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빌 2:12~18, 마5:13-16, 사2:2-6
오늘은 강림 후 열두 번째 주일이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는 지구촌의 혹독한 기후재앙을 경험한 때이기도 했다. 세계인들로부터 지상 낙원이라고도 불리는 미국의 하와이주 마우리섬 라하이나 지역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로 100여명의 사망자와 1,000여명이 훨씬 넘을 실종자들을 기록했고, 수십조 억 원을 웃도는 재산 피해를 기록하는 등의 최악의 참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진만 보아도, 그곳이 참혹한 지옥의 현장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참변은 단순히 산불의 화재만으로 그런 대형 화재가 일어났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본다. 허리케인이란 광풍이 그곳에 몰아치면서, 그곳에서 발생한 화재와 합류하면서 그곳 작은 섬을 순식간에 덮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것도 부족하여 본 섬의 북부까지도 옮겨붙었던 것 아닌가 싶다. 미국 본토의 화재만 듣다가, 조그만 섬 하와이까지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게 하는 일이 되었다. 확실히 안전지대가 없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의 세계 대국인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도 초대형 태풍의 강습을 받아 대형 물난리 사태가 발행하는 모습도 눈여겨 보인다. 실로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와 전쟁 등으로 인류는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다. 우리나라도 최근엔 태풍의 공습에 따른 물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소규모의 지진 현상도 빈번해지고 있다. 이런 모습은 성경이 예고한 종말론적 현상을 생각하게 한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야 할까?
한마디로 깨어 정신 차려야 한다. 그래서 마음이 서로 하나 되어 발생하는 각종 재난과 재앙에 지혜와 힘을 합쳐서, 난국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겸손한 자세를 갖추는 일이 절실하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은 어떤가? 지구촌과 우리 한반도는 지금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는가?
국론 분란, 사대주의, 책임회피와 전가, 자기변명을 일삼으면서, 국가 권력의 사유화로 자신들의 수치와 무지를 호도하려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국민의 지혜와 힘을 결집해서 난국을 이겨내려고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힘센 이웃의 도움만 믿고 우리 내부는 억압과 통제를 통하여 왕초 노릇 하려는 위정자의 어리석은 모습만 보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때, 우리 교회의 대처는 어떡해야 할 것이냐는 점이다. 하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여 자주적(自主的) 능력을 보일 것인지, 권력에 편승한 허약한 의존 세력의 하나로 자신을 드러낼 것인지가 중요하다.
알고 보면 이 역사의 흐름에서는 어느 때나 위기가 고비들은 있었다. 그러기에 문제들이 많았고, 위기도 많았으며, 시련과 역경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단 한 번도 편안한 날, 천국 같은 날이 없었다. 그래도 그런 시련에서도 이길 사람은 이겨냈고, 패배할 사람은 사라져 갔다. 오늘 세 본문의 배경들을 보면, 역시 고난과 시련의 나날들이 배후에 깔려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시대를 맞이한 당신의 사람들에게 극복할 희망의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구약 이사야서를 보면, 포로기 이후의 살아남은 자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록 처절하고 혹독한 포로기란 시련의 때를 보냈으나, 그래도 미래의 희망은 그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자들 자신이며,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아들 예수의 시대를 예고하셨고, 그가 가져올 복음과 성령의 불기둥 구름 기둥의 시대도 알려주셨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암울한 시대에 당신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부여하신 새로운 정체성(正體性) 내용을 담았다. 세상을 누가 이기며 누가 살리는가를 주께서 직접 가리키셨다. 이 세상을 만드신 주역인 그리스도의 지시이기에, 그 내용은 권위를 가진 것이다. 곧 세상의 소금과 빛된 이들에 의함을 역설하신 것이다. 이는 가장 허약한 이들에게 하나님이 하늘의 크신 권능의 옷을 입혀서, 세상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놀라운 의지를 선포하신 내용이었다.
