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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총회선교주일

관리자 2024-06-05 (수) 10:35 4개월전 471  

본문) 고전1:18~25, 호2:14-23, 눅14:15-24


오늘은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이다. 6월은 특히 호국영령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들의 순직들이 헛되지 않도록 온 국민이 나라 사랑과 조국의 하나 됨에 각별히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할 때이다. 그럼에도 이런 때, 고 채수근 상병 순직 사건으로 인한 윤 정권이 보여주고 있는 은폐와 거짓 대응 행위는 나무도 실망스럽다. 채 상병에 대한 국회의 국정조사 요구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대통령답지 않은 위선적 처신으로 큰 화를 자초하고 있다. 


때마침 우리 총회는 교단 출범 제71회를 맞이하면서, 교단의 총회선교주일로 지킨다. 매년 이날(1953.6.10./ 제38총회)은 우리 교단이 왜 이 척박한 땅과 뒤틀린 교회의 현장에서, 새로운 신앙고백 집단으로 출범하게 되었는지를 새롭게 기억하고 되새겨 보게 된다. 오늘도 우리는 그날의 총회 선언문에 천명된 4가지 핵심 사항을 다시 확인하며 가슴에 되새김하여 보자 :


1)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 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2) 우리는 건전한 신앙을 세움과 동시에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3)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 사상을 배격하고 자립 자족의 정신을 함양한다.

4)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


이 내용에 따르면, 우리 교단은 기존 한국교회의 율법적이고 교리중심주의적 풍토가 교회의 생명력과 성숙에 심각한 위해(危害)를 끼치고 있음을 경계하면서, 복음이 인류 구원을 위하여 활짝 열어놓은 차원을 대폭 수용해 갈 것을 선언하였다. 이런 선언은 마치 율법 종교인 유대교에서 복음 종교인 기독교가 출애굽한 것과도 비유할 수 있는 선언이다. 예수가 율법에 묶여 있었으면 그는 결코 세계 만민의 주님이 될 수가 없었던 것과 흡사하다. 


건전한 신앙 구축과 신앙 양심의 자유의 확보를 천명한 일도, 제도권인 교회와 신학교의 제한된 틀에 교회와 신학이 통제받고 규율화되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반드시 성령의 새롭게 열어주시는 예배와 신학이 수용됨으로써, 우리 교회와 신학이 문자주의에서 벗어나 계속 발전 성장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한 것이어서, 그 가치가 높다.


노예적 의존 사상의 배격과 자립자족 정신의 함양 선언도 귀하다. 선교사의 지휘 아래 있는 신학교와 외국교회 지원의 틀 안에서 자라려는 미숙한 자세를 지양하고, 우리 상황과 여건에 부응하고 응답할 수 있는 교회의 신앙고백과 선교의 자주화를 추구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과 의지로 우리는 타 교단에 비하여 일찍 선교사의 틀에서 벗어나 민족 차원의 선교관을 갖춘 자주 자립 교회를 지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만의 것이 제일인 양하는 고립주의 역시 피해야 할 일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온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통하여,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선교 전선의 일원이요 전위대 역할도 자임하고자 했다. 그 바람에 우리에게는 세계교회가 주목하는 <민중신학과 민중교회>가 생산될 수 있었다. 덕분에 당국의 탄압도 받았다. 동시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일원이 되어, 인간의 전 생활영역에서 일하시는 전적인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단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우리 교단인 기장은 거리에서, 통일전선에서, 환경에서, 인권과 민주화에서, 민중의 고난 현장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란 독보적인 교회의 길을 밟아왔다. 


물론 지금의 우리 교단의 행보와 응답의 모습에는 적잖은 아쉬움과 비판받을 요소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어려움과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38선언서의 내용을 기억하며, 출애굽 공동체로서의 우리 정체성과 기장이라는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에 순복하면서, 더욱 굳세게 믿음과 선교 행진을 해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게 되리라.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우리 교단의 신앙 선언서에 담긴 내용들을 밑받침해 줄 충분한 성서의 내용들이 담겨 있다. 


