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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5-08-20 (수) 10:21 5일전 51  

본문) 약 2:1~13, 사57:14-19, 눅14:1-11


오늘은 강림 후 열한 번째 주일이다. 날씨는 여전히 무덥지만, 한편으로는 그 기세가 조금은 꺾였다는 느낌도 든다. 참고 인내하며 잘 지내왔기에, 편안히 시원한 가을맞이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빈다. 아울러 가을은 결실과 추수의 계절이기도 하다. 우리의 수고와 땀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계절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예측할 계산기는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무엇을 기대할 만할지 궁금하잖은가! 


지난 주간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의 어긋난 행동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의 삶도 다시금 진단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수가 주신 믿음의 인한 은혜와 생명의 법을 악마에게 빼앗기지 않고 제대로 누리고 살려면, 우리는 율법이 주는 무거운 죄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강하게 받았다.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점도 잘 배웠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중에서, 한쪽만의 사랑에 매몰되면서, 결국은 한쪽에 편중된 기독교 극우세력의 일원이 될 수 있음도 확인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은 지난 주일 메시지의 재확인이면서, 동시에 이 구원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에서, 그 거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한다. 그런 걸림돌이나 거치는 장애는 사실 외부에서보다는 내 자신 안에 더욱 크게 자리하고 있지 아니한가? 


오늘의 말씀은 그 부분을 몇 가지로 지적한다. 사람을 차별(差別)하는 마음, 업신여기는 마음, 자신이 죄인인데도 의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마음, 자비와 긍휼을 잊어버림, 겸손하지 못한 태도 등을 지적하여 준다. 이 모든 것들이 지금도 내 안에 무섭게 둥지를 틀고 있어서, 나의 하나님 나라 행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면 이제 그 실상들을 확인하고, 그 극복책은 무엇인지도 함께 찾아보자. 


1. 서신서 / 약 2:1 – 13 / ”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 


야고보 사도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함께 믿는 이웃 성도들을 향하여서는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는 내용은, 지난 주일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과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갈 5장 참조). 


다만 갈라디아 교회의 실정은 거짓 교사들에 의하여 그들이 할례란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매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서 떨어져 가게 되는 신앙적 위기의 경고를 중점으로 다루었다면, 이곳 야고보 사도는 성도 사이에 차별(差別)하는 행위를 보면서,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아니하시는 여호와의 율법의 명령을 무시하는 일일뿐더러(신10:17-19 참조), 교회 생명의 보전법인 이웃 사랑의 기본을 깨고 있는 위험한 행위임을 경고하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1) 오늘 세 본문에서의 첫 번째 이웃 사랑의 장애요인은 사람을 차별(差別)하는 일이다. 그것도 함께 믿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말이다(1-4절). 대체 무엇으로 차별하는가? 외모(外貌)로 차별하는 것이다. 외모란 인간의 겉모습을 말하는데, 오늘 본문은 아무래도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로 보인다. 교회에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온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고 온 사람을 자리 안내에서부터 차별하는 모습 때문이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모두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온 처지에서, 그 입구에서부터 차별 대우를 받으면서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허망하고 속쓰림이 컸겠는가? 그러면서 어떻게 온전한 예배가 가능하겠는가? 그러기에 인간 차별, 신분 차별의 행위를 보고, 야고보 사도는 ‘인간을 업신여기는 데에서 나온 악한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서 ‘죄를 짓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책망한다(4-6, 9절). 


2) 그러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모든 인간 관리의 새 모습에 관하여도 언급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서로 같은 은사가 아닌 서로 다른 은사와 부요함을 각자에게 나누어 주셔서, 그가 받은 것들로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며 일하게 하시는 여호와이심을 기억하라는 깨우침이었다(5-8절). 이는 마치, 우리 몸의 구조인 사지백체 오장육부의 구조와도 흡사하게, 하나님이 온 세상 만민도 그렇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면서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 되어, 함께 돕고 용납하며 덮어주고 채워주면서 공존공영 공생의 길을 가며 살아가게 하심과 같다.


