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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환경주일

관리자 2024-05-28 (화) 09:27 5개월전 506  

본문) 갈 6:1~10, 미 7:18-20, 요 7:53-8:11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이다. 어느덧 유월 여름에도 접어들었다. 거리와 산천에 펼쳐진 녹음(綠陰)도 이미 중년기에 들어선 육중한 무게감을 품게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이 주는 음성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창조주를 찬양하는 소리에도 마음이 열려야 하겠지만, 기후변화로 인하여 순식간에 돌변해 오는 격렬한 기상이변에 따른 피조물의 아파하는 신음에도 반응할 수 있어야 하겠다. 곧 피조물의 탄식(歎息)에도 우리가 함께 대응할 때란 것이다. 


오늘은 마침 한국교회와 함께 우리 교단에서 제정한 환경 주일이다. 이를 맞이하면서 마침 내가 출석하는 양무리교회는 노회의 이웃들인 강남향린-강남들꽃-잠실희년교회들을 맞이하여, 네 교회공동체가 함께 모여 <녹색교회 연합예배>란 주제를 내걸고 주일 공동예배를 드린다. 처음 시도하는 예배이지만, 뜻깊은 연합예배라 되리라 믿는다. 물론 주제는 창조주가 만드신 이 세상을 어떻게 아름답고 건강하게 보전해 갈 것인지가 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환경에 관련된 자료를 보면서, 우리의 창조 세계 보전을 안이하고 게으르게 지켜온 일에 대한 회개와 반성, 그리고 새로운 대응책도 제시하게 될 것으로도 보인다. 이와 함께 우리는 또 다른 새로운 내적 환경을 접하게도 될 것이다. 같은 교단, 동일한 신앙고백을 나누며 지내온 믿음의 가족들을 서로 처음 대하면서 갖게 될 새로운 신앙상의 윤리적 질서 구축도 시도하면서, 마음이 열리게 되는 새 질서 수립에도 마음을 모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기대는 이번의 우리 모임이 교회와 주의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시고, 하늘 뜻을 펼쳐가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聖靈)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은 세상의 그 어떤 계명이나 약속보다 상위에 있으며, 구원받은 하늘 시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엄한 주님의 명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환경은 보이는 현상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파수꾼들의 마음가짐에 대응하는 태도도 그에 못잖게 중요하다. 


사실 지구촌 살리기, 환경 지키기, 생명 구원하기, 건강한 나라와 백성 만들기 등등은 모두 창조 세계 보전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성령의 사람들이 감당해야만 할 의무이자 책무이다. 영육의 통전적 접근을 통해서라야 우리의 구원 운동은 세상에 실체적인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이 둘 중에 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인격과 의식이 세상 환경보다도 더 깨끗해지고 아름답고 건강해지는 일이다. 그럴 때 교회의 환경 운동은 큰 열매를 맺게 된다. 


마침 오늘 우리가 받게 된 세 본문 말씀이 이런 새 각성 운동의 시발점에서 모인 우리 모두를 인도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공통적 주제(主題)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법(法)이 사방에 흐르게 하라>는 분부이다. 그런데 이 법은 세상의 법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법이요 신앙 양심의 법이다. 이 법은 그 출처가 있다. 바로 우리가 삼위(三位)이신 하나님 마음의 본성인 긍휼(矜恤)과 자비(慈悲)(사랑)을 본받아 행할 때, 비로소 서로에게까지도 베풀 수 있게 된다. 


삼위 하나님의 본성을 앞장서 소개한 구약 본문은 미가 예언서의 내용이다. 미가는 그 어떤 예언자들보다도 사회정의를 앞장서 외쳤고, 불의한 거짓 세력들을 질책했던 선지자였다. 그런 그가 당신의 증언을 마치는 끝자락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인 인애와 용서, 그리고 그의 택한 자들을 향한 긍휼과 성실에 관하여 뜨겁게 증언한다. 이런 선지자의 양면성은 성격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고결한 사랑과 자비를 온전히 드러나게 하려는 데에서 나왔다고 본다.


복음서에서는 그 성부 하나님의 품성을 그대로 드러낸 성자 예수의 자비롭고 허물을 용서하시는 모습을 매우 구체적으로 입증한 내용이다. 흔히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 이야기>로 알려졌으나, 본 내용은 삼위이신 하나님의 본성은 이토록 죄인들을 향하여서는 긍휼과 자비로 나타셨음을 확인해 주신 내용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정죄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용서요 자비임을 전하신다. 또한 그의 용서는 형평성 있는 심판론에 근거한다.