바울을 통해서는 십자가의 도(道)가 어떻게 기득권을 가진 세상의 세력들이 아닌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시고 앞장세워서 하나님의 주권을 온 세상에 펼치셨는지를 알리고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큰 잔칫집에 초대받게 된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정작 주인의 잔치상을 받게 된 인물들은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아닌 평소엔 주변으로 밀려나 살았던 다수의 나약한 무리였다. 결과적으로 역사의 주역이 된 인물들이다.


구약 호세아 예언의 내용은 예수와 성령이 왜 오만하고 게으르며 배신을 일삼는 이들 대신에 가난하고 나약하지만 마음이 온순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나오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영생하게 하시는 지를 밝혀준다. 그 까닭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곧 성부께서 비록 상대가 당신의 긍휼을 받지 못한 자일지라도(죄인), 그리고 내 백성으로 취급을 받지 못한 자일지라도(이방인), 당신은 그들에게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을 신부에게 주는 지참금처럼 지불하면서 그들을 당신의 신부로 영접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1. 서신서 / 고전1:18-25 /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본문의 핵심이 되는 십자가의 도(말씀)는 무엇인가? 예수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의 죄과와 곤경 속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관한 소식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처형 방식으로 간주하였다. 그러기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구원받게 된다는 소식은 전적으로 허튼소리요 미련한 것으로 들렸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로 이 치욕스러운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와 곤경에 처해 있는 인간들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이 십자가의 소식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능력을 전하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호재(好材)가 되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물을 보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러한 열려진 인식에 스스로 눈을 감았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려 들지 아니했다(롬1:19-23절). 


당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려는 세상 지혜의 지배적 풍조는 둘이 있었다. 하나는 유대인의 것이었고, 또 하나는 헬라인의 것이었다. 유대인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표적(=징표)을 주장했고, 헬라인은 신에게로 인도하는 심오한 인식으로 지혜를 제시했다. 그런데 이 방식들에는 모두가 인간 측면에서 힘쓰고 애쓰도록 매달려야 되는 것이고 그것도 소수만이 맛볼 수 있어서, 모두의 것일 수가 없다는 제한성을 가졌다. 


게다가 이 두 풍조는 처음부터 그 안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메시아)에 관한 소식을 받아들여질 공간이 아예 없었다. 표적을 찾는 유대인에게는 이 십자가 소식이 무력함의 표시로서 인식이 되었고 거리낌(=스칸달론)이며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행복 차원에서 지혜를 찾는 헬라인에게는 이 십자가 뉴스가 순전히 미련하고 실없는 소리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22-23절). 


그럼에도 이 십자가의 도에는 유대의 것이나 헬라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능력과 지혜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하신 예수에게서 나오는 능력이며 지혜이다(23-25절).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이 받아 누릴 그런 능력이며 지혜였다. 대중성과 보편성을 띈 능력이며 지혜였다. 이런 능력과 지혜의 취득 방법도 신선했다. 곧 십자가의 도에 있는 내용에 놀라워하며 나를 위한 것으로 믿게 될 때, 획득되기 때문이다, 


나의 죄와 허물, 그리고 부족함과 나약함, 저주와 불행의 늪에 빠져서, 하나님의 형상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소중한 모습까지도 어둠의 권세에게 빼앗겨서 살아가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나를 건져내 주시고 다시 한번 재생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죄인들의 처형장인 십자가에 속죄 제물과 화목제물로 내어 주심을 발견하면서, 거기에 놀라고, 날 위한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이면서, 자생적으로 얻어낸 것이기에 그렇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진정 어떠한 종류의 인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셨는지를 보게 된다. 이는 교회에 모인 주류들의 면면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12제자들 선택의 면모를 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모두가 갈릴리 어부 출신이며 민중들이다. 그 안엔 세상에서 내놓고 자랑할 만한 인물이 없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신이나 가진 배경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기 같은 낮은 자들을 택하여 부르심에 즉각 응답할 수 있었다. 


