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계 11:15~19, 눅 22:24-30, 사32:1-4, 16-18
강림 후 여덟째 주일이다. 이런 인사를 드린다. ‘금주 한 주간 잘 보내셨는가?’ 우리는 지금 비의 계절을 보내는 중이다. 그것도 장맛비 정도가 아니라 호우 내지 물 폭탄 수준의 엄청난 비를 경험하는 중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충북 오송에서의 지하도 참사를 비롯한 뜻하지 아니한 수많은 생명들을 잃었고, 토사 붕괴나 하천과 도로 유실, 그리고 엄청난 폭우로 인한 농지 침수로 인한 피해 등등---, 실로 기후와 환경 재앙들을 총체적으로 경험하였다.
결국 인간은 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정말 별수 없는 존재란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한 치 앞도 못 보고 살다가, 갑자기 밀려 들어온 물살 앞에서 허망하게 휩쓸려 떠나가는 모습에 허망함을 금할 수 없다. 자연의 조그만 분노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본다. 그러면서 머잖아 그 거대한 자연을 창조하신 저 원대한 조물주를 만날 때의 우리는 과연 어떨까 싶은 생각에-, 할 말을 잃게 된다. 그러기에 이런 인간의 허망한 실존을 깨달은 시인의 시104:29-29의 말씀을 소개드린다 - “주께서 주신 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낮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
실로 원대하고 절대자인 조물주께서 이런 미미하기 그지없는 존재인 나를 기억하신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놀라움이 아닐까 싶다. 그 분의 기억은 마치 우리 주변에 흩어진 수 많은 나무들과 거기에 매달린 잎사귀들과 가지들---, 그런 것들에 대한 하나하나의 기억들을 하고 계시고, 또 세고 계신다는 것과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우리의 실존(實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역시 두 가지 차원의 인식을 항상 하고 살아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나란 존재를 가능하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생각을 깊이 하고 사는 일이다. 이것은 바로 자식이 자기를 낳아 준 부모와 조상에 대한 생각을 항상 하고 지내는 일과 같다. 또 하나는 그 조상에게서 함께 지음을 받아, 더불어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인식이다. 바로 이웃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사는 일이다.
사실 우리의 구원은 이 둘의 균형과 조화 속에서 찾게 된다. 건강한 가정과 가족을 보라. 그들은 모두 부모님께 공경하고, 형제자매와 화목하다. 이 둘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불행한 가족을 보라. 이 둘이 모두 파괴되어 있거나, 아니면 모두가 상처투성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다. 그리고 이웃 사랑(형제자매 사랑)에도 건강하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의 특징은 ‘行惡하는 자들’에 있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눅13:27참조).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군가? 바로 이 질서,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이다. 부모 공경과 형제자매 사랑의 질서를 무시하고 사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기 편의를 위하여 그 사랑의 질서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곧 ‘넓은 문’(제 마음대로)으로 출입하며 산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심판을 당했다.
잊지 마시라. 우리 행악의 대부분은 하나님 공경에 대한 부분에서보다는, 이웃과 형제자매들을 향한 데에서 초래된 것이다. 생각해보라. 아주 막되지 않고서는 대부분 부모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는 감당하는 편이다. 하지만 형제자매를 향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타산적이며, 경쟁이다. 그러기에 겸손하고 낮아지고 자기를 상당히 포기하고 양보하고 살아야 가능한 것이 이웃 사랑이다. 그렇다. 이웃 사랑의 영역은 우리가 평생, 긴장하며 실천해야 할 영역이라는 점을 가슴에 깊이 명심해야 한다.
마침 성령강림 후 여덟째 주일을 맞이한 오늘은 우리의 이웃을 향한 영적 질서에서 보다 성실히 지켜야 할 부분을 깊이 언급해 준다. 바로 섬김(serving)이다. 이는 특히 성령 받은 성도들이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갖추고 살아야 햘 영적 품격(品格)의 문제이기도 하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고민할 것 없겠지만, 그러나 하늘 아버지를 둔 우리들에게는 꼭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햘 신앙 인격의 주제가 바로 섬김이다. 섬김이 왜 중요한가? 그 속에는 공의와 정의가 밑받침된 리더십이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맛보기를 원하는 평화가 있고, 안전이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섬김을 통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리더십을 보여 준 이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는 그런 섬김의 리더십으로 온 세상을 구원해내실 분을 아주 오래전에 예고하였다. 그리고 그가 안겨주실 리더십의 열매들이 영원한 평안과 안전임도 예고하였다. 복음서에서는 그 섬김의 리더십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이인 예수의 모습을 전한다. 계시록에서는 그의 영원한 섬김의 품속에 살게 된 자들과 심판당할 자들을 전하고, 그가 여실 영원한 나라의 모습에 대한 약속들도 제공한다.
