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 2:37~47, 눅 12:8-12, 민11:24-29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이다. 시기적으로는 6월의 첫 주일인데, 여름철이 본격화된 시점이기도 하다. 여름은 겨울은 물론 봄과도 완연히 다르다. 벌써 더위를 느끼게 할뿐더러, 멀리에서는 벌써 태풍이야기가 들려오고, 기상이변을 예고하는 소리까지도 들린다. 급변할 환경에 대처할 준비가 요청된다. 최근에는 일본 후꾸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와 일본 해산물의 수입 문제로 우리나라가 요동하고 있다. 수입 해산물은 안 먹으면 될지 모르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해양 생명과 생태계가 크게 망가져서 그 악영향을 받게 될 우리들의 생명 문제이다.
실로 기도할 일들이 태산이다. 국민보다는 미일중심주의에 빠져 사는 현 정권의 막무가내 정책에 따른 우리나라의 고립화 문제, 무엇보다도 악화되는 남북 동족문제로 인하여 언제 다시 동족 전쟁이 발발할 지도 모르는 문제, 정치 실종문제, 게다가 태양광, 풍력, 수력 발전 등을 이용한 RE100 중심의 재생에너지 사용을 통한 세계의 친환경 정책과는 담을 쌓고, 오직 사양산업인 원자력중심의 경제 성장만을 고집하는 현 정권의 문제 등등, 기도할 일들이 참 많다.
이런 중에 맞이한 성령강림절이고 환경주일이다. 따라서 지금은 세상의 물리적 환경에 대한 거론 보다는 우리 인류의 삶의 원천인 영적 환경 문제를 오늘의 말씀에서 먼저 찾아보게 된다. 분명한 것은 이 둘은 서로 무관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성령은 항상 사람을 변화시켜서, 삶의 환경도 변화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먼저 사람이 변하도록 성령이 거룩한 혁명을 주도하시고, 거기에 필요한 사람들을 찾으셔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지난 주일인 오순절에는 이 땅에 강림하셔서 120여명의 예수의 사람들을 충만하게 하신 성령이, 그 직후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집중적으로 찾고 부르셔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큰 뜻이 그들에게 있음을 전하여 주셨다. 그 바람에 예상치 않게 성령의 압도적인 태클을 받게 된 디아스포라들은 너무 큰 쇼크와 새로운 영적 압박 속에서 자신의 마음과 머리를 새롭게 둘 곳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성령께서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새 구원의 역사를 펼치도록 그들을 교회 공동체란 새로운 영적 환경(環境)속에 이끌어 들이셨다.
그 뿐 아니다. 본토 유대인들과 그곳의 예루살렘 사람들도 이 성령의 새로운 도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접근해왔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와 동료 11사도들 전원이, 그들을 상대로 하여, 성령 강림의 배경을 알리고(16-21절),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도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일이었으며, 성령도 아버지께로부터 아들인 예수께서 받아서 이렇게 보내주신 일임을 밝혀 주었다(31-33절).
이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그들이 십자가에 죽였던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그들의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밝힌 것이었다(36절). 이런 사도들의 증언과 성령의 강한 역사가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자 그들은 더 이상 마음을 완고하게 갖을 수 없었고, 오히려 마음에 찔림을 받게 되면서, 사도들에게 물었다 -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절). 정말 새로운 영적 환경이 그들 신앙에 형성되어진 것이다. 예수와 복음 아래 그들은 서로 하나 되었다.
1. 서신서 / 행2:37-47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신도의 수가 삼천이 더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회개 운동은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몰고 왔다. 그들의 질문에 베드로가 제공한 대답이 바로 그들이 밀고 들어올 출구가 된 것이다. 바로 ‘회개(悔改)하고 세례(洗禮)를 받아서 죄 용서(容恕)함부터 받으라. 그러하면 성령(聖靈)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38절)였다. 이는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믿게 된 모든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두가 다 거쳐야만 할 구원의 코스가 된 영적 질서였다. 곧 새로운 생명의 구원질서가 등장했다.
이 새 질서의 대열에 참여한 자들이 급속히 결집했다. 그 날에만 무려 3,000여명이나 되었다(41절). 그 후도 계속 개심한 유대교도들이 몰려왔음이 분명하다. 이는 공고한 율법종교의 틀에 대 파열이 생긴 대지진과 같았다. 그 때의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주민이 대략 10만 여명 정도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이들의 이러한 예수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새 물결의 파장은 그 낡고 묵은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발칵 뒤집어 놓는 판세를 이룬 것이 분명했다!
