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롬 1:8~17, 마 8:1-13, 사 1:1-8
강림 후 아홉 번째 주일이다. 두더위가 기승(氣勝)하는 칠월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다. 부디 건강에 유념하셔서 이 한 여름을 잘 이겨내시기 바란다.
오늘 주일은 무슨 말씀을 주시는걸까? 세상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도리를 제공하시려고 한다. 바로 복음(福音)을 좇는 삶을 선택하라는 요청이다. 이 ‘복음을 선택하고 살아라’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복음은 ‘유앙겔리온’(헬)으로서, 듣고 좇으면 복을 받는 소리를 말한다. 여기에는 세상에 그 누구에 대한 차별도 없고 배제도 없다. 인종이나 빈부나 성별이나 강약이나 남녀노소나 학력 차별 같은-, 인간을 갈라놓는 그 어떠한 금단 지역이 없기에 복음이다.
흔히들 기독교의 이 복음을 좇으면,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에게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는데, 그것은 오해이다. 반절만 타당할 뿐이다. 왜 그런가? 복음은 세상의 강한 자와 부자도 함께 유익하고 복을 받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복음이 어떤 특정 계층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그들의 빈 곳을 채워주기에 복이지만, 강하고 힘 있는 자에게는 복음이 그들을 절제하고 균형 있게 살도록 돕기 때문에 복이 된다. 실로 복음은 단 한 번도 어느 특정 계층만을 옹호하거나 배제한 적 없다.
부족한 자들에게는 용기와 채움을, 넉넉한 자들에게는 낮아짐과 섬김을 가르쳐서 모두가 함께 이 땅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공생 공영 공존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따라서 세상 만민은 이 복음의 은혜의 그늘 아래 들어와서, 그 복음을 주시는 원천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먹고 마시고 함께 살아가면 된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의 복음은 철저하게 열린 복음이다. 이런 놀라운 은혜와 복을 알리는 일이 선교(宣敎)이며 전도이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려는가? 전체적인 결론은 복음이 우리의 생명을 살린다는 증언이다. 그 복음은 예수와 그의 말씀이다. 그런데 그 복음은 오직 예수와 그의 말씀을 받아 믿게 될 때만 우리에게 복이 되고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이 외쳤던 ‘오직 의인(義人-The Just-여기서 의인이란 복음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맛본 자이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은 완전 타당한 증언이며, 그 말씀을 붙잡고 16세기에 종교개혁을 나팔을 불던 마틴 루터의 외침도 여전히 힘이 있다.
하지만 세 본문은 그 복음을 수용한 자들의 모습과 함께, 그 복음에 등을 지고 살았던 이들과의 모습도 비교해 준다. 복음을 수용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복과 치유과 회복의 복을 주시지만(복음서+서신서), 거부하고 외면한 자들에게는 상하고 터지고 매 맞은 흔적들이 얼마나 처참한가(구약 이사야서)만을 보여 준다. 다만, 이 증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더 우대하거나 이방인이라고 해서 더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일은 전혀 없다. 오히려 자칭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자들의 오만을 더욱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 뿐이다(구약+마8:12참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누가 열린 복음을 수용했고, 누가 거부했느냐만 중요할 뿐이었다.
1. 복음서 / 마8:1-13 / “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본문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그의 권능적인 행위(마8-9장 중심)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음을 전한 내용이다. 이 내용은 마5-7장에서 나타난 예수의 권위 있는 말씀 선포와 함께 그의 하나님 나라가 말씀과 능력과 함께 펼쳐지고 있음을 확인해 준 것이다.
내용을 다르지만, 본문은 예수님의 두 가지 치유(治癒)의 사건들이 소개되었다. 하나는 나병환자의 절박한 요청을 받아서 그의 병을 깨끗하게 하신 일이었고(1-4절), 다른 하나는 로마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절박한 병환을 치유해달라는 간곡한 요청에 따라서, 말씀으로 그의 하인을 고치신 사건이다. 그런데 이 두 내용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들의 뜨거운 믿음이 그런 역사를 불러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마태는 이런 치유의 하나가 유대인 나병환자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또 하나는 이방인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잇달아 밝히면서, 주님의 이런 치유의 은혜는 오직 당신을 향한 믿음에 의하여 성취된 일임을 알리고, 그런 일에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의 문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도 함께 강조한다. 차라리 그 믿음에 따른 구원에 있어서는 그 나라의 본(本) 자손인 유대인들이 더욱 그들의 믿음 없으므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고 경고하셨다(12절).
