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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6.25 민족화해주일

관리자 2024-06-18 (화) 16:24 4개월전 461  

분문) 살전 5:1~11, 욜2:1-11, 막4:21-34 


오늘은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이다. 낮에는 이미 땀이 나는 때가 되었고 시원한 물놀이와 유원지가 인기를 끄는 때가 되었다. 금주에는 남쪽 제주에서부터 장맛비가 예고 되고 있기도 하다. 부디 몸 관리 마음 관리 모두 잘해서, 여름이 나에게 저주가 아닌 축복의 계절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특히 자연과 환경과 이웃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깊이 기울여서 이 시대적 소임을 잘 감당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다. 


마침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6.25 맞이 민족화해(和解)주일이기도 하다. 남북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먹구름처럼 짙게 드리워 있어서 큰 걱정거리이며 기도 제목이다. 남북문제의 가장 큰 핵심은 상대방에 대한 불신에 있다. 북한은 미국을 못 믿어서 한다. 그래서 언제 남한 정권과 함께 자기들을 공격해 올지 몰라서 불안해한다. 그래서 그 대안을 강력한 핵무장에서 찾고 있다. 반면에 미국에 군사력을 크게 의존하고 있는 남한은 북한의 그런 핵무장을 경계하면서 비핵화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자체의 군비 경쟁을 강화해 가고 있다. 


최근엔 서로에 대한 비방 수준이 악화하자, 남북의 각종 연락 통신망이 완전히 차단되면서, 언제 돌발적 내지 우발적 충돌이 발생할 지경이다. 북쪽에선 오물과 쓰레기가 담긴 대형 풍선을 남쪽으로 보내고 있는가 하면, 남쪽에선 이전에 해왔던 김정은 비방용 풍선 띄우기와 함께 휴전선에서의 확성기 설치를 통한 체제 비방과 선전 등을 재개하면서, 지난 정부들이 애써 합의해서 중지했던 것들을 다시 끌어내어 재공세를 벌리는 등의 유치한 신경전까지 시작했다.


이런 때 양측의 민간 단체라도 서로 간에 교류하고 협력하는 통로가 이어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전에는 남북 교회들이 다소나마 그런 통로가 되기도 했다. 직접이 아니면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매체로 하여서라도 상호 기도문 등의 교류도 해왔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그것마저도 틀어막힌 상태이다. 우리 정부의 북한 정부에 대한 극우적 적개심이 너무 강하다 보니, 모든 민간 단체의 접촉도 생각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극우성향의 개신교 세가 강한 한국교회이고 보니, 중간 매개자의 역할 하던 교회의 입지도 더욱 힘들어졌다. 


이런 때,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 예수님이시라면 이런 식으로 동족의 대치 상황에 침묵하고 계실까, 아예 ‘정치판의 일이니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방치해 버리실까? 그러실 리가 없다. 십자가의 도를 구원의 길로 제시한 주님이 가만히 계실 리 없다! 만에 하나, 정면충돌이라도 발생하면, 참담함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후유증을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전쟁 이후가 아닌 전쟁 이전의 지금이 더 중요함을 확인한다. 싸우기 전에 먼저 화해와 평화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정부가 나오도록, 그런 평화의 주역이 되는 교회와 성도가 되도록, 노력과 간절함이 담긴 기도들과 선한 싸움들이 모아져야 한다.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심판의 날인 주의 재림의 날, 빛을 잃은 어둠의 그날이 임박했음을 전하면서, 그날과 그때를 대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삶의 모습으로 대응하여야 할 것인지를 제시하는 내용이 올라와 있다. 그 대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육체의 사람들이 아니다. 창조주를 믿는다면서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때를 분별하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나태하고 게으른 부름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요즈음도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이 여전히 극성이다. 옛 구약시대의 아합과 이세벨 시대나 초대교회 때의 일만이 아니다. 현 집권 세력까지도 심각한 무속(巫俗) 정권이 아닌가! 게다가 그런 거짓 영의 횡포에 한국교회들도 정치적 동조 내지 침묵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성령의 심각한 탄식이 하늘에 사무친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정신 차려서 받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는 진리의 말씀처럼, 자기 정체성이 확실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기대할 것은 없다. 거짓 영에 붙잡힌 입장에 무슨 화해나 자유나 민주주의나 연합이나, 그리고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내가 어떤 존재인지부터 각성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그 빛을 세상에 비추어야 한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와 무대를 안겨 주실 터이기에 그러하다.