이는 예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22)라고 외치셨던 그 일이 현실화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도시인 예루살렘이 비로소 율법이 아닌 예수와 그의 복음에 의해서 새로운 구원의 시발점으로 정립되는 순간도 되었다. 바로 세계 교회의 모태 교회가 그곳에 세워지면서, 그 역사적인 첫 출발의 깃발이 올리어졌다. 하늘과 땅의 모든 시선들이 그곳에 몰렸다(47절 참조). 이제 그 구체적인 당시의 모습을 복기해 본다.
1) 베드로는 그 세대를 ‘패역(悖逆)한 세대’로 규정했다(40절). 이는 그곳 예루살렘의 문화나 정신세계가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스린 세대였다는 말이었다. 당시의 율법주의에 쪄들어 있는 유대교의 환경이 패역하였다는 판단이었다. 이는 그런 그들이었기에,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를 몰라보고 천하의 이단자로 매도하여서 십자가에 죽게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에 문화와 정신세계에 머물고 있으면 누구나 함께 망하게 되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 세대에서 빠져 나와서 구원(救援)을 받으라고 외쳤던 것이다.
2) 그러면 빠져 나온 이들이 들어가야 할 신선(新鮮)한 세계는 어디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곳으로 들어가게 되는가? 그 점에서도 베드로의 가리키는 손가락은 확실했다. 바로 나사렛 예수, 그들이 알지 못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내신 그 예수였다. 그들에게 그 예수는 더 이상 민족의 파멸자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자임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일이었다. 실로 완전한 대 방향전환(方向轉換)이었다. 이게 회개의 참 모습이었다(3:17참조)
3) 이런 대전환의 표지(標識)도 반드시 필요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게 된 물세례(洗禮)였다. 이는 자신들이 죽였던 예수에 의하여 이제 자신들이 새롭게 출발했음을 시인 받게 된 증표였다. 그러기에 이 물세례 과정은 모든 구원 받을 자들의 절대 필수코스가 되었다. 어린 양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죄의 사람이 죽고, 그 예수와 함께 의의 사람으로 다시 살아났음을 상징하는 물세례였기에, 더욱 모든 사람들은 이 물세례에 참여해야만 했다. 이런 새 질서에 참여하면 그에게는 사죄의 은혜가 임하고 성령의 선물도 받게 된다(38절).
4) 베드로는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될 대상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말했다. 한마디로, 무제한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 대상이다. 곧 자신들이 외치는 이 이 증언을 받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먼 데 있는 사람들 전체까지도(해외 디아수포라 포함) 다 포함되었다. (행10-11정, 13:46,22:21,엡2:17참조). 유대인은 물론, 헬라인 로마인 등 세계 만민 모두를 포함한 것이다. 예수와 복음의 세계화 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친 담대한 선포였다.
5) 당시엔 도저히 들어볼 수 없는 성령과 복음의 활짝 열린 구원의 문이었다. 그러자 흥분과 설렘과 기쁨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그물 속으로 몰려 들어왔다. 그 날만도 3,000명 이상이나 되었다. 실로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적 성장이었다(41,47절,4:4,5:14,6:7 참조).
6)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聖徒)의 모임,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체가 등장했다. 교회 공동체가 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더욱 결집하여, 예수와 그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생활하고자 하는 운동들이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질서가 수립된 것이다. 크게 보면 네 가지 차원의 것들이었다. 지금의 교회들도 그대로 준수하는 틀이다.
① 성전에 모임(community)을 계속 갖기 시작하였다(46절). 그것도 날마다 모였다. 모임은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모든 일의 필수이다. 모임이 무너지면 그 어떤 새 일을 기대할 수 없다.
②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42절). 그들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삶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 그 삶을 배우고 익하며 살도록 안내하고 독려하는 목자들의 사역을 감당했다. 최우선적 사역이다
③ 예수의 삶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을 지속했고,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42,46절). 성만찬은 먹는 말씀이었으며,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통로이고 성령의 운행하신 통로였다.
④ 성도의 교제(fellowship)를 이루었다. 여기에서는 나눔과 섬김(diaconia)을 통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천국 생활을 실천했다(44-45절), 모이면 먼저 사랑부터 시작했다.
7) 이런 원시교회의 모습은 하늘의 기적들이 잇달았다. 사람들이 두려워하였고, 사도들의 사역에는 기사와 표적들이 많이 나타났으며, 온 백성들의 칭송이 잇 달았고, 믿는 자들도 날마다 계속됐다(43,47절). 이런 처음 교회의 모습들은 지금까지도 모든 교회들의 본보기가 되어왔다.
