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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4-06-10 (월) 16:18 4개월전 465  

분문) 갈3:23~29, 룻1:8-18, 요4:7-26


오늘은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이다. 이는 시기적으로 보면,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신 지가 어느덧 한 달이 지나고 있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그래서 묻고 싶다. ‘당신은 과연 오신 성령을 받았는가, 아니면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하고 지내는가?’ 이런 질문을 새삼스레 하는 까닭은, 성령 받지 않고도 교회 생활하고 있거나 예수를 믿고 있다는 모습이 본질적으로는 심각한 문제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전망이 절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에클레시아)는 성령이 강림하셔서 이 땅에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몸체이며 그의 백성들의 모임이기에, 그곳에 모인 성도들은 당연히 물세례는 물론 성령도 받고 지내는 이들이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실재적으로는 성령 받지 못한 체, 몸의 욕구와 판단에 따라서 교회의 일원이 되어 살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어떤 존재로 존재할까?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마치 ‘물속에서의 기름’ 같은 존재이다. 


같이는 있는데, 속은 하나가 되지 못된 상태이다. 말과 생각들은 나누지만, 가슴과 영혼까지 하나 되지는 못했다. 그 바람에 그는 말씀을 들으며 교회의 일원으로 행동하여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시각과 판단을 하게 된다.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이런 이들이 교회에서 장로나 제직 등의 중요한 직분자의 자리에 들어가면, 그 교회 목회나 발전에 매우 치명적인 ‘쓴 뿌리’ 역할을 하게 되고 믿음의 행진을 훼방하는 세력이 된다. 


그러기에 교회 울안에 믿는 자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들어온 이들은, 모두가 이 성령세례까지 받은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바울이 말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라는 질문에, 즉각 ‘예’라고 응답할 수 있게 되어야만 한다. 까닭은 성령은 그 받은 자에게 믿음의 은사를 부여하시면서(고전12:9참조),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서의 자의식(自意識)을 품게 하고, 모든 일에 믿음으로 응답하며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에 들어와 믿는다고 모두가 성령에 따른 믿음의 행동을 취하며 살지 않는다. 뜻밖에도 성령에 무지하고 믿음을 무시하며 지내는 교인들이 제법 많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숱한 문제들은 거의 그런 차이에서 발생한다. 사회에서 문제 일으키는 기독교인들도 대부분 이들이다. 교회가 진통하는 경우들을 보면, 믿음의 부족에서 나온 사례들이 압도적이다. 성령의 역사와 은혜에 대한 응답을 무시한 데에서 나온 경우가 허다하다. 


그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은 믿음이 오기 전의 사람들과 믿음이 온 후의 사람들의 삶의 차이에 대하여 깊이 있게 지적해 준다. 이 차이는 모두 성령을 받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의 차이를 지적한 일이다. 물론 이 세 본문 배경에서 나온 인물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주 낯선 자들이 아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있고 정보도 있다. 그런데도 새 삶에로 나아가지 못한 모습은 그들이 여전히 보혜사이신 예수와 성령을 제대로 영접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면 이제 그 실상을 확인해 보면서, 우리의 대응도 찾아보자. 


오늘 본문들의 구조를 보면 바울의 서신서 내용이 말씀의 전체적인 틀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믿음이 오기 전(前)의 우리들이다(23절). 그다음은 믿음이 온 후(後)의 우리들이다(25절). 곧 믿음의 오기 전후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전시하듯 알려준다. 결코 같을 수 없고 아주 다르다는 점을 선언한다. 믿음이 왔을 때라야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영원한 약속을 유업으로 받게 될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29절). 