서신서는 어떤가? 이런 성부와 성자를 믿고 그의 영인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함께 신앙의 여정을 보내고 있는 이웃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자세와 태도를 견지하고 보여주며 살 것인지를 일깨워 준 말씀이다. 어찌 보면 평생 동지가 된 동료 신앙인들에게 내가 어떤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지를 제시한 지침이다. 핵심은 바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절)에 있다. 


1. 구약 / 미 7:18-20 / ” 주와 같은 신이 어디 계신가.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신다 “


선지자의 이름인 ‘미가야’에는 ‘누가 여호와 같은가’라는 질문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학자들은 그런 그가 주전 750-690년경에 활동한 선지자로 보고 있고, 이사야와 동시대를 보내며 예언 운동을 펼친 이로 본다. 그가 가장 씨름한 것은 참을 수 없이 불의했던 사회 상황이었다. 특히 지도층 인사들, 왕실 사람들, 종교 지도자들이 제구실 못 하면서 하나님 백성의 정의로움을 저버린 제반 행동들에 대하여 맹렬히 비판했고, 그들 최후의 종말까지도 선포했다(3:12). 


그의 맹렬한 예언은 백 년이 지난 후, 바벨론에 참담히 나라가 망하게 됨으로써 그 실체와 예언의 비중이 재확인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그런 처음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3:12)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외친다(7:18절). 이는 무엇을 말하려는가?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통하여 자신들의 범죄와 잘못에 대하여 혹독한 징벌을 마친 후의 상황을 전하는 내용이다. 물론 본문은 미가 예언을 연구한 후기 편집자의 글에 의한 것이지만,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여호와는 진정 이런 신(神)이다’임을 밝히고자 함이다. 곧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의 범죄와 타락에 관하여서는 엄중히 심판하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그들이 복역(服役)의 때가 끝나면, 그에게는 또다시 새롭고도 완전한 삶을 살도록 기회(機會-another chance)를 부여해 주시는 자비의 신이심을 선포하고자 함이다(사40:2 참조). 


1) 후기 미가는 또다시 ‘여호와 같은 신이 또 어디 계시냐’고 묻는다(18절). 이는 그가 여호와께서 그의 오랫동안 바벨론의 학정 아래에서 탄식하고 신음하며 살아왔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자비와 용서와 화해의 놀라운 손길을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인 고레스를 통하여 본국에로의 귀환을 할 수 있도록 특혜를 베푸는 제2의 출애굽 사건을 생생히 목격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지자는 이 은총을 여호와가 더 이상 이스라엘과 유대를 죄인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영접하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행위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 사건은 그의 남은 백성들(remnant)을 향한 여호와의 허물을 사유하신 행위요 진노를 거두어들이신 은혜의 행위로 본 것이다. 


2) 이 일은 여호와가 그의 백성에 대한 오랜 마음의 아픔을 스스로 씻어내신 일로써, 이제는 이스라엘이 더 이상 옛날의 부끄러운 죄악의 멍에에 발목이 잡혀 살지 않게 하시려는 단호한 조처를 하신 행위로 보았다(19절). 그 단호하심이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로 표현된 것이다.


3) 여호와가 이런 긍휼과 자비를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까닭은 그가 그들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관계를 맺으셨고 나누셨던 바에 따른 성실과 사랑 때문이기도 했다(20절). 이 점에서 훌륭한 신앙 조상을 둔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서 누릴 복은 놀랍기만 하다. 여호와의 성실과 사랑은 한순간만을 위한 것일 수가 없고, 자자손손 그 생명력을 존속게 하고 보전케 하며 나중에는 창대하게 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2. 복음서 / 요 7 : 53-8:11 /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이 있다. 하늘 아버지와 그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로 닮은 모습에서도 이 말이 적용된다. 본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끌려와 수모를 당하던 한 여인이, 예수가 제시한 완벽한 이유를 통하여 면책(免責)됨으로써, 그 삶이 극적으로 재기(再起)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1) 아침에 감남 산에서 성전으로 들어오신 예수를 본 백성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었다. 이에 긍휼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받아들여서 가르치셨다(1-2절). 


