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24:13~35, 습 3:14-20, 벧전 1:3-12
부활절 둘째 주일이다. 주변의 자연 공원들이 새롭게 자라난 온갖 초목들로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모른다. 단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는 총천연색의 다양한 꽃들과 풍성한 잎들로 우리네 마음까지도 충만하게 해 준다.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이런 때 맞이하는 부활절기라서 우리는 더욱 치솟는 생명의 기운으로 새 힘을 얻게 된다. 모두가 추위와 동토(凍土)의 억압을 밀쳐내면서 얻어낸 것이라서, 그 기쁨은 깊고 크다.
이럴 때, 우리는 매우 의미 있는 주일을 맞이한다. 한국교회는 오늘을 장애인(障礙人)주일로 맞이한다. 동시에 본 교단에서는 오늘을 4.19혁명 기념주일로도 지킨다. 이외에도 우리는 오늘을 4.16세월호 참사 9주기를 맞이하면서 그 추념(追念)주일로 맞이한다. 마침 오늘이 그 참사 당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한 주일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주일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을까? 그 의미들을 되새겨보면 묶음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다른 주제인 듯하지만, 실상은 모두가 우리의 각성을 요구하는 주일로 통합해서 맞이할 수 있다. 장애인 문제는 물론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이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인권과 사람답게 처우되는 세상을 이루도록 좋은 이웃으로 살자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큰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는 영육간의 장애를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도 보아야한다. 치료가 필요한 존재라는 점에서, 자비를 구하며 겸손과 관용을 구현하면서 살자는 뜻을 구하면 좋다.
4.19혁명기념일도 그렇다. 이는 단순히 1960년도의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정신을 되새김하자는 것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정신을 되찾자는 것이다. 사실 그 때 잠시 들어선 내각제 민주주의는 2년도 못 넘기고 군사 권력을 맞으면서, 오랜 세월 민주주의를 빼앗긴 체 살아왔다. 문제는 지금의 우리 모습이다. 신형 독재국가로 보이는 검찰독재국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검찰이 입법, 사법, 행정권 모두를 통제하면서, 지금의 우리나라를 완전히 억압하고 있다.
그 바람에 힘에 의한 언론 통제가 강화되었고, 정치는 실종되었으며, 외교가 무너졌고, 경제가 몰락중이며, 국론의 양극화되었고, 특히 미국과 일본이란 제국들의 옷자락에 매달리는 바람에, 남북관계는 파탄지경에 들어서서 언제 또다시 동족(同族)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나라의 민주주의가 실종될 위기에 처했다는 점에서, 오늘의 이 4.19혁명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제대로 된 민주국가를 되찾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하겠다.
이런 중에 우리는 잊을 수 없는 4.16세월호 참사일도 맞이한다. 그 날 304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진도 앞바다 맹골에 수장된 이후, 우리는 여태껏 그 진상규명도 못한 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작년 말에 있었던 이태원의 159명의 참사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그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도 제대로 못한 체, 지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이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북한의 공작이나 사주를 받아서 그런다’는 등의 이념 공세로 역공까지 하는 형편이다.
참 비참하고 부끄럽다. 언제까지 우리는 자주적(自主的)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진 참 민주주의 국가를 이룰 것인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내부의 적들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매사를 좌우로 갈라 치려는 분단 이념(理念)의 칼날들을 버려야 한다. 또 하나는 주변의 강대국들을 맹신하고 의존하는 태도들도 버려야 한다. 저들이 우리를 구원해주리라고 매달리는 일은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주 미워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우리 내부의 두 가지 그릇된 태도를 포기하거나 벗어나게 되면, 우리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그만큼 성장하고 성숙한 국민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정치가들이 허탄한 데 뜻을 두고, 국민들의 표를 얻기 위하여 그런 못된 짓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또 우리 국민들이 단호히 그런 갈라치기하려는 허위의식의 정치인들을 배격하게 되면, 우리는 충분히 참 민주국가를 금방 이루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교회가 단연 앞장설 일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 일에 발을 들여놓고 국민들과 교인들을 이념의 노예가 되게 하는 일은 회개해야할 일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일이다. 우리는 이 점을 단호히 중단시켜야 한다. 이제 교회가 앞장 서 우리 민족을 이 이념과 제국에 매달림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어떻게 해방시킬까? 성령과 말씀으로 국민들과 성도들의 마음부터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게 복음운동이고 민족을 부활시키는 운동이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세 본문 말씀에서 그 비극의 굴레에서 벗어날 지혜와 능력을 얻어내자. 이를 위해 세 본문들에 나타난 말씀들 가운데, ‘마음’과 ‘가운데’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서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실망하고 낙담한 두 제자들이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던 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에게서 받았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파고 들어옴으로 인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스바냐 예언의 내용도 그렇다. 오랜 바벨론 포로세월 동안 기쁨을 잃어버린 체 살아왔던 백성들이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고 자부심과 활기를 가진 민족으로 부활한 데에는,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계셔서 해방의 구원을 베풀어주신 까닭임을 전한다(15,17절).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괴롭게 하는 자들에게는 형벌을 주시고, 저는 자나 쫓겨난 자나 수욕 받는 자들에게는 칭찬과 명성을 안겨 주신 것이다. 수치와 치욕의 장막을 거두고, 명성과 칭찬을 받게 하셨다.