1. 복음서 / 눅22:24-30 / “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본문은 제자들 사이에서의 서열 다툼이 있었음을 엿보게 해주는 내용이다. 동시에 초대교회 안에서의 서열 경쟁도 있었고, 그에 대한 주님의 경고와 교훈이 올라와 있다. 그것도 주님께서 성만찬을 베푸신 이후였고, 제자 중에 가룟 유다의 배신도 예고된 직후에 발생한 것이어서, 더욱 이 서열 논쟁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은 그 의미가 컸다.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한 제자들같이 보였지만, 그래도 주님은 그들에게 불후의 교훈을 전하신다. 답답한 지금을 보셔서가 아니라, 희망의 내일을 열려고 그러하셨다.
1) 제자들이 이 절박한 시점에서 서열 논쟁을 한 일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상황을 보니, 주님이 우리 곁을 떠나실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남은 자기 동아리를 누가 이끌어갈 것이냐’는 점에서라고 보인다. 주님은 분명히 시몬 베드로를 향한 암시는 하셨지만(마16:16이하), 그렇다고 확증적인 지명이 없었기에, 결국은 자기들 사이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인물을 선정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취지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2) 결국 제자들 사이에서 리더십 선출을 향한 경쟁을 해야 한다면, 문제는 누구냐가 중요한 일이었다. 이럴 땐 자연히 서로 간의 긴장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경쟁자가 나오면, 더욱 치열해지고 낯도 붉힐 수 있고, 서로 간에 마음이 불편해질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엔 분열도 가능해진다. 이때, 주님이 그런 형편을 감안하시면서 개입하셨다. 문제는 누구냐가 아니라,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냐에 주의 말씀이 집중되었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리더십이 필요한가에 대한 차원을 제시하셨다.
3)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누구냐에 집중하다가, 어떤 인물이냐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대통령 된 자의 경우가 그렇다. 국민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느냐를 조금만 생각했어도, 지금과 같은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국가관, 민족관, 소명관, 그리고 청지기관 등을 놓고 보다 깊이 고민만 했어도, 지금과 같은 최악의 수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4) 국가든, 교회든 마찬가지이다. 사람됨을 가볍게 보았다가, 큰 낭패를 보게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이 제자들의 시야를 바로 그 점으로 집중하도록, 이끄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보자. 주께서 어떤 유형의 리더십을 선호하셨는가? 어떤 리더십이 당신의 제자 동아리를 충돌 없이 이끌어갈 것으로 보셨는가? 그 점에서, 주님은 세상 일반의 시각과는 크게 달랐다.
5) 가장 필요한 최고의 지도력은 이거였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26절). 세상에서 큰 자는 누군가? 권력자, 지위 높은 자, 어른, 전문가, 고참들이다. 젊은 자나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아니다. 그런데 주님은 큰 자를 ‘가장 어린 사람과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표준새번역). 이는 그의 인격과 활동하는 자세를 놓고 평가한 것이다. 항상 낮은 마음으로 배우려 하고 섬기려 하며 협력하려는 젊고 건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며, 집사가 되어야 한다고 보셨다.
6) 특히 주님은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고 지적하셨다. 우리 교회는 규모는 작아도 섬기는 자들이 많아서 큰 교회랄 수 있다. 주일 아침 일찍이 교회 안팎의 청소하는 장로, 교회 내부를 청소하는 제직들, 주일예배 후의 식사 봉사에 헌신하는 교우들, 헌금과 이웃 돕기와 꽃꽂이 봉사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는 이들이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있다. 이런 소중한 전통이 우리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까지 묵묵히 전승되게 해야 할 것이다.
7) 주님의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제자 동아리의 식탁 유지하기 위하여, 주님은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하신 말씀이다(27절). ‘어떻게 섬기셨을까’라는 점이 궁금하다. 주석가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의 식탁 봉사를 자주 떠맡으셨을 것이다. 부엌일, 식탁일, 청소하는 일도 함께하셨다고 본다. 이 점은 유대교의 지도자들과의 차별을 확실히 하신 것이다. 말(지도)만 하고 행함이 없는 그들과, 주님은 차원이 달랐음을 말한다. 주님의 이런 말씀과 함께 행동으로 섬기는 모습은 제자들의 삶과 교회에서 커다란 영향을 안겨주었다. 기독교가 왜 디아코니아(섬김)의 종교가 되었는지를 알게 한 밑거름이 된다(28-30절).