2) 그때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 앞에 세우고, ‘이 여자의 행위는 모세의 율법에서는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란 질문으로 예수를 시험하였다(3-6,상 참조). 만일 예수가 평소의 입장인 긍휼과 자비의 입장을 따라서 처벌 중지를 주장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게 되고(신22:22-24 참조), 죽이라고 명하면 예수가 자기모순에 빠져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사형의 판결권을 가진 로마법을 거슬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3) 이에 그에 대한 예수의 대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시는 방법이었는데(6,8절), 이는 아마도 렘17:13에 대한 암시로서 그들의 그런 무모한 행위가 책이 아니라 땅바닥에 쓴 이름처럼 허망하게 지워질 것임을 통고하셨다고 보인다. 더 적극적인 대응은 그 공격자들을 친히 심판(審判)하시는 일이었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4)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죄인에 대한 투석(投石) 심판을 조건부(條件附)로 허락하셨다. 문제는 그 조건부의 내용이었다. 그 조건부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투석하라’고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순간 마음의 돌질하려는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내면(內面)부터 돌아보게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부터 먼저 판단하게 하였다. 사실 자신들은 모세 율법 운운하지만, 그들 자신부터가 이미 간음한 당사자들인 남자와 여자 모두가 아닌, 힘없는 여자만 문제 삼고 있는 행위 자체가 이미 공의로운 율법을 파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신22:22-24참조). 


5) 사실 예수는 묻고 계셨다. ‘너희는 과연 투석할 자격자인지, 아니면 오히려 저 여자처럼 투석을 당할 자인지를 판단하라’고 하셨다. 답은 쉬웠다. 그러기에 실로 기가 막힌 순간을 맞이했다. 그들 모두는 전체적 양심의 깊은 통증(아픔)을 경험했다. 가슴이 막혔고, 입술이 봉해졌다. 예수와 그의 말씀에 강한 두려움을 느꼈다. 감히 맞설 패기나 의욕도 다 사라졌다. 최후의 방법은 그 자리를 어서 체면 불고하여 피하는 일이었다(9절). 


6) 결국 그 자리에는 진정한 심판자 예수와 그로 인해 살아남게 된 그 여자만 남았다(9절). 예수께서 그에게 한 말씀을 건네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0-11절). 참으로 역사적인 판결(判決)을 선사하셨다! 


7) 이 말씀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일단은 주님은 힘없이 끌려온 그를 매우 불쌍히 보셨다. 불평등과 불공정에 희생자로도 보셨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간음죄까지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주님은 실로 균형(均衡) 있는 심판자이시다. 다만 이번을 계기로 억울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 볼 시간과 기회를 갖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게 은총이다! 남은 일은 이 은혜를 책임 있고 복되게 맞이하며 사는 일이다. 신앙훈련은 그래서 필요하다. 


3, 서신서 / 갈 6:1-10 / ” 너희는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


놀랍게도 성령 받은 무리가 함께 모인 교회공동체에는 숱한 문제들이 계속 발생한다. 수준이나 차이, 다름과 그에 따른 갈등 요인들이 성도들 속에는 항상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적인 시험들이 어둠의 세력에 의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흔들고자 계속 도전해 오는 것도 실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법을 존중하고 그 기반 위에 서야 한다. 


그 법은 무엇인가? 큰 틀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준수하는 일이다. 하지만 교인들 상호 간에 발휘될 그리스도의 법은 삼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고 계신 긍휼과 자비의 법이다. 이 법 위에 서로를 조율하고 살펴 가면, 교회들은 평화롭게 성장한다. 본문은 다음의 몇 가지 사례 경우들 소개와 함께, 그 대처방안에 대한 지침들까지 제시해 준다. 


1) 옆 교우에게 범죄한 일이 발생할 경우는 어떻게 대처하나(1-5절)? 위 복음서의 교훈처럼, 나 자신을 살펴보아 나도 시험받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의 과오와 문제의 형편을 살펴야 하겠지만, 그게 상대에 대한 정죄가 아닌 자신의 책임과 돌봄의 부족 여부를 성찰해야 한다. 


2) 말씀 사역자들(목회자)과의 모든 좋은 것들을 함께 한다(6절). 그리고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한다(10절).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을 귀하게 대하는 일이며, 미래를 위하여 심는 영적 일들이다(7절). 육체의 일이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일이어서 성령으로부터 영생(永生)도 거두게 된다(8절). 다만 이런 선행들은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때가 이를 때까지 계속하여야 한다. 반드시 거두게 하시는 그날을 주께서 안겨주시기 때문이다(9절). 


o 환경 주일은 매우 귀중한 주일이다. 다만 오늘만의 과제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동시에 바깥만을 상대하는 일도 아님도 명심하자. 먼저 자신 내면부터 살피고 건강하게 해야 하고, 내 교회와 이웃 성도들과의 관계도 좋은 환경이 설정되도록 힘써야 한다.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와 종국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상을 보전 발전시키기 위함이다. 영적인 일이며 구원의 행위가 되는 이 일이다. 평생 건강한 환경 지킴이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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