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9:1~16, 사59:1-3, 9-20, 딤전 1:12-17
사순절 넷째 주일이다. 지난 주간에 잠시 내린 비로, 온 대지가 기운을 받아 태어난 새로운 생명체들로 온 천지가 크게 변색(變色)되었다. 마치 죽었던 것 같았던 나신(裸身)들이 다양한 채색된 옷을 입으면서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것이 봄의 멋이고 힘이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지, 그와 동시에 그 생명체를 살려내는 대지와 자연의 에너지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지를 동시에 잘 보여 준다. 참으로 역동적인 창조주의 세계이다.
우리 총회는 마침 오늘을 순교자(순교者)기념주일로 지킨다. 순교란 뜻은 자기가 믿는 종교나 그 지도자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자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기독교에서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인 진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이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들이 중요한 까닭은, 바로 그들이 오늘의 기독교와 교회가 존재하게 하는 데에 밀알이 되고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데에는 이들의 공로가 절대적이다.
사순절기 중인 지금, 우리는 십자가를 향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순교자의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곧 예수님에게서는 자신이 믿고 전하는 진리와 복음을 이 세상에 심고 전하는 일에 대하여 억압하고 압박하는 모든 악의 세력들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죽음으로 관철시켜가는 순교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바로 그 목숨을 끊으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께서 세상의 박해자들을 향하여 보여주신 모습을 전한 곳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순교의 자리에 서신 원인을 보자. 무엇 때문인가?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이 입장을 고수하셨던 까닭이었다(요5:18,8:58—59,10:30-31,33,18:37등등). 유대교는 이 점을 가장 치명적 신성모독죄란 차원의 범죄로 본 것이다. 그 주장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규정했다.
사도 바울도 처음엔 그 예수를 미워하고 그를 믿는 자들을 크게 핍박했는데, 그 이유가 그때의 유대교의 시각을 그도 함께 공유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한 이후부터는(행9장 참조),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온 세상의 구세주’라는 내용을 붙들고 온 세상 만민에게 전파하는 주역이 되었다. 결국 박해자였던 그가 ‘예수가 주님이시다’를 전파하다가 로마에 의해 참수(斬首)당한 것이다.
결국,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이 세상 역사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당한다’는 아주 명료한 구원관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점을 가장 선명하게 증언한 이는 예수의 제자이신 요한 사도였다(요3:16참조) -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이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4:14-15)
그 바람에 인간의 역사는 두 부류의 인간들로 분류되게 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고백을 하는 무리들과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불인(不認) 또는 외면하는 무리들로 양분된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이들은 모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자신의 죄를 대속하신 행위로 믿고, 그를 통하여 속죄 받고 구원받았음을 믿는 자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자들은 대속이나 구속을 받지 못한 세상의 종들인 죄인으로 살아간다.
오늘의 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를 부정하면서 죽이려한 박해자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사랑이심을 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온 세상에 전하시려는 순교자 예수님의 상반된 모습을 함께 보여 준다.
이런 식의 대결은 아주 새로운 것이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판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지고도 이기는 싸움이 있음을 십자가의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가장 치열한 빛과 어둠의 대결이요 악과 선의 대결이다. 불의와 의의 대결이며 미움과 사랑의 대결장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이런 희한한(?) 이타적이며 자주적이고 주도적인 싸움을, ‘사랑’(아가패-Agape)이라고 부른다(요일4:16-19참조).
우리는 예수의 이런 싸움을 통하여 그가 품고 계신 선(善)한 목표를 보게 된다. 주님은 이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탄압자들을 의(義)로운 자로 다시 되돌려 세우시려는 의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십자가 싸움에는 원수를 향한 타도나 복수가 목표가 아니라, 원수를 친구로 삼으시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곧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순교에는 그의 적과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구원하시려는 뜻이 명확히 드러난 것이었다.
구약에서는 그런 여호와의 사랑의 빛을 수용할 수 없이 죄와 허물 속에 빠져 사는 백성들의 죄악상을 보여주는 내용이 앞부분에서 나온다. 동시에 그 허물 속에 고통하는 그들의 처절한 탄식도 듣는다. 그러자 후반부에서는 그런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개입해 오실 것을 예고하신다. 그 예고의 성취가 바로 복음서에 나타난 성육하신 예수와 본문에서 취하신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의 모습에서 드러난 것이다.