예수 부활을 몸으로 확인했던 사도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어떤 영향들을 미치게 하였는지를 증언한다(3-5절). 그의 결론은 부활 신앙의 결국(열매)이 영혼의 구원임을 역설한다(9절). 본래 예수 부활은 듣고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으나, 그 부활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우리 마음 안에까지 자리 잡게 될 때에야, 우리를 영생으로 이끈다. 곧 예수 부활은 그것을 믿음으로 대응할 때, 비로소 구원의 능력으로 다가온다.
1. 복음서 / 눅24:13-35 / “그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 ”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당신을 알리고 전하는 증인으로 나선 모습을 담고 있다. 그 대상은 바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충격과 낙심이 되어, 낙향(落鄕)길에 들어선 자들이었다. 특히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그렇게 내려가고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믿다가 낙심한 자들의 전형(典型)이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분은 그런 그들을 친히 찾아주셨다. 그것도 그들 대화와 마음 중심 가운데로 찾아주셨다.
결국 그들은 부활하신 주를 보는 눈이 열렸다. 비록 예수께서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신비도 있었으나, 그때 부활하신 이로 인한 확신과 충격에서 붙은 가슴의 뜨거움은 그들을 더 이상 낙향 길로 갈 수 없게 했다. 발걸음을 되돌려서, 그들이 떠나 온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게 했고,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증인들이 되게 하였다. 그 주요 소식들을 압축해본다.
1) 예수를 잃고 슬픔과 낙망 속에서 고향인 엠마오로 내려가는 글로바와 그의 동료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들어오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자 주님이 ‘서로 주고받으며 나누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죽임 당하신 예수의 일임을 말하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예수를 열심히 소개하면서, 그에 관한 부활 소문까지도 거론했다(19-21절). 이제 그들이 전한 예수님에 관한 소개를 확인해 보자 :
2) ‘그는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는데, 대제사장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설명하면서, 자기들은 그를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무덤에 계신 지 사흘째인 오늘엔 자기 일행 중 한 여자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는 못 보았으나, ’그가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은 만났다고 말했다. 일행 중 두어 제자들이 그 빈 무덤도 찾아서 확인하였으나 주님은 못 보았다’고 했다.
3) 그러자 부활의 주님은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임’을 지적하시면서, 당신의 고난과 영광에 이르는 일에 대한 기록들인 모세의 율법과 모든 선지자들의 글들을 지적하시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25-27절). 그러면서 그들의 저녁 식탁에까지 함께하시면서 떡으로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므로, 그들의 눈까지 밝혀주셨다(28-31,상). 비록 눈이 열리는 순간, 주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으나, 그들 가슴은 이미 뜨거워 있었다.
4) 우리는 이제 부활체를 선보이신 예수님의 변형(變形)된 모습에 주목한다(31절,하). 나사렛 예수의 모습만이 아닌, 참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 곧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온전하신 하나님이신 모습을 함께 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육체를 보전하셨으나 동시에 인간의 내면에까지도 오셔서 주관하시는 영체의 주로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양면의 모습을 선보이셨다.
5) 결국 영혼 곧 인간의 가슴 중심에서까지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통하여, 이 두 제자들은 거룩한 접촉(high touch)을 하게 되면서, 삶의 대 변화를 체험한다. 거룩한 부름을 받은 소명(召命)자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부활의 증인의 자리에 서게 되면서, 더 이상 고향길이 아니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찾아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이미 부활의 주를 만난 이들과 더불어 부활신앙인이 되어, 부활하신 주를 기쁘게 전하기 시작한다.