그러기에, 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배치의 질서가 제 효과를 내면서 빛과 생명을 발산하기 위하여서는, 딱 하나의 계명 준수(遵守) 여부에 달려 있다. 곧 구약 모든 율법의 핵심이자, 예수님에 의해 확인된 영생 구원의 한 축이며 최고의 법인,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 준수하는 것이다(8절, 레19:18절 참조). 그런데, 교회에서 사람을 외모인 빈부로, 성별로, 인종으로, 노소로 차별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웃 사랑의 계명을 무시하는 중범죄를 범한 일이 된다. 교회가 만일 그런 흐름을 차단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당연히 주님의 교회일 수는 없다. 구원받은 집단이랄 수도 없다. 죽은 교회일 뿐이다. 


3) 이런 차별 행위는 율법을 범하는 행위도 되고, 불쌍한 자를 어여삐 여기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의 복음까지도 외면하는 죄인의 행태도 된다. 그래서 율법에 따른 심판도 받게 되고, 용서와 긍휼과 자비의 복음도 범하는 행위도 된다. 그 점에서 그는 율법이 그를 범법자로 정죄도 할 것이고(9절), 긍휼을 외면하였기에 긍휼 없는 심판도 받게 된다(13절, 마5:7,18:21-35, 25:31-46, 눅6:36 참조). 


2. 구약 / 사57:14-19 / ”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본문은 바벨론 70년 징벌의 오랜 포로 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다시금 조상의 땅 시온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예고하신 내용이다. 그러기에 여호와는 먼저 그곳에 체류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당신의 백성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도록, 길을 가로막고 있는 온갖 장애물이나 걸림돌들을 제거하여서 길을 수축(修築) 하기를 명하신다(14절, 사62:10 참조). 


그러면서 앞으로 그들을 이끌고 돌아올 당신이 그곳에서 어떤 인물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어떤 마음과 영혼의 소유자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일을 하게 하실 것인지도 예고하신다(15절). 그렇다면 그 쓰임 받게 될 대상이 누군가? 주 대상은 자신의 지난 삶의 모든 과오(過誤)들에 대하여 깊이 통회(痛悔)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겸손(謙遜)한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비록 죄인이지만, 자기 잘못을 반성하며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세를 갖춘 이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귀하게 보셔서,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소생시켜서 그들에게 기회를 부여하시면서, 그들을 앞세워 새로운 당신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 보인다. 바로 하나님 자신의 새로운 마음가짐이다. 당신도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잘못한 백성들에게 그 죄와 책임을 엄중히 물으면서 혼내고 채찍질하던 그런 형태의 양육 방식에 깊은 수정(修正)을 가할 것임을 스스로에게 다짐하신 장면이다. 그 내용을 보자.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16절). 


이런 여호와의 자성(自省-?)에 가까운 고백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막상 당신의 백성들의 그 못된 타락과 범죄에 대하여, 분노하시면서 바벨론 70년 유수(幽囚)를 통하여 혹독한 심판을 취하고 난 후의 깨달음이었다. 사실 그것은 결코 불의한 조치는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백성들을 고쳐보겠다고 취하신 의로운 조치였다. 하지만 막상 그 조치를 통해서 얻어낸 당신의 마음은, 통쾌한 것이 아니라 ‘저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 스스로가 되돌이키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하신 것이었다(17절). 엄중한 징벌(懲罰)만으로 완전 새 인간 기대는 불가함을 확인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마치, 창세기의 노아 대홍수 재앙 후에,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이와 같이 대홍수의 방법으로 땅과 생명체들을 심판하지 않겠다’(창8:21)와 같은 차원의 다짐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취한 그동안의 심판 방법을 친히 바꾸는 결단을 하나님 자신이 취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불의한 다수 중심의 심판보다는, 소수라도 준비가 되고 순복하는 자들 중심의 새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겠다고 방향의 대전환을 하신 것이다. 정죄 중심보다는 자비와 긍휼과 용서 중심의 구원의 세계를 열고자 하셨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선택은 그런 출구였다. 


그래서 세상 변화와 구원의 책임을 나약한 인간들에게만 의존하여 기대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들을 주도하고 변화시킬 능력과 역량을 보유하신 당신의 새로운 사랑의 접근 방식을 동원하여 함께 이루어내는 구원의 방식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는 실로 오직 하나님만이 취하실 수 있는 은혜롭고 경이(驚異)로운 선택이었다. 모든 어리석은 피조물은 이러한 창조주 자신의 은혜로운 대변신을 맛보면서, 감사하고 평화(샬롬)를 노래할 수밖에 없게 된다(18-19절). 


