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9:17~22, 삼하 7:1-17, 계 19:11-16
오늘은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다. 절기의 마지막 주일이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왕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기도 하다. 아울러 세계교회는 이 주간을 주님의 십자가와 죽임 당하신 일을 묵상하면서 고난주간으로 보낸다. 따라서 주님의 수난이 안겨 준 삶의 영향 아래 있는 우리의 삶도, 이전 보다 그의 백성다운 모습을 더욱 회복할 수 있도록 매진하여야 한다.
계절로서는 완연한 봄이다. 이미 4월에 접어든 우리의 대자연은 현저히 아름다운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런 중에 우리 교단은 이번 주일을 제주4.3 기념주일로 제정하고, 해방 후 남북총선에 대한 이견으로 이념 논쟁에 빠져든 제주에서,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우익인사들에 의하여 수만 명의 지역민이 무차별 살상되었던 참혹한 일을 추억하면서, 어서 속히 이 땅에 온 민족이 하나 되어 평화통일의 시대가 열리기를 기원하며서 예배를 드린다.
4.3사건이 남긴 최대의 성처 중의 하나는 우리 기독교가 극우(極右)인사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양민 학살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일이었다. 이는 북에서 남하한 서북기독청년단원들이 제주 폭동 진압에 참여하면서, 수만 명의 양민 학살을 주도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때의 이념 논쟁이, 80여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도 한국기독교가 그 문제를 극복해내지 못한 체, 고귀한 <예수 신앙>위에 멸공논리라는 극우논리를 덧씌운 체 지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런 모습은 소위 ‘태극기부대’란 집단의 이름아래, 전광훈을 앞장 세워서 북한을 원수시하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과 화해와 평화통일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흐름들을 겨냥하여, 사정없이 ‘빨갱이집단’, ‘종북 세력’, ‘친북세력’, ‘좌파’라며 정치공세를 펼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외치셨던 ‘원수까지 사랑하라’, ‘서로 하나 되라’, ‘동족과는 절대 싸우지 말라(신2:9)’라는 교훈을 무시한다. 그 바람에 지금의 한국교회는 더욱 분열되고, 대립과 갈등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상실한 이기적 집단으로 매도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런 모습은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모신 모든 믿음에 향한 배신행위이고, 동시에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흐름을 정지시키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한국역사와 교회의 미래는 희망을 말할 수 없고, 어둡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거룩한 성전(聖戰)을 전개해야 하겠다. ‘분열이냐, 평화냐’ 이 싸움이 우리에게 남은 최대의 싸움이다. 우리 교단도 이 문제해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이 점에서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의 시선을 더욱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보게 한다. 특히 예수의 마지막 생애를 심판했던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된 예수를 가리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팻말을 공지한 부분을 더욱 주목하게 된다. 그는 예수를 어떻게 보고, 그렇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규정하였을까? 그것도 그런 내용을 삼개국어(아람-헬라-로마)로 공지할 때에는 보통 일이 아니다. 혹 조롱이라면, 예수에게가 아니라 그를 고발한 유대인들을 향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의 왕 되심을 세상에 알렸다.
예수, 그가 베들레헴 마굿간의 가축 우리에 태어나시고, 자라기는 저 북부 갈릴리 나사렛이란 산골마을에서 서민의 아들로 자라셨다가, 30세에 접어들어 하나님 나라운동에 앞장 서셨던 그가 어떻게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가슴에서 나온 ‘그는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다’라는 판정까지 이끌어내실 수가 있었을까? 그것도 당신이 스스로 왕(王)이심을 밝힌 것은 빌라도 앞에서였을 뿐이었다(요18:37참조). 그것도 세상의 왕이 아니라 진리의 나라의 왕이요 그의 백성은 진리를 좇아 행하는 세상 만민들임을 밝히셨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예수를 왕으로 보았다.
우리가 이방인 로마 총독의 최후 증언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은, 그의 증언은 그 스스로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감동과 지혜에 따른 것으로 보인 까닭이다. 즉 이 점은 그의 혈육의 조상이었던 다윗이 여호와로부터 일찍이 그의 후손에게서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할 인물이 나오리라고 언약해 주신 것의 성취물로 받았기 때문이다(삼하7:13,16 참조). 그렇게 해서 나온 다윗은 유대인의 대표적 왕이 되었고,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온 세상 진리를 좇는 모든 이들의 왕으로 세움을 받는 인물이 되셨다. 또한 이 주님은 이 세상에서만의 왕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까지도 왕과 주님이심이 확인되었다(계19:16참조).