서신서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들이 그의 정체성을 보전하면서 동시에 영광의 날에 이르기까지 곧 줄 나아갈 마음과 행동 지침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내용이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빌립보 교인들에게 전한 형식으로 전달된 것이다.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 이를 위해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지를 분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1. 예언서 / 사 4:2-6 / ”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
본문은 비록 그 위치가 제1 이사야서에 있지만(1-39장) 그 내용은 제3 이사야 시절에 속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제3 이사야란 이사야서 전체인 66장 속에서 56장부터 시작된 내용들 속에 편집된 것들을 말한다. 그러면 제3 이사야의 특성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더 이상 바벨론에 사로잡혀 와 있지 아니하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다음 시대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본문의 내용은, 귀환 이후 약 20년의 상황을 생각하면 좋다. 그때 받은 예언이었다. (단, 56:1-8의 경우는 이미 성전이 재건된 경우여서 훨씬 이후로 보면 좋겠다)
그때의 예루살렘의 체류자들은 매우 다양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 그 땅에 머물러 있던 유다 본토인들, 그중에는 이웃 민족들의 우상 숭배에 참여한 자들, 귀환자들의 열성적인 신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 포로 기간에 유다 땅에 들어와 살게 된 이방인들, 바벨론 귀환 시에 유대인들과 함께 온 이방인들, 그리고 성전과 성읍의 재건 공사에 동원된 이방인들 등등이 있었다(60”10, 61:5참조).
그 바람에 많아진 이방인들을 소수의 이스라엘 회중 안에 어떻게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인지는 큰 사회적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시행착오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분명한 경고와 아울러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고,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시리라는 선포로 강해졌다(65:17, 60:1-3 참조). 결국 하나님 백성에 소속되는 데 필요하고 가장 중요하며 유일한 전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명을 준수하는 일이었다(56:4-8절). 오늘 본문은 그중에서도 여호와께서 보내실 메시아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이 모든 이들을 이끌고 덮어 줄 것임을 밝힌 것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할 수 있다.
1) 선지자는 그날을 미리 보았다. 여호와의 싹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았고, 그로 인하여 피게 될 소산(所産)들이 얼마나 영화롭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았다(2절). 여기에서 여호와의 ’싹‘은 ’체마‘(히)란 용어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말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출현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고 영화롭게 할 것인지를 예견한 것이다(눅2:14참조). 그뿐 아니다. 그 땅의 소산들도 이스라엘에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라 했다. 소산은 그의 복음이나 제자들을 총칭하는 내용으로도 보인다. 그들로 인하여 하늘의 아름다움이 펼쳐질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 그 은혜와 축복을 입게 될 대상들은 누군가? 시온(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와 머물러 있을 자와 생존한 자들과 거기에 자기 이름을 올린 모든 이들이 다 수혜자들이 될 것이다(3절). 이는 저 20세기 대학살의 희생자를 기념하여 예루살렘에 세워진 기념관인 ’야드 바쉠(야드 와쉠)‘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올린 그 기록자들과 같은 차원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3) 다만 유일한 조건이 하나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 대속(代贖)의 피를 흘리신 메시아로 인한 은혜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4절). 예수의 십자가 보혈은 모든 죄인의 죄악을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기에, 그 피가 자신의 속죄를 위한 것임을 고백하고 그 피의 공로를 믿는 자들이어야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게 됨을 고한 것이다(행 2장, 16:31 참조).
4) 그 대속의 은혜와 공로를 힘입은 자들이 모인 곳이 등장한다. 바로 교회(敎會) 공동체이다. 그곳엔 여호와께서 항상 함께 계신다(4-5절 참조). 그곳은 마치 지난 주간의 출애굽기 40장의 말씀에서 나온 성막 건축 후에 여호와께서 임재하신 것처럼, 그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자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처럼(36-38절), 교회 공동체에도 주님이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고 그의 자녀들을 항시 인도하신다.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canopy)를 두시고, 밤낮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인도하신다.
2. 복음서 / 마 5:13-16 /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본문은 이사야 예언대로 오신 여호와의 싹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택하신 제자들과 무리들을 아름답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시면서, 그들이 앞으로 취할 행동 지침을 내리신 말씀을 담았다. 그 지침은 바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었다. 아름다움이나 영화로움은 그의 삶의 역할과 행실에서 나올 것이기에, 그런 직임을 부여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너희 착한 행실로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고 명하셨다.