구약의 룻 이야기와 복음서의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되는 과정의 이야기는 이런 서신서의 상반된 입장을 매우 구체적인 사례들로 입증(立證)해 준다. 모압 여인 룻에게 여호와의 신앙이 들어오면서 얼마나 놀랍게 변했는지에 관하여서는, 그의 동서인 오르바의 상반된 모습과 비견하면서 입증한다. 복음서의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는 애매모호한 신앙을 가진 여인이 예수를 만나면서, 어떻게 짧은 시간이지만 놀랍게 변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입증해 준 사례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믿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는 차원보다는, 믿음이 들어가면 사람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까지 새로운 존재로 변할 수 있을 것이냐는 차원에 있다. 룻은 여호와에 대한 확고한 신앙에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맡겼을 때, 그는 이방인이면서도 이스라엘 다윗 왕의 증조(曾祖)모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까지도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마1:5참조). 그런가 하면, 사마리아 여인은 그 마음에 예수가 들어가자, 즉시 마을로 뛰어가 숱한 마을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여 그 마을을 예수 마을이 되게 하는 놀라운 전도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렇다. 이게 믿음의 힘이요 진실이다. 성령이 주신 믿음을 장착하면, 그 누구나 자기의 나약하고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신령한 힘을 입게 되면서, 전혀 새롭고 신선한 세계로 나가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이런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명분상의 교인이 아니라 놀라운 하늘의 힘을 발산하는 성도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이 안겨주신 믿음의 자리로 가야 한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의 삶(life)과 인생이 큰 변화를 안겨 주신다. 이제 본문에 들어가보자. 


1. 서신서 / 갈 3:23-29 /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교회의 사도인 사도 바울은 교인 중에서는 성령 받은 사람들은 물론,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음을 보면서, 그들이 믿음의 생활에서 어떤 차이와 문제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깊이 있게 분석해서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난 차이와 문제들은 무엇이었나?


1) ‘믿음이 오기 전의 사람들’의 모습(23절)은 대부분이 유대교에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온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교회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예전에 섬겨왔던 모세의 율법 종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23절). 그러면서도 그들은 함께 교인 된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기들이 아는 모세의 율법으로 한 수 가르치려 들거나 그들의 믿음 생활에 간섭 내지 훈수하듯 지도하려고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 율법부터 지켜야 한다는 식의 훈수(訓手)말이다. 소위 ‘할례(割禮)복음’ 등을 전한 일이었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사례를 인용하면서, 구원을 위해서는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식의 훈수를 통하여 거짓 교사 노릇까지 행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에 ‘구원을 믿음으로 받느냐, 행위로 받느냐’, ‘예수만으로 안되고 모세까지 따라야 하느냐’는 등의 문제로 심각한 혼란을 안겨주었다(갈5:1-26 참조). 


일종의 거짓 선동이었다. 모세의 율법의 멍에가 너무 무거워 그것을 가볍게 해주시려고 보혜사로 예수와 성령이 오셨는데, 그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율법과 할례 복음을 또다시 끌어들여 예수와 성령의 오심을 무시하고 그 영접을 힘들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행위는 사실상 복음을 왜곡하고 이방인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저해하는 마귀의 또 다른 장난이기도 했다. 


2) 바울은 강조했다. 율법의 역할은 사람들이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깨닫게 하여, 그 죄의 무거운 짐을 해결하고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초등(初等)교사일 뿐이다. 그러기에 율법은 믿음을 안겨 주지는 못하나, 예수께 인도하는 선생일 뿐이라고 설명했다(24절). 


3) 그러기에 참믿음을 얻으려면, 우리는 예수와 성령 보혜사들과 만나야만 한다(25-29절). 여기에는 모세와 율법은 있어도 괜찮지만, 그러나 없어도 무관했다. 까닭은 예수 복음에는 이미 그런 율법의 정신과 십계명을 포함한 핵심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에 대한 믿음을 얻기 위해, 모든 이들은 성령의 도움을 겸손히 구해야만 한다. 그래서 ‘믿음을 좇는 삶’의 자리(26절)에 들어와야만 한다. 이런 사람이 되면, 그는 어떤 존재로 거듭나나?  


4) 믿음의 기초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합(合)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일이다. 세례는 죄 씻음의 징표이자 하늘 백성으로의 거듭남의 표징이기에 절대적이다(26-27절). 이 과정에 들어서야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되면서, 그리스도로 옷(uniform) 입은 자가 된다. 이 유니폼은 예수로 인한 ‘새 인류(人類)’가 된 징표이기도 하다(28절). 그 어떤 종족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굴레에서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하늘 백성이 된 표이다. 


5) 바울은 이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것(소유)이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된 영생의 기업을 유업으로 받게 될 자임을 밝혀준다(29절). 그러면 이제 이런 단계에 들어선 위인들의 사례들을 확인해 보자. 