서신서의 관심사는 임박한 종말론이다. 우리처럼 기후나 환경 위기로 인한 종말 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전쟁 위기에 따른 것도 아니다. 그 대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날이 과연 언제일지를 놓고, 그 셈법에 골몰한 현상이 당시 교회의 일각에서 큰 힘을 내고 있었다. 그것도 교회에 대한 탄압과 박해로 인한 순교자들이 처처에서 나오는 상황이었기에 성도들의 재림 주님에 대한 기다림은 매우 뜨거웠다. 일부는 변절자가 되어 세상으로 나갔고, 기다리다 늙어 죽어가는 순간까지 오시지 않는 주님을 그리워하는 모습도 접하게 되면서, 재림론자들의 다양한 주장들은 교회와 신앙인들의 처신을 계속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에 교회의 사도인 바울은 성도들의 종말(終末) 신앙의 중심 잡기에 나섰다. 사실 바울 자신도 당신의 생존 시에 주님 재림을 맞이하리라 예측하기도 한 사람이었다(살전4:15,17 참조). 그러기에 그는 오시는 주님에 대한 소중한 믿음은 강조하되, ‘그때가 언제냐’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어떤 존재로서 맞이할 것이냐’에 방점(傍點)을 두고 증언하였다. 이 점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임을 강조하였고, 자지 말고 깨어 정신 차리자고 강조한다(4-6절). 그러면서 그는 그 정신 차린 모습이 무엇인지도 밝힌다(8-11절). 


구약 요엘 예언서는 심판의 날로서의 여호와의 날이 무섭게 증언되는데,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숱한 정치적 군사적 파멸과 수모의 날이 여호와 심판의 수단으로 전제되어 묘사되고 있다. 


복음서의 내용은 앞에서 바울이 말한 그 정신 차리고 깨어 있는 자의 생의 내면적(영적)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밝혀주는 내용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주님이 주신 말씀에 경청하면서 구원의 메시지와 약속을 자신의 마음과 영혼 속에 풍성히 채워서 살아간다. 여기에서 가진 자는 더 갖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 다 빼앗기는 결과를 맞게 된다(23-25절). 동시에 자신 안에 겨자씨로 떨어져 크게 자라나는 하나님의 나라에도 주목할 것을 일깨우신다. 


1. 서신서 / 살전5:1-11 / “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


성도들에게 주의 재림(再臨-다시 오심)을 관심하며 대비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대비하는 포인트가 잘못되면, 그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삶의 방향이나 균형이 아주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람직한 재림 대비는 어떤 것인가? 기다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긴급(緊急)이나 비상(非常) 체제의 것이다. 상황에 맞춰 긴급하게 대응하는 일이다. 둘째는 상시(常時)요 항시(恒時) 체제의 것이다. 이는 매사에 대비하고 사는 일이다. 


물론 이 둘은 다 필요하다. 하지만 성도들의 기다림은 어떤 것이 더욱 바람직할까? 임기응변에 능해야 하는 첫 번째 것은 아닐 것이다. 안정감이 없고, 우왕좌왕할 가능성 때문이다(1-3절). 그보다는 인격화와 생활화로 늘 갖추고 사는 두 번째가 마땅한 방안이다. 그렇다. 바울은(4-11절), 아니 우리 예수님은(눅17:21 참조), 바로 이 방법으로 교회와 성도들이 종말과 주의 강림을 대비하라고 일깨워 주셨다. 이것이 평소에 잘되어 있으면, 준비된 모습으로 깨어서 종말의 때를 당황 없이 성숙하게 대처하게 된다. 그 방법을 바울은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 


1) 평소의 삶을 빛과 낮의 자녀답게 사는 일이다. 그래서 자신이 결코 어둠과 밤의 자녀가 아님을 보여주며 사는 일이다(5절). 그러면 낮의 형(型)과 밤의 형(型)이 어떻게 다른가? 밤의 형은 자고 취하는 자들이 활동하는 시간대이다(7절). 생산적이 아니라 소비적이요 퇴폐적이다. 도둑이 활동하는 때이다. 반면에 낮의 형은 깨어 일할 시간대이다. 그러기에 생산적이며 책임적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주는 때이다. 


2) 바울은 낮의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제시한다. 우선은 정신을 차린다(be alert and self-controlled/NIV). 이는 상대의 움직임에 대하여 기민하게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자신을 적절히 통제하며 행동하는 모습이다. 여기에는 그의 마음에는 무엇을 행하든지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는 자임을 표방하고 있다. 또한 결코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지도 않고, 남의 손해에도 무심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8절). 그러면서 마음은 늘 주님이 자기와 동행하시기를 소망하고,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며 사는 존재라는 의식을 항시 품고 산다(9-10절). 


3) 건강한 공동체 형성에도 관심이 있다. 항상 상처받고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인간들의 모임이 교회공동체이기에, 피차 권면하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상대를 향한 간섭 차원이 아니라 나와 너를 서로 북돋아 주고자 하는 배려 차원에서이다. 그러면서 더욱 믿음이 연약한 가정에게 하고(갈6:10), 덕을 세우는 일에도 마음을 모은다(11절). 