바로 그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을 확실히 이루시려고 오신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이셨다. 특히 그의 제자 선택과 제자들을 향해 그의 하나님을 향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고 부르라며 새로운 관계를 맺어주신 모습은 그런 하나님 구원을 이해할 핵심적 열쇠이다(마6:9 참조). 곧 이제는 이 세상의 모든 구원의 역사를, 전능자이신 하나님만이 아니라, 나약하지만 그의 은혜와 자비를 맛본 인간들과 더불어 함께 해보자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신 것이었다! 


이런 여호와의 새로운 마음은 엄격한 심판자가 아닌 한없는 어버이의 품성이다. 정죄의 법이 아닌 사랑과 관용의 법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양육하시려는 어버이의 인격이다. 이는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품고 있는 어버이만이 보유한 품격이다(16절). 그런 품성에서라야 자식들은 비로소 숨을 쉬고, 어리광도 부리면서도 성장하고 성숙해 가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른 됨은 그런 어버이의 품격과 그늘 속에서 되어 가는 것 아닌가-! 


이런 여호와의 백성들을 향한 당신 자신의 변신(變身)은 그 나라와 그 백성의 미래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일에서 가장 핵심 되는 부분이다. 속 썩이는 자식에 대한 매질을 거두고, 두려워 떠는 여린 자식을 향하여 부모가 먼저 마음과 태도를 바꾸어 관용과 인자로 품에 안아 주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정도 파탄 난 곳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 정부는 물론, 교회들까지도 조용하지 못하다. 그러기에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부모와 성인교육에도 큰 도전이 된다. 부모 자식 간의 냉기류를 푸는 데에는, 부족한 자식부터가 아닌 성숙한 부모부터 새 모습이어야 한다. 이게 율법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이다! 매의 힘이 아닌 긍휼의 힘이다. 


3. 복음서 / 눅14:1-11 / ”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본문의 앞부분은 안식일에 수종(dropsy, 水腫-몸에 물이 찬 병)병이 들어 고생하는 자를 예수께서 고쳐 주시는 내용이다. 그런 행위는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도 안식일 위반이라며 시험 거리로 삼으려는 바리새인들 당사자 앞에서 거침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이것은 안식일은 당연히 약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마땅한 날이어야 한다는 점, 곧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날도 되어야 한다는 점을 예수께서 온 천하에 선포하신 것이다(1-6절 참조). 


동시에 후반부에서는 잔치에 초청받은 자들의 자리 배치를 두고, 예수께서 가르침을 주신 말씀이다. 여기에는 두 사람의 자리 잡기가 대조적으로 나온다. 한 사람은 자기가 주빈(主賓)인 줄 알고, 처음부터 스스로 상석에 와 앉았다. 반면에 한 사람은 실질적 주빈임에도 스스로 처음부터 하석(말석)에 앉았다. 그 결과는 어땠는가. 첫 사람은 강제로 하석으로 끌려 내려왔고, 다음 사람은 강권하여 상석에 앉게 된 것이다(7-11절). 그것이 영광을 취할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들어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은 모든 연약한 이들에게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대하시는 당신을 본받아, 매사에 겸손(謙遜)한 마음과 행동에 임할 것을 제자들에게 자시하신 것이다(7-11절). 그래야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데리고 일할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혹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상대적으로 남을 하대하는 행동을 취하는 자가 된다면, 그의 입지는 아예 설 자리조차 빼앗기거나 사라지게 될 것도 경고하신 것이다. 


o 이웃 사랑의 길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셔서 열린 길이다. 그 길을 소중히 알고 감사하며 이웃 사랑의 폭을 넓히고 강화되도록 힘쓰자. 물론 숱한 장애물들이 깔려 있다. 그것도 그 장애물들이 내 안에 강하고 깊게 잠재해 있다. 


무엇보다도 교만이라는 장벽을 넘어야겠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나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행태를 보이게 된다. 이런 모습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힘입어 받아낸 긍휼의 은혜를 저버린 모습이 되기에, 결국 나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 장애를 잘 극복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되고, 동시에 이웃들에게도 존중과 인정을 받게 된다. 부디 이 갈릴 길에서 방황 없이 당당히 승리하는 우리 모두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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