2. 룻 1:8-18 / “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 


룻 이야기는 인간이 참된 믿음을 가질 때, 그가 어디에까지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 사례이다. 본문에서는 동일한 운명에 처한 두 여인이 결국 어떻게 확연히 다른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준 내용이다. 이 둘을 갈라놓은 핵심은 여호와를 믿는 신앙 때문이었다. 두 여인 모두는 모압 여인들로서 자기 땅에 식량 이민 온 유대인 남편을 맞이하였다가 시댁을 통하여 여호와 종교와 신을 만났고, 과부들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둘을 갈라놓게 된 순간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곳 생활을 접고 모국인 유대로 귀국하려고 하면서, 그 두 젊은 며느리들을 친정으로 돌아가 새 생활을 하도록 권유한 데에서 나왔다. 여기서 두 여인은 상반된 길을 택한다. 오르바는 모압 친정을 택하면서 옛 생활, 백성, 우상 종교로 돌아갔으나, 룻은 단호하게 늙은 시어머니와 시댁의 새 종교와 신앙을 선택하였다. 그때 그 순간의 룻의 결단이 얼마나 확고한지, 시어머니는 결국 룻을 품고 귀국하였다. 


1) 룻의 단호함은 그의 시어머니에게 고백한 내용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시댁을 통하여 만난 여호와를 향한 신앙이 이미 그에게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하였는지를 확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같은 시집살이에서도, 같이 생활했던 동서 오르바와는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결국 룻의 유대 행은 인간적 기대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믿음이 그를 새로운 세계를 인도하게 한 동인이었다. 그의 진솔한 고백을 들어보자 : 


2)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은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6-17절). 


3) 룻은 이미 유대인보다 더 유대인이 되어 있었고,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있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을 어찌 여호와께서 탁월하게 인도하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그 후의 여호와께서는 이 이방 여인 룻을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게 하셨고, 아주 후에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에 오르는 반열에 드는 영광을 누리는 주인공이 되게 하셨다(마1:5참조). 


3. 복음서 / 요4:7-26 /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본문은 어떤 사람이 예수로 인하여 삶의 변화를 받게 되며, 그 변화는 어느 정도의 믿음의 힘을 드러나는 지를 생생히 보여준 내용이다. 이 여인이 안고 있던 시대의 불편한 사항들이 예수를 만나면서 일시에 씻어지는 모습을 보여준 내용이다. 차별받는 사마리아인이라는 점, 여자라는 점, 생활이 남자들을 상대하기에 불편한 시선 속에서 살았던 여인이라는 점, 그러면서도 어설픈 신앙과 구원 이해는 챙기고 살고 있었던 여인이라는 점들이 그녀의 현주소였다. 


이런 가련한 여인이 예수를 뜻하지 않게 동네 우물가에서 만났다. 물 한 모금 요청이 매체가 되어 예수와의 만남이 성사되면서, 그녀는 짧은 시간에 운명이 바뀌는 체험을 한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던지신 말씀들이 그녀의 가슴에 파고든 내용들이다. 어떤 것들이었나? 


1) ‘물을 좀 달라’(7절)

2)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     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

3)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4) ’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

5)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     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절)

6)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靈)과 진리(眞理)로 예배할지니라‘ (21-24절). 

7) ’네게 말하는 내가 그니라‘(26절). 


그녀는 난생처음 자신의 삶의 문제, 자신의 난감한 처지, 그러면서도 자신의 안타까운 상황을 깊이 이해하는 상대, 그러면서 자신의 애매모호한 신앙의 지식을 이해와 격려와 도움과 가르침으로 자신의 가슴 깊이 파헤치고 들어오는 분을 만난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을 뵌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가 그에게 임한 것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동네로 뛰어갔고, 미친 듯 그가 만난 예수를 전했다. 그 바람에 예수 마을이 탄생하게 되었다.


o 다시 확인하여 보자. 나의 지금은 믿음 이전인가 믿음 이후인가? 이전 상태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있다면 훼방꾼이 될 뿐이다. 하지만 이후라면, 나는 내 안에 찾아오신 예수로 인하여 무엇이든 하게 된다. 주변과 환경과 교회의 판을 쇄신할 주역이 된다.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성령이 계시다. 오직 성령의 사람됨만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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