바울 사도도 교회의 그런 현상을 주목한다. 교회에는 육체적으로 자랑할 만하고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능력자도 많지 않으며 문벌(門閥) 좋은 자들이 많지 않다(26절, 롬16:23의 경우도 있다). 그 대신 세상의 미련한 자들이 많고, 힘없고 나약한 자들이 많다.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 대다수이다. 소위 육체적으로 자랑이나 교만할 자들이 아주 소수이다. 세상적 시각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자들이 대거 보인 곳처럼 보이는 곳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교회 판도 형성에 대하여 매우 의미심장한 증언을 한다. 이들 곧 기능과 능력 면에서 부족하고 힘없는 이들은 세상 안에서는 압도적 다수들이다. 그런데도 이들 배부분은 소수의 세상 능력자와 권력자들에게 짓눌려 산다. 그런데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로 인해 보여주신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용이하게 접하게 하시면서, 당신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우선하여 만나고 체험하게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게 하신다. 


그래서 당신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지혜와 능력을 얻은 이 사람들이,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새 역사의 인물들이 되게 하신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거듭나고, 어둔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 물결의 전위대가 된다. 이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목표가 거기 있다. 이들을 통하여 세상과 육체의 지혜자와 능력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면서, 결국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다(24-29절 참조). 전도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행위이며, 그러기에 누구나 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나오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21절). 


2. 구약 / 호2:14-23 / ”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내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범죄와 타락으로 멸망 당할 직전에 예언 운동을 전개하였던 북왕국 이스라엘 출신의 문서 예언자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범죄와 배신을 당하시고도 못 버리시는 여호와의 사랑의 속성(屬性)에 놀라워하며 그 내용을 증언한다. 하나님의 그 마음은 마치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과 결혼한 자로서, 그가 이미 당신의 신부에게 어떤 결혼 지참금(持參金)을 이미 지불해서 관계하고 계신지를 알린다. 


그 중의 핵심은 이렇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내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19-20절). 구원을 베푸시는 활동으로서의 공의(公義), 어지러움이 없는 삶의 질서로서의 정의(正義), 자격 유무를 불문하며 베푸는 은총(恩寵), 사랑과 돌보심의 긍휼(矜恤), 그리고 신랑으로서의 신실(信實)함이 바로 여호와가 그 백성에게 베푸셨던 지참금의 내용이었다. 


그 사랑과 신실함으로 여호와는 이미 로루하마가 되고 로암미가 되어버린 자격 상실된 백성들까지도 버리지 못한 체,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베푸시는 사랑을 펼치고 계셨던 것이다(23절, 1:6-9참조). 심지어 당신의 종 호세아를 신전 창기와 결혼케 하시고 자식도 낳게 하시면서까지 여호와의 그 사랑을 전파하게 하며, 그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셨다.


3. 복음서 / 눅14:15-24 / ”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 종이 이르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 


이 내용은 왜 하나님의 선교가 세상의 버려졌던 인간들, 낮고 천하며 도움이 절대 필요한 이들에게 열렸는지, 그리고 어찌 유대를 넘어 해외 이방인들에게까지 손길이 뻗치게 되었는지를 밝혀주는 내용이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주인과의 교제 기득권을 가졌던 유대교와 율법 종교인 바리새주의가 하나님과 처음 맺은 계약 관계를 파기하고 변절하며 자기식의 만족과 유익을 추구하는 관계로 변질되어 계약 위반하면서, 주인의 천국 잔치에의 큰 초청을 거부하고 외면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 영광의 자리와 만찬이 한발 늦게 주변의 소외계층에 활짝 열리게 되면서, 세상의 죄인들과 힘없는 자들에게 기회가 부여되면서 대거 하나님 사랑의 품인 복음의 큰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o 우리 교단 기장의 하나님 선교의 속성은 이런 십자가의 도를 깨닫는 데에서 나왔고, 호세아가 외치는 하나님의 백성 사랑의 본성에 가슴이 열렸기 때문이며, 기득권 종교로 인하여 밀려난 소외계층을 품으시고자 명령하시는 그리스도의 분부에 귀를 기울여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신앙 전통 위에 더욱 굳게 서야 한다. 결코 물러날 수 없다. 더욱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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