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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씨뿌림주일

관리자 2023-04-04 (화) 20:13 1년전 889  

본문) 요 20:1~10, 출15:13-21, 고전15:20-28 


부활(復活)절기가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최대의 명절을 맞이하였다. 왜 최대의 명절로 보는가? 힘의 원천이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있음을 우리 교회가 명확히 천명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죽으면 끝이다’는 세상의 지극히 당연한 존재의 상식적 논리를 근간에서부터 거부하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을 향한 새로운 시작이다’라는 또 다른 시각을 명쾌히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활신앙을 통하여, 우리는 인생을 새롭게 보는 눈이 열렸다.


사실 종교의 힘은 대체로 주어진 삶에다 고상한 윤리와 도덕을 입히는 수준이다. 무속종교는 그런 윤리적 기반도 아예 없지만, 고등종교에는 삶의 윤리와 함께 죽음에 대한 해답을 주려는 시도들이 많다. 불교에도 윤회설(輪迴說)등으로 인간의 사후에 대한 답을 주려고 한다.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서 ‘다음에 태어나면, 000으로 태어난다’라는 기대감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종교에도 죽음 문제에 대한 답을 줄 힘이 있음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기독교의 부활관은 가장 신선하고 강력한 영적 힘을 보유하고 있다. 윤회사상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지만, 예수의 부활은 죽음의 절대성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審判)과 영원한 나라인 영생(永生)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안겨 주었다. 예수 한 사람의 죽음과 부활이 지구촌의 생존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이토록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일은 실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가 보유한 제 신앙 영역들 중에서, 부활신앙은 가장 정점(頂點)에 위치한 신앙이다. 이 말은 다른 모든 신앙들을 다 보유하고 있어도, 부활신앙이 없으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신앙인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다른 영역의 신앙이나 지식이 부족해도 바로 이 부활신앙이 확실히 있으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까운 존재’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요3:5참조). 


사실 부활이란 영적 영역은 세상의 그 어떤 이론과 상식, 과학과 논리에 의해서 규명될 수 있지 아니하고, 완전히 신적이며 영적 영역에서나 경험되고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부활은 그 어떤 지식, 논리, 철학, 과학적인 접근들도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가장 간편하지만 가장 확실한 지름길인 믿음을 택할 때, 접촉이 가능하다. 바로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일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믿되 그의 부활이 모든 죽은 자의 첫 열매임을 믿고,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하리라고 믿을 때, 바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영역이다. 


부활절기의 첫 주일인 오늘의 세 본문들을 보자. 복음서는 그 날 곧 죽임 당하셔서 무덤에 안장되셨던 사흘째 새벽에, 예수께서 그 사망의 자리를 빈 무덤으로 남기시고, 살아나셨던 그 역사의 현장을 전하고 있다. 출애굽기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위해 홍해를 건너면서 경험하였던 집단적 부활 체험담을 전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신앙의 기반이 된 부활신앙의 능력이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부활장으로 알려진 서신서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증언을 바울을 통해서 듣게 된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믿느냐 못 만나고 사느냐는 문제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를 낸다. 바울이 율법주의자에서 복음주의자로 완전 회심하고, 온 세상에 예수의 구원을 전하게 된 일은 전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친히 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도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과연 그가 거듭났는가 아직 거듭나지 못했는가를 분별할 수 있다. 그 영혼 속에 부활의 영이 오신 이들의 삶은 아주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삶의 가치와 내용과 행동이 변해 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나는, 지금 아담에 속해 있는가 그리스도에 속해 있는가? 부활 신앙에 따라서, 나는 죽음을 내 마지막으로 알고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잠자는 일이요 결국은 다시 일어날 존재로 보는가? 예수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보기에, 나도 반드시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날 존재로 보는가 아니면 영원한 심판대 앞에서 정죄당할 두려움에 붙들려 사는가? 이런 여러 영적 궁금증들을 안고, 이제 본문 속에서 부활절에 주시는 진리를 듣도록 하자.