2. 구약 / 사 32:1-4, 16-18 / “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
본문은 왕으로 오신 분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그의 신하들인 방백들은 정의로 다스리는 일이, 왕의 왕이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확증해주신 예언이기도 하다. 다만 본문에서는 왜 섬기는 리더십이 세상과 만민에게 공의와 정의로 나타나는 것인지를 밝혀주고 있으며, 동시에 그 통치를 받게 될 때의 세상과 인간들은 어떤 아름다운 환경과 복을 누리게 되는 지도 밝혀주기도 한다.
1) 예수의 섬김은 가장 낮은 곳을 품는 일이었고, 가장 악한 죄인도 이해와 용서의 품으로 품는 섬김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섬김은 언제나 모든 자식들을 부모들이 하나의 사랑으로 품듯 하는 것이어서, 그 누구도 이의와 거부로 맞설 수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운 공의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제자들이나 교회들은 그의 리더십을 본받아 세상과 인간을 섬긴다. 그러기에 오직 취할 것은 예수의 말씀과 판단만을 정의로 드러낼 뿐이다. 따르면 정의를 드러내고, 거부하면 불의만 저지를 뿐이다(1절).
2) 그가 베푸시는 섬김을 좇으면, 그는 누구나 세상에서 맛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안전과 평화와 통찰력과 지혜와 지식을 얻어 누리게 된다(2-4절). 한마디로, 그 섬김의 능력은 모든 상대방을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하고, 무지와 편견에서 자유하게 하며, 고독과 외로움으로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한다. 한 마리도, 하나님 나라의 향기와 맛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2-4절, 16-18절 참조). 그러면, 이 섬김이 하늘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보자.
3. 계시록 / 11:15-19 / ”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되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
본문은 세상 최후의 때 펼쳐질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의 현장의 모습을 예고하는 계시록의 증언이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 주는 마지막 심판의 나팔이다. 그 때에 나타날 놀라운 일들이 몇 가지 차원으로 소개되고 있다.
1) 세상 나라가 우리 주의 나라로 흡수 통합되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주님이 그곳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신다(15절). 이런 놀라운 현상은 지난 주일의 계시록 21:1-2절의 내용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하늘 왕국에서의 그리스도의 왕 취임식이 24장로들의 뜨거운 경배와 찬양 속에서 거행된다. 그들의 고백 속에서는 취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관한 선언과 함께 땅의 처음 것들이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는 장면에 소개된다(16-18절).
2) 당연히 반항과 항거하는 민족들의 최후의 몸부림도 보인다. 하지만 그들 위에는 오직 주님의 분노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것으로 나온다(18절,상). 특히 ’죽은 자‘가 심판받는다는 말이 놀랍다. 이것은 인간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내용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두려운 증언인가! 심판자를 피할 자는 아무도 없음을 말한 것이다. 심판에도 두 가지이다. 멸망 받는 것과 상(賞)받는 일이다. 선지자들-성도들-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은 모두 상을 받는다. 저들은 섬기는 주님의 은혜를 좇아, 평생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아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멸망은 누가 당하는가? 섬김이 아니라, 지배와 탐욕과 차별로 교만하게 이기적으로 군림과 착취로 살아온 자들이다. 그들은 하늘 성전과 하나님의 임재가 계신 곳에는 제외당한 자들이다(19절).
4) 특히 ’땅을 망하게 한 자들을 멸망시키신다‘(18절,하)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이는 어떤 행태로 산 자들일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과 인간을 자기 탐욕과 욕망과 그릇된 가치관과 어긋한 길로 인도하여, 전쟁과 가난과 파괴와 질병과 해체로 지구촌을 망가뜨린 자들을 말한다. 섬김의 도(道)와는 등을 지고, 탐욕과 정복과 거짓으로 온 질서를 해체한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주 단호히 멸망시키리라고 하셨다. 사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O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섬기는 인격체로 살자. 그러면 그는 이 세상도 이끌며 사는 자가 된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결국 세상을 망하게 하는 자가 되고야 만다. 그러면 냉혹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깨어 살자.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섬기셨다. 섬김은 분명 좁은 문이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섬기는 삶을 통하여 예수의 나라로 영접받게 되고, 영원히 위로와 상급을 받아서 살게 된다면, 이 어찌 이 분명한 축복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