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문) 요 21:15~19, 렘 23:1-4, 벧전 5:1-11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다. 완연한 오월이 되고, 코로나 이후의 가정의 달이라서 바깥 활동들은 비교적 활기차다. 하지만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하고 침침하다. 위정자의 입에서 국민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는 말은 들을 수 없고, 계속 핵전쟁에 대비한 전쟁과 무력 충돌에 대응하기 위한 주변 강대국과의 동맹 강화 이야기만 가득하고, 그 바람에 국가 경제는 끝없이 나락에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뭐 하나 꿈과 희망을 줄만한 반가운 소식이 사라진 상태이다.
위기가 가중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집안에서도 가장이 계속 부정적이고 폭력적이며 편향적인 태도를 보일 때, 그 가정은 어떻게 될까? 힘들어하다가 결국은 파탄이 나지 않겠는가? 국가 대통령이나 위정자는, 성경적 표현을 빌면,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牧者)이다. 그런 목자가 국민들과는 동떨어진 이웃 강대국에 앞잡이처럼 행세하면서, 국민들의 자존심이나 의견들은 아예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니-, 이 어찌 잘되는 집안이나 국가랄 수 있으랴-!
이 정권이 지속되는 한, 평화의 시대는 부재할 듯싶다. 그가 남발하는 ‘자유’는, 자제력, 통제력, 소통이 없는 독단적 자유다. 민주주의 것이 아니다. 독재와 만용에만 있을 자유일 뿐이다. 아무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한 진지한 노력은 기대할 수 없을 듯하다. 두렵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건가! 검사 권력으로 비판자들의 입을 막고, 언론의 침묵과 지지를 강요하며, 맹신적 우파세력들을 방패로 삼고, 오직 미국 일본의 이익만을 대변하며 막무가내로 계속 나아갈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나? 그가 임기를 채운다면, 그 때의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끔직하다. ‘마라나타’만 외치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심정으로 이 희망의 오월을 맞이해야 하겠다. 마침 오늘은 어린이-청소년주일이고, 총회가 제정한 교회교육주일이다. 모두 미래 세대를 위한 주일이다. 사실 이 어린 세대와 젊은 세대를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짠하다. 인구절벽 시대에 접어들면서, 나라의 인구구조가 역(逆)피라밋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라는 아이들이 어른 되었을 때, 그들이 노인 중심의 국민들을 위하여 감당할 무게는 너무도 엄청날 것이기에, 감당하기 무척 힘들 것이 뻔하다.
그래도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주역들을 생산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규격품으로 잘 키워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고 돌볼 시대의 목자가 될 인물들을 생산하는 일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애굽 바로의 통치 아래서 430여년을 신음하면서도, 모세가 등장하자 그 저주의 고리가 끊어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의 인물 생산은 소명자와 목자를 키워내는 일이 집중해야만 한다. 이 인물들은 교회의 성직자나 선교사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세상 분야의 소명을 품은 일꾼들을 포괄한다.
인물을 양육하고 세우는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께도 아주 중요한 과제였다. 복음서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직접 찾아가셔서, 당신을 향한 그들의 분명한 사랑을 확인하시고 예전의 과오의 상처들도 치유해 주신 후,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들을 목양할 권세도 부여하셨다. 이는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그의 모든 백성들을 목양할 공적 직임을 부여받은 것이다.
구약 예언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치리하는 정치적 왕(王)들을 목자로 간주하시고, 그들 중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잘 돌보지 못하고 세계로 흩어버리고 쫓아버린 악한 목자들에 대하여 진노하셨다. 그러면서 그렇게 흩어진 양 떼를 당신이 돌아오게 하셔서, 그들을 기르도록 그들 위에 목자들을 세우시겠다고 예고하시기도 하였다. 이 점에서 왕 다윗은 하나님 잣대에 들어맞는 아주 훌륭한 모범이었다(겔34:23-24, 행13:22참조).
서신서는 사도가 된 베드로는 교회 양무리의 지도자들이 된 이들과 그의 지도를 받는 성도들 모두에게 필요한 행동 지침을 제시한다. 목자들은 다시 오실 목자장(牧者長)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에게 받아낼 영광의 관을 얻도록 필요한 마음가짐들을 주문한다(1-4절). 아울러 성도들 역시 겸손과 순종으로 목자에 응답하여 주님의 주실 은혜를 받도록 하라고 권한다. 특히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마귀에 대처하여서 세상 박해에서도 승리할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주님이 마련하신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라고 지시한다(5-11절).
