘들다. 동시에 악한 마귀들 역시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며 시험한다. 어쩔 수 없이 싸우며 견뎌야 한다. 이런 때, 더욱 기도가 필요하다. 승리를 위한 기도보다는 죄악에 빠져들지 않게 보전해 달라는 기도가 필요하다. 이는 결국 모든 존귀와 권세와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기 위함이다.
3. 서신서 / 벧전 1:13-21 / “ 너희가 ---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私慾)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교회의 사도인 베드로는 우리가 이 종말 시대를 어떻게 악에 빠져들지 아니하고 잘 극복할 수 있을지에 관심하면서, 몇 가지 의미 있는 방안(方案)들을 제시해 주었다. 목표는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는 일이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영적 노력들은 다음과 같다 :
1) 먼저 바라보는 것이 있다(13절). 마음에 겸손과 근신의 허리띠를 동이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때 우리에게 안겨 주실 은혜의 선물을 온전히 바라고 사는 일이다. 이런 마음을 품고 사는 자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웬만한 시험들을 견디어낼 방폐(防弊)를 이미 보유한 것이다.
2) 행실(行實)을 거룩하게 보전해야 한다(15-16, 18-19절). 예전의 사욕에 다시 빠져들지 아니하고, 부르신 주님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이,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얻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영적 긴장감이 유지되어야 한다(17절). 하늘 아버지는 우리의 외모가 아닌 행한 모습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의 나그네 삶에는 방종이 아니라 깨어 있음, 곧 두려움으로 지내야 한다. 이 일은 삶의 위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이 마지막 때에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 되신 분이시다. 하나님에 의해 죽음에서 살리심을 받아서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신 분이시다(21절).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언제나 그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o 한가위는 실로 축복된 계절이다. 이런 때, 주의 일꾼으로 세상과 교회와 가정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부르심을 받은 모든 남신도들이 부디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항상 기도에 힘쓰며, 거룩한 행실로 복음의 전사들로 살아가는 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주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먼저 이런 영적 성숙의 고지에 올라서는 일이 매우 지혜로운 일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은혜가 더욱 풍성히 공급되면서(마6:33), 우리의 모든 삶이 아브라함의 후손처럼 되어 건강하고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