이런 주님의 경고에 비추어 볼 때(12절), 오늘의 구약의 이사야서 내용은 믿음 없는 본 나라 유대인들의 심판 받았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고, 서신서의 내용은 믿음이 풍성한 이방인 로마교회 성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영광스러운 일들을 입체적으로 대변해 준다. 그 내용을 보자.
1)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서 산에서 내려오던 중, 한 나병환자가 주님께 나아와 절하며 요청했다.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기꺼이 그 요청을 허락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즉시 주의 명령은 실효(實效)를 일으켰다. 곧 그의 나병이 즉시 깨끗하여진 것이다(3절). 이 어찌 가능한 일인가!
2) 이 일은 상식(常識)을 깨고, 주님에 대한 확실하고도 뜨거운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나병환자의 상식은 무엇인가? 그런 사람들 모인 곳에 출입을 금지하고, 자기들 환자들만이 사는 곳에서 따로 살다 죽은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를 알게 되면서, 그런 환자 상식의 틀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었다. 운명에 맡겨 사는 자가 아니라, 운명의 운전자인 예수를 더불어 새 인생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온갖 눈총을 무시하고, 담대히 무리들 숲을 뚫고 들어왔다. 그래서 자기 믿음을 뜨겁게 드러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3) 결국 어떤 삶이 그에게 주어졌나? 즉시 온전한 인생살이가 가능해졌다. 그의 공민권 회복을 위한 주님의 배려도 즉시 전달되었다. 그 방법은 율법에 따라 자신의 회복된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제물도 드리며, 회복자의 입증을 받으라고 권고하셨기 때문이다(4절 참조). 이는 주님이 율법의 내용을 중시하고 계심을 보이신 것이었고, 동시에 이 사람이 그 율법 사회에서의 순조로운 적응과 회복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신 것이었다.
4) 이번에는 주님이 아주 낯선 이의 방문을 받으셨다. 가버나움에 머무실 때, 주님은 그곳의 주둔(駐屯)군인 로마군의 백부장의 방문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찾아온 그는 예수님에게 특별한 간청(懇請)을 하였다. 그것도 자신의 문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 하인의 고통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낮을 자를 향한 이웃 사랑을 보여 준 매우 놀라운 헌신이었다. 또한 그가 자신의 피(被)지배 민족의 신앙 지도자를 사전에 알아보고, 이렇게 직접 찾아온 일은 이 역시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앞의 나병환자와 같은 차원의 용기와 믿음이 절대 필요했다.
5) 그러자 주님은 이때에도 즉시 고쳐 주시려고 하셨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방법상의 문제가 순간 발생했다. 주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하시자, 이 백부장은 적극 만류하면서, ’그저 말씀만(명령만) 하시면 자기 하인이 나을 것이다‘라면서, 군대식 명령만을 내리셔서 해결해 달라고 요청을 드린 것이다(7-9절). 이에 진짜 놀란 이는 바로 예수님이셨다. 주님은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이만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이를 못 보았었기 때문이었다(10절).
6) 신선한 충격에 잠시 휩싸인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내어놓으셨다. 이런 이방인처럼 그의 믿음대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와서 아브라함-이삭-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겠지만, 그러자 정작 아브라함의 혈족이자 본 자손들인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라고 예측하셨다(11-12절). 이는 무슨 말씀인가? 하늘나라는 절대 핏줄이나 전통에 따른 무작정 입성이 아니라, 누구든 불문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만 허락하게 되리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마치 나병환자과 백부장에게 허락된 것처럼 말이다.
7) 주님이 결국 그 백부장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명령을 내리셨다. ’가라 네 믿는 대로 될지어다‘(13절). 그러자 그 주님의 명령은 즉시 집행되었고, 그를 괴롭히던 중풍병이 그에게서 즉시 떠나갔고, 그 하인은 중병에서 치유를 입고 정상인으로 일어났다. 실로 믿음의 대 역사였다.