1. 복음서 / 요 21:15-19 /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외다-- 내 양을 치라 ”
본문은 지난 주일에 소개된 제자들을 찾으신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단과의 만남의 후속편이다. 지난번에는 집단을 다시 품으신 주님이셨다면, 이번에는 그들 중에서 리더(지도자)를 공식적으로 세우셔서 그로 하여금 당신을 대변하면서 그의 백성들을 이끌도록 하시는 작업을 하신다. 이런 장면은 마치 요즈음 목사나 장로의 임직이나 성직의 직임을 부여하는 예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사용할 성서적 자료가 된다.
1) 그때의 주님의 시선은 시몬 베드로에게 집중하고 계셨다. 그는 얼마 전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불후의 신앙고백을 통하여(마16:16), 예수님으로부터 그를 당신의 교회의 지도력을 펼칠 수 있는 압도적인 피택을 받은 바가 있었으나(마16:18-19참조), 동시에 그는 아주 수치스러운 상처도 함께 안고 있었다. 체포당한 예수를 자기는 모른다고 무려 세 번이나 부인했었기 때문이다(요18:15-27참조).
2) 하지만 주님은 잘 알고 계셨다.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를 싫어서거나 깎아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두렵고 살고 싶은 공포심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아셨다. 그럼에도 베드로 자신에게는 그런 자기를 스스로 구원시킬 능력이 없었다. 당하신 예수께서 그를 다시 품에 안아주셔야만 회복이 가능한 일이었다. 마침 주님의 품성은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고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 분’이 아니시던가!(시145:14). 그래서 주님은 그를 찾으시면서, 그의 회복과 출발을 이끄셨다.
3) 특효약은 주님과 베드로 사이의 사랑 관계를 복원(復元)시키는 일이었다. 마치 질의응답식으로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계속해서 물으셨다. 베드로 역시 진심을 다하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라며 세 번 응답하였다(15-17절). 이런 방식으로 베드로는 세 번의 예수 부인의 부끄러운 흔적에서 벗어나면서, 새로운 차원의 출발을 할 수가 있었다. 그 새 출발은 무엇인가? 두 가지를 분부하셨다. 하나는 ‘내 양을 먹이라’였고, 또 하나는 ‘나를 따르라’(19절)였다. 여기에는 다음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
4) 첫째는 주님이 앞에서 말씀하셨던, 당신의 교회(마16:18)와 그 교회에 모인 당신의 양무리들을 돌보게 되는 목양권(牧羊權)을 정식으로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부여하신 일이다. 이는 예수 이후의 교회(敎會)시대의 개막을 정식으로 공포하신 일이었고, 거기에 걸 맞는 목회활동도 허락하셨음을 밝히신 것이었다. 이제부터의 직분자의 삶은 그 멍에를 매고 죽고 사는 것이다.
둘째는 그 교회 목회 및 목양의 핵심고리는 바로 그 교회와 양무리의 주인 되신 주님을 목회자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이다. 주의 사랑의 힘이 역동할 때에만 비로소, 교회도 살게 되고 목양도 가능함을 일깨우신 것이다. 다른 왕도(王道)는 없다. 만일 이 주님 사랑 부분에서 실패하면, 그의 목회는 소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업인으로 처신한 것으로 전락한 것이 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나오는 일은 모든 것에 성공한다. 그 사랑을 잃으면 모두를 다 잃는다.
2. 예언서 / 렘23 :1 - 4 / “내 목장의 양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모아 다시 우리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기를 목자들을 세우리니“
본문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에게는 당신의 백성들을 치고 돌보는 당신의 목자(牧者)로 세움 받은 이들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의 정치 아래서 종교권력과 세상권력이 하나로 되어 있었던 나라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 역사에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세상의 풍조를 따라 정치한 불의한 목자(위정자)들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고 양 떼들(백성들)이 강대국의 포로로 잡혀가고 세계 처처로 흩어지기도 했다. 그 사례로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게 망했고,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에게 망하여 무려 70년의 포로생활을 치러야 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에는 그들을 징벌하셨던 의로운 하나님께서 직접 주도하셔서 그들을 포로에서 돌아하게 하시고, 지위의 회복과 함께 번성하게 하시리라는 예언도 있다. 특히 그 회복에 대한 약속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하는 것으로서, 그를 믿고 그에게 속한 성도들은 다시는 버림당하지 않게 되리라는 궁극적인 안전을 약속받기도 하였다.