2. 복음서 / 눅 12:8-12 /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나를 부인하는 자는 부인을 당하리라 ”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예고하시면서, 그 때에 당신으로부터 인정(시인-是認))을 받을 자와 부인(否認)을 당할 자들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다(8-9절). 그러면 그 때에 인자(人子)인 예수로부터(10절) 누가 시인을 받을 것이고 누가 부인을 당할 것인가? 그 기준은 바로 그 사람이 예수에게 어떻게 대하였는가가 기준이 될 것으로 보셨다. 곧 예수만이 심판의 척도라는 것이다. 이는 자기 삶을 예수에게 맞추고 살았느냐, 무시하고 살았느냐에 따른 것으로 척도를 삼겠다는 것이었다. 세계 심판의 중심이 예수가 되셨음을 고하신 거다
여기에서 저자 누가는 인간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 예수에 대한 오해와 이해 미숙으로 그를 부인하게 되는 자들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말을 한다. 이는 인간의 이해의 한계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에, 용서의 여지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점은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할 때, 그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해서 그랬으니, 회개하고 이제라도 예수를 믿으라고 요구한 내용과 연계된 것이다(행3:17-19참조).
하지만, 성령이 오셔서 명백하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신 이후에는 더 이상 유대인들이 신성 모독하듯 예수의 주되심을 부정하면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10절). 그런 점에서 베드로의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한 설교는 그곳 유대인들을 향한 마지막 기회요 최후통첩과도 같았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성령의 초대를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 바람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마음을 열고 회개하면서 주께 돌아왔다(행2:41,47참조).
저자 누가는 여기에서 예수에 대한 성령의 독특한 고백에 대하여 언급한다. 예수 때문에 박해받고 체포되어 재판정에 서게 될 때에는 그 앞에서 무슨 대답할 것인가에 대하여 사전에 염려하지 말라는 권고를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관하여서는 성령께서 곧장 대응할 수 있도록 지시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1-12절). 이게 어찌 가능한가? 성령이 바로 예수의 영이시고, 그를 받은 자들에게는 항상 예수에 대하여 알려주실 분이기 때문이다.
3. 구약 / 민 11:24-29 / “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본문에서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60만 명인 백성들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라는 말씀을 주신 일에 대하여, 그 말씀을 받들기 위하여, 모세가 백성의 지도자들인 장로 70인을 모아서 장막을 둘러 세우자, 그때 일어난 사건을 전한 내용이다. 그 때 여호와께서는 강림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주실 영을 그 70인 장로들에게도 임하게 하신 것이다. 그 일로 이들은 황홀경 속에 빠지면서 예언들을 하였다.
그런데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장로들인 엘닷과 메닷이 그 모임에 빠져서 진중에 있었는 데에도, 그들도 그곳 진중에서도 영을 받았고 예언도 한 것이다. 이 사실을 파악한 보좌관인 여호수아는 이 사실을 모세에게 보고하면서, 이렇게 요청했다.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24-28절). 여호수아는 그 귀한 주의 영이 그곳 모임에 응하지 아니한 장로들에게까지 공히 함께 임하고 혜택을 누리게 하는 일이 공정에 문제가 된다고 본 것이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영이 장로들 같은 70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도 다 주셔서, 그들도 모두 선지자가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응답하였다. 이는 특별하고도 은혜로운 시각이다. 당시에는 성령이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 같은 지도자급에게만 내리셨는데, 그게 오히려 특권의식처럼 인지되었다. 모세는 그보다는 훨씬 더 실질적이었다. 그가 받아본 성령은 모든 백성들이 함께 받고 모두가 다 선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본 것이다. 결국 모세의 그런 바램은 요엘 예언을 경유하면서, 오순절 베드로 사도의 선포 속에서 실현되었고(행2:39), 예수와 복음의 세계화 시대를 열려는 성령의 목적에 따라서 성취가 되었다.
o 오늘의 말씀 속에서의 성령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와 세례를 받고 용서의 은혜를 입게 된 자들에게 확인해 주시려고 임하시는 영이셨다. 이 점에서 모든 믿는 자들은 이 성령의 인침을 반드시 받아야만 된다. 성령은 예수의 영이시지만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영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입술과 마음의 시인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는 바울의 증언은 참되다. 예수 중심의 삶을 확실히 선택해야만 한다. 동시에 이런 영이 나만이 아닌, 모든 만민들에게도 부여된 세상이 열리도록 최선을 다하는 성령의 증언자들이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