2. 예언서 / 습 3:14-20 / “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
본문 스바냐 예언서의 배경은 지난 주일에 소개된 이스라엘 백성의 첫 번째 집단적 부활사건에 이어, 두 번째 집단적 부활사건으로 기록될 ‘바벨론에서 본국에로의 귀환(歸還)’사건을 담았다. 여기에서도 압도적 하나님의 개입으로(출15:14-16 참조), 바사 제국의 대왕 고레스의 칙령(勅令)을 이끌어 내면서, 지난 70년간의 죽음과 같았던 포로생활을 한순간에 씻어내고 평화로이 귀국 길에 오르게 된 백성들의 감격과 환희를 담고 있다(사40장 이하 참조).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새롭게 죽음에서 부활한 집단적 환희를 체험한다. 이런 초자연적 역사는 그들의 왕이신 여호와가 자기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 어께에 부여된 형벌의 멍에를 제하시고 전능자로서의 해방의 역사를 지휘하시면서, 자기들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심에 따른 것임을 고백한다(15-17절). 제2의 출애굽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처진 어깨를 보여선 안 되었다. 기뻐해야 했다! 그들을 짖누르던 짐들이 치욕을 당해 떨어져 나간 것이다(18절). 마치 예수 부활시 주변의 죽음의 세력들이 맥없이 떨어져 나간 것과 꼭 같았다!
그 대신 그 일들로 인하여 부활체로 되살아난 이들이 드러났다. 저는 자, 쫓겨난 자, 수욕 받던 자, 흩어진 자, 포로 되어 사로잡혔던 자, 그늘 아래 탄식하며 살던 자들이 복권되고 명예를 회복하며 얕잡아보던 자들로부터 만이 아니라, 천하 만민들로 부터까지도 칭찬과 명성을 얻게 되는 인생 대역전을 경험하기 시작했다(19-20절 참조), 시126편은 그 때를 가리켜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우리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가득했다’라고 말했다.
이 예언서에 등장한 이들은 대체 누군가? 이들은 예수가 열어주신 부활의 그 날, 그 영성, 그 세계를 집단적으로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체험과 세계를 앞당겨 보여준 주인공들이었다.
3. 서신서 / 벧전 1:3-12 / “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현장에서 직접 뵈웠던 제자 베드로 사도가 흩어진 교회들에게 주님의 부활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안겨 준 선물들이 어떤 것인지를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준 내용이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셔서 다음의 몇 가지 확실한 영적 선물들은 안겨주신다(3-5절 참조).
1)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3절). 이는 새 생명(new life)을 안겨 주신다는 말이다. 이런 근거는 주님의 부활이 믿는 자들에게 살아있는 소망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는 육체의 소멸에 따른 죽음을 삶의 종착점을 보지 않고 그 너머의 열린 영원한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 까닭이다. 결국 부활신앙인이 되면서 육적 욕망에서 벗어나 영적 존재로 거듭났음을 말한다.
2)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할 영원한 유업(遺業)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4절). 그 동안은 온통 땅의 유업만을 관심하며 살아왔다. 그런 것들은 모두 썩을 것들이요 더럽혀질 것들이며 쇠할 것들이어서, 결국은 허망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나라를 상속할 부활신앙인들에게는 이제 이 땅에서 영생의 나라에로 계좌이체 하듯, 땅에서 심고 하늘에서 거두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3) 이로 인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살 길에 들어섰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보호하심을 받게 되었음을 말한다(5절). 이 땅에서부터 그의 영혼이 구원받은 자로서 살게 되었음을 말한다(9절). 그 두드러진 표시들이 있다. 여러 가지 시험들을 만나도 오히려 그가 가진 부활신앙 안에서 크게 기뻐하게 된다(6절). 시험들을 통하여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7절). 보지 못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머잖아 받아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한다(8절).
o 장애인주일, 회복되어야할 민주주의, 그리고 4.16세월호 등에서 길을 찾아야할 우리의 해답은 무엇일까? 강력한 예수 부활의 신앙을 우리 가슴과 영혼 중심 속에 착근되게 하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망가지고 무너진 상처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치유의 영으로 밖에는 대안이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오직 부활신앙만이 우리를 거듭나고, 되살리며, 재창조의 주역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할 수 있다. 엠마오의 제자의 영혼에 찾아주신 주님이 여러분께도 같이 계시길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