 

1. 복음서 / 요 20:1-10 /  “ 베드로가 ---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  


본문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신 그 현장인 무덤에서의 상황을 생중계하듯 한 내용이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접하게 되고 믿게 되었는지를 전하여 준다. (참고로 본 장면의 과정의 다섯 단계인, 마리아의 겉보기- 요한의 들여다보기- 베드로의 들어가 보기- 베드로와 요한의 무덤에서의 만남과 믿기- 그리고 나가기는 본 말씀연구원이 제작한 성경공부 교재들인 창세기-사도행전-신명기 성경공부의 교재 틀을 이루고 있음을 밝힌다) 


1) 첫 목격자는 그곳을 새벽에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녀는 무덤 입구를 봉했던 돌문이 옮겨진 모습이 놀라서, 예수의 두 제자들에게 달려와 이 사실을 전했다. 그때 그녀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한 체, 누가 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본 것이었다(1-2절).    


2) 그 소식에 두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베드로와 요한(다른 제자)이었다. 아무래도 속도는 젊은 제자가 더 빨라서 베드로를 앞질러 도착했다. 그 바람에 그는 먼저 열린 무덤을 보았으나, 구부려서 그 안을 들여다만 보았다(3-5절). 그 안에 예수께서 없음과 시신을 쌌던 세마포 놓인 것만 살핀 것이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도착하였는데, 그는 곧장 그 무덤 안으로 쑥 들어갔다. 들어가 보기로 무덤 내부의 상황 파악에 나선 것이다(6절).  


3) 결론이 나왔다. 무덤 내부 현장은 분명히 예수님이 안 계셨고, 그의 세마포는 놓였으며 그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아니하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다(6-7절). 이는 마치 자다가 일어난 자가 자기의 덮개를 제치고 바깥으로 나아간 그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결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일어남에서만 확인할 수 있던 장면이었다. 결국 드러난 정황으로 볼 때, 우려했던 시체 도난(盜難)이나 이장(移葬)이랄 수는 없었다. 


4) 그 점은 시몬을 보고 뒤따라 들어온 다른 제자(요한)도 함께 확인하면서, 예수의 살아나심을 분명히 믿게 된다(8절). 곧 그들이 무덤을 찾아 만나 확인하고 나서 믿게 된 결론이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런 확인이 그들을 부활신앙에로 직행하게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일로 인한 충격과 놀라움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 것은 분명하다. 괄호의 제자들의 마음 상태 증언은 바로 그 점을 말해준다(9절). 


5) 결국 제자들의 수용 여부와 그들의 믿음 여부와는 상관없이 새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죽임 당하신 예수께서는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 부활사건의 물결은 결국 파도를 일으키고, 세상에 쓰나미를 안겨주었다. 그 충격의 파고는 역시 제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8절). 이는 얼마 전부터 주님께서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일을 새삼 생각나게 하고, 또 실제로 이곳 무덤에서 그의 살아나심을 확인하게 되면서, 비로소 믿게 된 일이기도 하다(눅9:21-22, 9:44-45, 18:31-34 참조).  


6)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들의 뒷모습도 전한다(10절). 그들의 가슴엔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가 계셨다. 그러기에 그들은 더 이상 패배자가 아니었다. 이미 자기들 안에 시작된 스승의 부활이 자신들의 미래를 송두리 체 뒤바꾸어 놀 일들을 끌어안고 가는 길이었다. 그 동안의 박해자와 핍박자들을 허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승리를 노래할 새 인류사의 주역들로 변신할 자신들이 될 줄도 모른 체, 그들은 자기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2. 구약 / 출 15:13-21 / “ 여호와께서는 바로의 말과 마병은 바닷물로 그들을 덮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간지라 ”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현장 기록으로서, 후에 있을 부활의 예표(豫表)를 보여 준 곳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오랜 세월의 애굽의 학정에 벗어나 출(出)애굽으로 어엿한 민족으로 출발하면서, 죽음과 부활을 집단으로 경험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죽음의 강 홍해(紅海)를 건너면서 그들은 영원히 기억해야할 부활 은혜를 집단적으로 체험한 무리로 거듭났다. 출애굽이 그들 신앙의 핵이 된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가 되고 그의 백성이요 자녀가 된다.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으로서는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무리가 되었고,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에서 결코 벗어나 존재할 수 없는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신앙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그 근거로서의 출애굽의 기적과 은혜를 고백하게 되었다. 본문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개입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전한다. 

  

1) 하나님의 히브리 백성들을 애굽 학정에서 빼내신 일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13절). 하나는 그들을 향한 인자(=자비/mercy)하심에서였다. 이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관계와 언약을 좇아서 나온 하나님의 책임적 사랑에 따른 행위였다. 또 하나는 주님의 강력한 힘(strength)을 드러내심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세상의 공고한 판을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는 압도적 능력을 보여주실 전능자의 힘에 따른 행동에서 나온 것이었다.   