1) 먼저 그들을 세상의 소금으로 규정하셨다(13절). 주님은 당시의 세상과 종교가 맛을 잃었고, 또 부패하여서 그것을 해소해 줄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 나와야 한다고 보신 것이다. 음식에서 소금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자신을 감추면서도 맛을 내고, 부패도 막아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금의 역할은 과해도 안 되고 약해도 안 된다. ‘딱 그만큼’이 필요할 뿐이다. 과하거나 약하면 쓸모없거나 버림을 당할 뿐이다. 하지만 소금이 적당하면, 최고의 대접을 받게 된다.
2) 세상의 빛으로도 규정하셨다(14-15절). 소금이 소극적 기능이라면 빛은 적극적 기능이다. 빛은 모두를 비추려고 존재한다. 어둠을 쫓아내고 부끄러움을 씻어내게 한다. 모두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소진시킨다. 선교가 강조되고 삶의 모범이 요청되는 영역이다.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걸맞은 새 하늘 새 땅을 제시하여야 할 책임이 부여된 것이다.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존재로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부여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3)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제자들이 모두에게 영화롭고 아름다워지려면 필요한 행동거지가 있다. 곧 삶의 자세인 윤리(倫理)이다. 바로 자신의 행동거지를 사람들에게 비치게 하여야 한다. 당연히 착한 행실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16절). 이는 자신의 착함과 의로움을 과시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함 때문이다. 그것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모두에게도 좋기 때문이다.
3. 서신서 / 빌 2:12-18 / “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
빌립보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아름다운 신앙공동체였다. 바울은 그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며 그 성도들이 끝까지 구원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본문은 자신의 그런 마음을 전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영적 준비를 위하여 몇 가지 당부하였다.
1) 그들은 목회자인 사도 바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좇았다. 하지만 그가 떠났을 때는 그들을 엿보는 어둠의 세력들이 틈타는 모습도 없지 않았다. 율법주의와 할례 파들의 준동이 경계 대상이었다(3장 참조). 동시에 서로의 경쟁 심리로 인한 내적 분열상도 경계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것은, 성도의 자신에 대한 성찰(省察)이었다. ’나 없을 때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였다(12절).
2) 그 성찰 부분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자신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다. 어떤 하나님이신가?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그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원(所願)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13절). 이 점은 실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뜻밖에도 우리 안에는 남과는 상관없이-, 오직 나만이(라도) 이루어내고 싶은 간절한 내적 열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주신 건지, 혹 내 욕망을 위한 것인지 말이다.
그 기준이 하나님께도 영광이고, 모두에게도 유익하며, 나 자신에게도 보람과 가치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 하나님이 내 마음에 두신 소원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좋다. 그런 경우에는 그다음 단계인 ’모든 일을 원망(怨望)과 시비(是非)가 없이 하라’(14절)로 넘어가야 한다. 그럴 때, 내 삶에는 새로운 역동성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가치와 보람 중심의 삶에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속에서 흠 없고 빛을 발하는 자녀가 되어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된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삶을 누리는 것이기에, 기쁨을 향유 하며 살게 된 것이다(17-18절).
o 이제 내 자신을 성찰해 보자. 내 안에 세상의 참 소금과 빛 되신 그리스도 예수가 계신가? 내가 그분의 품 안에서 존재한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는가? 있다면 그분이 내 안에 품게 한 소원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내 삶을 이끌어 가고 있는가? 나는 그 일을 수행할 때, 진실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가? 그 일로 인하여, 나는 건강한 삶에로 나아갔다고 보는가? 그 일과 열매가 드러날 때, 내 주변에는 어떤 파장과 열매들이 나타나던가?
이 성찰을 위한 질문에 ‘예’란 답이 나오면, 그는 행보를 계속 발전시켜가면 된다. 하지만 ‘아니요’가 나오면, 그의 행보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주님과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정직하게 응답하면, 주님과 성령께서 기꺼이 도우실 것이다. 행복한 목회 여정이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