이제 우리는 어느 왕의 이름을 가진 백성이 되어 살아가느냐가 매우 중요함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의 왕들은 잠깐이지만, 영원하신 왕을 둔 백성은 그의 영원한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먼저 우리 왕을 먼저 배우고, 그의 백성의 자격도 회복되도록 해야 하겠다.
1. 복음서 / 요19:17-22 / “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
자기 십자가를 몸소 지고 가신 후 그곳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향하여, 빌라도가 세상을 향하여 최후로 취한 행동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증언이었다. 그 증언은 그 십자가에 매달린 자에 대한 압축된 판결문을 담은 팻말로 표시되었는데, 그 내용이 바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내용이었다(17-19절 참조). 이런 십자가에 팻말을 붙인 일은 당시의 로마 관행에 따른 행위이기도 했다.
빌라도가 예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대하여 어떤 마음에서 이런 행동을 취하였을 지가 궁금하다. 확실한 것은 예수에 대한 비웃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줄곧 예수를 만나 심문을 하면서, 그가 무죄임을 밝힌 바 있었다(18:38, 19:4참조). 그래서 예수를 석방시키려고도 노력했다(19:12). 따라서 그런 그에게 결국 십자가형을 내린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여론재판에 의한 정치적 퇴행에 따른 결과였다. 그가 예수의 최후를 조롱하기란 적합하지 못하다. 오히려 예수에 대한 양심의 깊은 부담감에서 나온 결단이라고 보아야 된다.
그 판결을 두고도 유대 고소자들의 공세는 거셌다. ‘유대인의 왕’이란 말 대신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는 압박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는 빌라도가 밀리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요구를 들어주는 마당에, 예수가 누구냐란 법정 판결문건까지 왜곡하거나 치욕적 흔적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망자(亡者)에 대한 마지막 예의 차원에서 제대로 된 자신의 판정문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 것이다. 그가 주위의 반발에 대하여 ‘내가 쓸 것을 썼다’(22절)라며 거부한 것도 그 이유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예수가 왕임을 밝히는 부분에서는 자신의 단호한 의지를 온 세상에 공포하고자 했다. 매우 공개적이고 의욕적인 행동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그의 무려 3개국어로 써 붙인 일이다. 유대인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히브리어(=아람어)로도 썼고, 주변의 이방인들과 세계인들도 모두 읽을 수 있도록 헬라어로도 썼으며, 행정문서의 효과를 내게 하는 로마어로도 써 붙였다(20절).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성자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그의 부정적 입장을 고백하고 지내지만, 사실상의 빌라도는 예수가 진정한 세계인의 왕이심을 공포하는 세계의 첫 인물이었다. 그것도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방인 권력자에 의해서 예수의 의(義)로우심과 왕(王)이심을 법적으로도 입증하고 확인하는 절차를 밟아서 선포 받은 것이다. 빌라도도 그렇게 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역사의 큰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아무리 흑암과 불의의 세력이 강해도, 그것들이 빛과 의의 세력을 짓누리고 승리할 수 없음을 밝힌 쾌거이기도 하다. 그 때부터 세계 역사와 세계인들은 빌라도의 선고를 수용하면서, 의로우신 예수가 죄인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임당하시면서 모든 죄인들의 영원한 왕이 되신 일을 체험하며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활과 그의 영의 강림으로 그의 메시야이심이 온 세상에 급속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구약의 다윗 왕이 여호와로부터 받게 된 축복의 내용 속에서, 그의 후손으로 오실 영원한 왕의 출현에 대한 언약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본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예고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예고와 약속에 따른 성취(成就)로서 나타나는 것이 순리요 원칙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것은 연약한 인간이 소화시키기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주신 말씀을 받는 것과 그 약속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일과 믿음이 그토록 소중하다.
2. 구약 / 삼하 7:1-17 / “ 네 이름을 위대(偉大)하게 만들어 주리라 --- 나는 그의 나라 왕위(王位)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
본문은 다윗 왕으로부터 당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확인하신 여호와께서 그에게 그 응답으로서의 복을 약속하시는 내용들이다. 여기에서 여호와는 땅에서의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마고 약속하신다(9절). 그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11절). 그의 후사를 세워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고 하셨다(12,16절). 이런 약속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막1:11,마16:16,눅1:30-33 참조). 그것도 복음서의 십자가상에서 빌라도의 팻말로 최종 확인이 된 것이다.