2) 그때에 여호와의 능력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여기에서는 출애굽기 기자는 그 후에 가나안에 이주할 때 보여주셨던 여호와의 능력의 손길을 출애굽 때의 능력과 연결시켜 설명한다(14-17절 참조). 여기에서 보여주신 여호와의 놀라운 손길은 그들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보여 준 ‘돌 같은 침묵(沈默)’을 보여 준 일들로 잘 설명한다. 


곧 그들은 행진해가는 이스라엘을 보고 마음에 떨림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하면서, 놀라워하면서, 그리고 낙담에 빠져 들기도 하는 등등,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군을 오직 침묵 속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당신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고, 처소를 삼으며, 세우신 성소를 목격하여야만 했다. 저 오랜 세월 비천했던 당신의 백성을 모든 민족들 위에 올려 세우시는 하나님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3) 그러면서도 당신의 백성들의 행진에 대한 훼방 세력들에게는 아주 단호하게 응징하는 모습도 뚜렷하게 보여주셨다. 그런 초자연적 능력은 저 출애굽 과정의 홍해 도강(渡江)할 때에 적나라하게 보여 주셨다(19절). 곧 당신의 백성들의 앞길을 막으려는 원수들에게는 참혹한 응징과 징벌로 대응하시는 모습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그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를 받으면서, 홍해를 육지같이 도강하기 시작할 때, 그들을 되돌려 다시 애굽으로 회귀(回歸)시키려고 뒤좇아 온 애굽의 바로 군대가 겁 없이 이미 길이 난 홍해 속에까지 깊이 들어왔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 동안 벽처럼 세워 둔 바닷물을 그들에게 덮치게 하셔서 바로의 군대 모두를 몰살시키셨다. 이는 대적자들을 향한 대 심판이었고, 쫓기던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춤추고 찬양하여 영광 돌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21절 참조).  


이렇듯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펼쳐진 출애굽이나 예수께서 죽은 자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일 모두는, 주변의 그 모든 세력들을 돌 같이 침묵시키고 제압하시는 압도적인 능력이 드러난 가운데 이루어졌다. 천지에서 그 어떤 세력들도 그 역사를 중지시킬 수도, 방해할 수도 없는 전적인 능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대상들 중에는 죽은 자를 계속 자기의 사망 권세 속에 붙들어두려는 사망 권세까지도 포함된다. 그게 바로 예수 부활의 놀라운 실재(實在)이다. 


3. 서신서 / 고전 15:20-28 /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바울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놀라워하면서, 그 주님의 부활이 예수 자신의 능력의 과시용이 아니라 우리 세상 만민들을 위한 것이 분명함을 알고, 그렇게 되기 위한 방법과 길을 찾는 일에 열심하였다. 그래서 그 선한 목적을 현실화하고자 매달렸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 아래 증언한 곳이 바로 부활장인 본문인 고전 15장 내용들이었다.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반드시 듣고 붙잡아야만 할 몇 가지 구원의 메시지들을 전해 주었다: 


1) 부활신앙인들에게는 죽음은 없다. 다시 일어날 잠만 있다. 주님의 교훈이다(요11:11참조)

2) 부활신앙인들은 열차를 아담에게서 그리스도 예수의 열차로 옮겨 갈아탄 자들이다(21-22).

3) 그리스도는 죽은 자의 부활의 첫 열매이다. 그 다음은 그에게 속한 자들의 몫이다(23절). 

4) 주님은 다시 오실 때, 곧 사망 권세가 위세를 행사할 때까지는 계속 왕 노릇하신다(25절). 

5)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死亡)이다(26절). 영생의 문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다.  

6) 그 사이에나 그 이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신다(28절) 


o 우리는 내 신앙을 부활신앙 위에다 굳게 세우는 일부터 확실히 해 두어야만 한다. 부활신앙이 흐릿하면, 우리의 모든 신앙은 육체적인 요구나 인간적 허영심이나 세상 욕망의 종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참 부활신앙 만이 우리를 세상과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참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을 매우 역동적으로 만든다. 결코 타계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 값진 영생을 소유하기 위한 이곳 세상에서의 삶에 진정한 가치와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참여적인 신앙인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신령한 능력도 여기에서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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