2. 구약 / 욜 2:1-11 / “ --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 ”


선지자 요엘이 전한 여호와를 통한 심판의 경고에는 두 가지 차원을 함께 담고 있다. 하나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강대국들(앗수르 & 바벨론 등)의 무자비한 침략과 그로 인한 처철한 패망 참사가 담겨 있고, 또 하나는 전 인류 종말을 기하기 전에 하나님이 마지막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보내실 보혜사 성령의 강림 사건이 담겨 있다. 본문은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임할 무자비한 심판의 실상을 담고 있으면서, 그러기에 진정한 회개를 요구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매우 흥미로운 현상은 요즈음 21세기의 인류 최후의 종말을 외치는 곳이 예전에는 교회였다면, 요즈음에는 과학자와 인류학자들이라는 점이다. 예전에는 예언자나 부흥사들의 전유물이 최후의 심판이요 재림 예수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엔 과학자와 생태학자들이 매우 시급하게 지구촌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외친다. 교회는 사람들의 범죄 때문임을 지적했다면, 과학자들은 생명을 경시하고 쓰레기 문화를 양산한 인류의 죄악 때문임을 지적한다.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공통점은 인간의 생명 경시와 생태계에 대한 무책임한 대응이란 범죄 때문이다. 그 바람에 요즈음의 전 지구촌은 극심한 기후 위기와 생태 위기에 휘몰려 들었다. 대홍수의 범람, 돌변하는 기후변화, 급속한 남북극의 해빙으로 인한 바다 물량급등, 수온 상승에 따른 바다 생태계의 대변화, 초대형 산불의 확산, 지진 등으로 인한 급격한 지형변화, 범람하는 쓰레기 더미로 인한 지구촌의 생태환경 위기 등등, 하루가 다르게 위기들의 연속이다. 


오늘 요엘의 경고는 우상숭배와 사회정의를 외면한 불의한 이스라엘과 유대를 향한 하나님의 맹렬한 분노가 어떻게 그리고 언제 임할 것인지를 예고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 심판의 잔인성과 철저성을 보면(3-10절), 단순히 전쟁의 후유증이라기보다는 요즈음에 우리가 겪고 있는 환경재앙의 공세와 그에 시달리며 무너지고 있는 우리네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정말 임박한 종말에 대한 두려움과 책임 의식을 갖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둑을 막겠다는 소명감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시대 파수꾼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3. 복음서 / 막4:21-34 / “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


이 비유는 정신 차리고 깨어 있는 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 주는 내용이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상 빛이고 진리이다. 따라서 빛으로서의 말씀은 받은 사람의 삶을 밝고 건강하게 살도록 이끈다. 이 빛을 받은 자는 결코 자신을 어둠의 자리로 도피(逃避)하게 하거나 은폐(隱閉)시키지 못한다(21-22절 참조). 그러기에 종말에 우리는 자신이 언제나 말씀의 빛을 받으며 살아가도록 훈련하고 지속적인 연단을 받게 하여야 한다. 


진리로서의 말씀도 그렇다. 말씀은 듣는 사람이 선하고 책임 있는 자리로 나아오도록 격려하고 이끌어 준다. 그러면서 성령은 말씀을 듣는 자들 하나하나가 들으려는 준비를 얼마나 하고 있느냐를 척도(measure)로 삼아, 거기에 걸맞게 복과 저주를 주신다. 듣기에 집중하고 더 깨닫고자 힘쓰는 자에게는 그 말씀에 대한 이해력과 함께 다양한 영적 선물들을 주시지만, 듣기에 인색하고 더 얻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빈곤한 자에게는, 결국 종말 심판대에서는 그가 앞서 가진 그 어떤 적은 것까지도 빼앗기게(쓸모 없게) 하신다(23-25절). 그러기에 말씀에 항상 깨어 있는 일이 그토록 중요함을 말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이며 그 말씀을 받게 된 우리 마음은 밭이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는 하나님 나라가 말씀과 함께 자란다. 아주 작은 씨앗처럼 시작하여, 언제 자라는지 모르게 자라서 싹을 내고, 이삭도 맺히며, 나중에는 충실한 곡식으로 나타나 생명들을 살리는 이바지도 하게 한다(26-32절). 그러기에 우리 마음 밭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고 들음을 계속하고 실천하는 훈련도 받아야만 한다. 


o 이 세상에 여호와의 심판의 날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 절대 피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날을 도둑같이 맞이하지 아니하고 준비된 임산부의 자세와 마음으로 맞이하게 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정신 차려 깨어서 생명의 말씀을 붙잡혀 살아갈 때 가능한 일이다. 성령 안에서 서로 모여 듣고 나누기- 기도하기- 사랑하며 실천하기- 등의 신앙훈련을 꾸준히 이어갈 때 가능하다.

 

그때 우리는 그 어떤 모든 씨앗보다도 큰 가지가 되어 많은 열매를 생산하고 주인께 영광 돌리고 생명들을 살리는 주인공이 된다. 우리는 변화와 성숙의 체험자가 되게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여호와의 날을 맞게 되어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계22:20, 고전16:22 참조)를 고백하며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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