1) 하나님의 축복의 발단(發端)은 다윗이 자신은 백향목 궁에 살게 되었지만, 여호와의 궤(법궤)는 휘장 성막에 모신 상태에 대한 송구(悚懼)함을 품고, 여호와를 위하여 자기가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면서 그 마음을 선지자 나단에서 전한 과정에서 나타났다(1-3절).
2) 다윗의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신 여호와께서 그 날 밤 나단에게 당신의 마음과 뜻을 전하셨다. 그 내용을 보면, 여호와는 여지껏 아무런 불편 없이 집이 아닌 장막과 성막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고 그 문제로 그 누구에게도 당신의 처소를 요구한 적이 없었음을 상기시켰다(4-7절 참조). 그러면서 오히려 여호와께서는 연약한 당신의 종 다윗과 그의 미래와 후손들을 배려하는 축복의 보따리를 한껏 풀어주셨다. 마치 마6:33 말씀을 생각나게 한 대목이다.
3) 먼저 여호와는 다윗을 양무리 목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택하심을 상기시키셨다(시78:67-72참조). 그러면서 언제나 그와 함께 계셨고 항상 지켜주셨음을 알리셨다(8-9절).
4)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다(9절).
5) 사사시대와 같지 아니하고, 안전한 삶의 쉼터를 제공하시고자 그의 집도 지어주셨다(11절).
6) 그의 몸에서 난 씨(후손)를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고(12절), 그의 나라 왕위도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12절, 16절).
7) 여호와와의 관계는 부자간의 관계처럼 될 것이며, 혹 범죄하면 사랑의 매와 인생의 채찍의 징계는 하겠으나, 사울처럼 은총을 빼앗거나 하지는 아니할 것을 약속하셨다(14-15절).
8) 단 다윗이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는 건(13절)은 아들인 솔로몬 때로 넘기셨다.
3. 서신서 / 계19:11-16 / “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내용이다. 하늘 보좌에 계신 그는 통치자와 심판자로 오신다. 오시되 수많은 천사들을 호위하고 오신다. 그에게 부여된 이름인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명예는 로마의 황제와 같은 인간 지배자에게가 아니라, 오직 하늘의 주요 영원자이신 그리스도에게만 합당한 이름이다.
본문에서 크게 주목되는 부분이 보인다. 곧 하늘에 소환된 요한이 그 나라에서 확인한 주님은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어린 양으로서(5:12참조), 그곳의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이름들로 존재하고 계셨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 사는 동안, 한 존재이면서 가정과 사회와 모든 관계에서 다양한 이름들을 갖고 사는 모양세와 흡사했다. 이제 머잖아 뵙게 될 우리 주 예수님의 다양하고 소중한 이름들을 미리 알아두자.
1) 공의로 심판하려는 통치자와 심판자로 오실 분의 위치에서는 충신(Faithful)과 진실(True)이라는 이름으로서 계셨다(11절). 이는 우리도 여기에 맞춰 살아야 됨을 일깨워 준 이름이다.
2) 주님의 눈은 불꽃같고 머리엔 많은 면류관이 있는데, 거기에도 이름표(a name written) 가 있었으나, 오직 주님 자신만 아시는 그런 이름이었다(12절). 사랑(아가폐)이 아닐까 싶다!
3) 또 피 뿌린 옷에도 붙은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는 로고스였다(13절,요1:1참조). 이 말씀 안에 빛과 생명이 있어서, 만물이 여기에서 창조되었음을 알리는 이름이기도 하다.
4) 그 옷과 그 다리에도 쓰여 진 이름이 있었는데, 바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였다(16절). 아는 세상 모든 피조물과 만물은 모두 그의 발아래 엎드려 경배해야 함을 일깨운 이름이다.
o 이제 사순절을 보내게 된다.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구세주 예수의 본체를 규정하는 모든 소중한 이름들을 확인하였다.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진리의 나라를 건설하신 예수님의 백성들이다. 그는 우리의 유일한 왕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철저히 그의 백성으로 충성하고 복종하며 살아야한다. 하늘에서 요한이 확인한 주님의 다양한 이름들은 지식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영역을 좇아서 살아야 된다는 뜻이다. 옷깃을 여미고 부활의 주로 오실 주님을 겸손히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