2. 구약 / 사 1:1-8 / “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떠나서 그 패역함이 깊었는지를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탄식하며 쓴 글이다. 그는 유다 왕 사대에 걸쳐 나라의 왕권과 국정이 얼마나 반신(叛臣)적이고, 패역하고 퇴폐한 집단이 되었는지, 그래서 결국 그들이 어떤 대가를 심판으로 받게 될 것인지를 에언으로 받게 된다. 나중에 그 실재는 이 예고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무자비하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 아모스의 아들이자 선지자인 이사야는 유다 왕 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 시대에 걸쳐 예언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 때 그는 여호와로부터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미래에 관련된 계시였다. 다만 그 백성에게 내린 징벌의 내용들은 그의 활동 말기에 선포된 것으로 보인다.
2)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분노하시면서, 당신이 창조하신 천지를 증인으로 불러놓고 당신의 확고한 예언을 전한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을 자식으로 양육하셨건만 그들은 당신을 거역하였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신다. 곧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였다‘고 규탄하셨다(2-3절).
3) 그렇다면, 그들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배신한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告發)내용은 이러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자식(子息)이라고 두 번이나 지칭하시고 있는데(2,4절), 이는 그만큼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소유권을 있음을 밝히신 것임과, 동시에 부모에게 대드는 중죄인(重罪人)임을 지적하신 내용이다(신21:18-21절). 그들은 자기 주인을 알아보는 가축인 소와 나귀만도 못하게, 부모인 여호와를 알아보지 못하는 불경한 죄를 범했다(3절).
4) 그의 백성들이 매(=징벌)를 맞은 상태는 앗수르 임금인 산헤립이 유다를 황폐하게 하고 예루살렘을 완벽히 에워싸던 주전 701년에 선포된 듯하다(36-37절 참조). 그때의 참혹한 참상에서도 그들은 마치 포도원의 망대같이, 참외밭의 원두막처럼,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살아남은 일은, 그들의 처참했던 모습과 함께 그래도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몰살되지 않도록 지켜주신 것임을 고백한 것이었다(6-8절, 창19:24-25). 이것은 당신의 범죄한 백성에게도 최후의 기회는 주시려 한 것이다. 그러면 그 복음을 수용한 무리들은 어떤 은혜를 받게 되나?
3. 서신서 / 롬1:8-17 / “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본문은 로마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서로서,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온 세상에 전파된 일에 대하여 그곳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하는 마음과, 이제는 자신이 직접 그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싶고, 또 신령한 은사를 더욱 그들과 나누면서 보다 풍성한 열매들을 안겨 주고 싶어 하는 간절한 기도가 담겨 있다(8-13절).
여기에서 바울은 그들을 보고 싶어하는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전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파할 사명자로서의 자신이 세상 모든 자들에게 ’빚진 자‘(debtor)라고 자각하고 있음을 드러낸다(14-15절). 그만큼 그는 로마교회에도 자신은 반드시 가야만 할 마음의 소명과 영적 부채(負債)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그만큼 그는 로마교회를 사랑하고 있고, 성도들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그는 복음을 향한 자신의 입장을 선명히 밝혔다. 이는 바울의 역사적인 복음에 관한 선언(宣言)이었다. 나중에는 독일의 M,루터가 이 구절을 붙잡고 종교개혁을 견인하기도 했다.
첫째는 자신은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救援)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16절). 둘째는 복음은 하나님의 의(義)를 드러내는 도구로 보았다. 하나님은 복음이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참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분으로 본 것이다(17절). 그것도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그 복음이 전승되고 생명을 드러낸다고 본 것이다(from faith to faith). 그러기에 오직 의인(義人-the righteous, the just)은 –옛 선지 하박국이 외쳤던 바 그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17절,하, 합2:4참조).
o 그렇다. 오직 의인인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복음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만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며 사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등지고 그의 말씀을 배신해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저 사도 바울처럼 복음의 입장과 우리의 믿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들임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저 나병환자와 같아야 하고, 저 로마 백부장의 믿음과 같아야 한다. 오직 예수만이 내 삶의 해답이심을 선언하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