1) 거짓 목자들의 특징들은 이렇다(1-2절). 자기 직무에 불성실하다(겔34:2-3절). 주인의 양을 돌본다는 소명의식이 투철하지 못하고, 항상 자기 이기적으로 처신한다(사56:11-12). 화합 대신에 항상 상쟁(相爭)하므로서 국가의 기반을 허약하게 하고, 무너지게 한다(창13:7-8). 그 결과로 자신도 망할 뿐만 아니라, 나라도 빼앗기고, 백성들인 양무리는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하거나 세계 처처로 흩어지는 비극에 빠지게 한다(2절).
이는 원래의 목자의 임무들인 ‘잃은 양을 찾는 것’(겔34:12-16, 눅15:4-5참조), ‘양 떼를 보호하는 것’(눅2:8), ‘양 떼를 초장으로 인도하는 것’(대상4:39-41)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들을 취한 까닭이다. 철저하게 목자의 직무를 저버린 것이고, 목자장인 여호와께 징벌을 받도록 처신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옛날 패망했던 어리석었던 이스라엘의 모습과 그 특징들이 21세기 우리 대한민국에서 재현된다면, 우리는 과연 어찌 될가? 대통령이 양들을 돌보고 지켜내기 위해 자강(自强)을 위하거나 평화 구축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국민통합에 힘쓰지 아니하고, 오직 탐욕적인 미국과 회개할 줄 모르는 일본의 옷자락에 매달려, 오직 그들의 보호 아래서만 우리가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강대국 의존만을 고집하는 외교 정책만을 펼치고 있다.
그 바람에 우리 국민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허약한 백성같이 인식하게 되고, 선진국에 속한 국민이요 세계 6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라는 소중한 자존심도 계속 무너뜨리고 있다. 그로 인한 국론분열은 이미 첨예화되었고, 완전히 대립화 되었다. 이런 우리는 과연 어찌될지, 심히 염려된다. 특히 동족인 북한을 원수시하고 계속 거칠게 자극하면서 남북충돌 분위기까지 고조시키고 있다. 그들의 친(親)우방들인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까지 계속 악화시키고 있다. 그에 따라 국가경제상황은 지금 급속히 악화되면서 위기에 들어섰다. 이와 같은 현재 분위기라면,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언제 발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2) 본문은 이런 상황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대처를 소개한다. 그들이 징벌을 깨닫고 돌이킬 때, 스스로 분발하셔서 흩어진 양 떼를 친히 모으시고 돌아와서 생육과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전한다(3-4절). 이 약속은 바벨론이 망하고 고레스의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등장으로 포로된 유대인이 귀환하게 되면서 실현되었다(스2:1-2). 하지만 실질적인 성취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시고, 지금 그 제자들로 인하여 시작될 목양의 시대로서 성취되었다.
3. 서신서 / 벧전 5:1-11) / “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자원함으로 하며 이득을 위해 하지 말고 주장하는 자세가 아닌 양 무리의 본이 되라 ”
당시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은 장로들에 의해서 운영되었음을 말해준다(행14:23,20:17,28참조).
1)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도 장로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고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소개하면서(1절), 그곳 교회 지도자인 장로들에게 직무 수행 지침들을 이렇게 전한다(2-4절).
-목회는 억지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좇는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물질적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명감에 붙들려 일하여야 한다, 성도보다 뛰어난 신앙 인격의 소유자로 본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목자장(長)인 그리스도로부터 시들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야한다(딤후4:8).
2) 사도는 젊은(믿음이 여린)이들에게도 박해와 고난의 때를 잘 대처하도록 권면한다(5-9절). 장로들에게 순종(順從)하고 그의 지도를 겸손(謙遜)으로 받아서, 하나님이 자신을 높여주시는 은혜를 받으라고 권한다. 세상 모든 염려들은 주께 맡기고, 근신하고 깨어 살아야 한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시22:13). 매사에 믿음의 대처가 필요하다.
o 우리는 교회교육주일과 미래세대를 위한 주일을 보낸다. 자녀 생산이 힘겨워진 시대에는 더욱 우리가 낳은 자녀들을 어떤 인물로 키워낼 것인지 에다 관심이 모아져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물 키우기는 기본이다. 그래서 그 사랑과 은혜를 국가와 백성에서, 세상과 교회에게, 집단과 가정들에게 베풀고 심어줄 하나님의 선한 일꾼 목자들이 많이 나오게 해야 한다. 아울러 모든 생명들을 소중히 돌보고 양육할 목양의 영성을 가진 이들을 길러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