서신서는 십자가의 원수였던 바울이 이제는 완전히 변하여,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자가 된 사연을 전한다. 아울러 자신에게 그토록 놀라운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그런 변화를 안겨 주신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교적 소명(召命)도 있음을 밝히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 복음서 / 요19:1-16 / “ 우리의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
본문은 빌라도가 예수를 향한 마지막 심문의 주제가 다름 아닌 ‘네가 진정 하나님이 아들이냐’라는 데에 있었음을 전한다. 이전까지는 제자들의 배신과 예수가 왕이냐는 문제를 다루었다면, 오늘 여기에서는 ‘예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점이 주제였다. 만일 예수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하다면, 그는 곧 하나님이시요 신(神)이란 말이기에, 지금의 유대인들의 행위는 실로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기에, 매우 심각한 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퇴로가 막힌 유대인들에게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어야만 했다. 거짓 왕이어야만 했고, 사이비 교주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자기들의 형편없는 위선적 신앙의 부끄러움을 은폐하기 위해서, 빌라도 역시 자기들 주장을 편 들어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처음에 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몰아서 돌로쳐 죽이려 하였으나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부담되자, 최종적으로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합법적으로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혼란스러웠던 인물은 재판장 빌라도였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죄목 자체가 자신에게는 더욱 긴장감을 불러일으켜 주었고, 진짜 예수를 심문하면 할수록 예수의 모습에는 신의 형상이 서려 있음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진리의 자리에 서서, 죽음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예수는 분명히 세상 종교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주 달랐다! 그러기에, 가능하면 예수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도 했다.
그가 보여 준 노력들 중의 하나가 바로 고난 받는 왕의 망가진 모습이었다(1-5절). 채찍질-가시관-왕복 착용-조롱과 구타의 모습에 쌓인 망가진 예수를 보이면서, 예수의 혐의 없음을 말했다(6절). 하지만 빌라도의 언행에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챈 유대인들은 이전보다 더 거센 공세를 집중하면서 빌라도를 압박하고 나왔다. 그 내용에는 자기들이 왜 그렇게 예수를 죽이려하는지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이렇다 :
1) 예수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7절). 이 문제는 빌라도에게도 두려움을 주었다. 그래서 그가 예수께 물었다 -‘너는 어디로부터냐’(9절). 예수가 온 곳을 구체적으로 물은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침묵하시자(-18:37절에서 이미 답하심), 이번에는 ‘나에게는 너를 놓은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데, 어찌 아무 말도 않느냐’라며 따져 묻기도 했다(10절).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답하셨다.-‘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greater sin)’라고 한마디 하셨다.
이 모든 과정은 빌라도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진행된 것임을 밝히면서, 그러기에 재판관인 빌라도보다는 나를 넘겨 준 자들인 유대인들의 죄가 더 크다며 심판관으로서의 판정을 내리셨다(11절). 재판관은 예수이고, 피고는 유대교도들이며, 총독인 빌라도는 임석하여 진행상황을 입증할 증인으로 모든 것을 정리해 주셨다.
2)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거센 반발과 압력이 그에게 쏟아져 들어왔다(12,15절). 그들의 압박 속에는 자기들의 왕은 가이사(황제)뿐인데, 그런 황제를 두고 이곳의 자칭 왕인 예수를 십자가 처형을 하지 않고 오히려 방면(放免)하는 일은 가이사에게도 불충(不忠)하는 총독임을 입증하는 일이기에 자기들로서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압력도 불사했다. 이는 평소 로마 황제 체제인 외세에 거부감이 강했던 바리새인들의 입장으로서는 아주 표변(豹變)한 모습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 제거에 올인해 있었던 것이다.
3) 빌라도는 순교자가 아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준 것이다(16절). 그 바람에 예수님은 온갖 모함과 수치들을 당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갈보리 언덕을 향하셨다. 세례 요한이 생전에 말하였던, 세상 죄를 지고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을 보여주신 메시야임을 보여주신 것이다(1:29참조). 순교자의 모습으로, 죄악에 붙들려 살고 있는 숱한 죄인들을 되살리기 위하여, 사망의 자리로 묵묵히 들어가신 것이다.
2. 예언서 / 사 59:1-3, 9-20 /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시리라 ”
분문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과 같은 나름대로의 경건 생활에 힘쓰면서도, 삶의 형편이 나아지지 못하자, 그것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결국은 여호와께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나오자(사58:3참조), 그에 대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나온 여호와의 답변이다.
1) 선지자는 그런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죄와 허물 때문임을 지적한다(1-3절, 9-15절,상). 곧 그들 이스라엘의 지금은 정의가 없는 삶, 공의가 무너진 삶, 빛이 아닌 어둠을 좋아하는 삶(9절), 그래서 판단력을 상실한 삶,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의 삶(10절), 그런 삶에 빠져 살면서도 복과 구원은 받고자 하는 삶임을 지적하였다(11절). 그러한 이율배반(二律背反)적 삶이 하나님이 주고 싶어 하시는 복을 막고 있다고 했다.
2)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이런 선지자의 지적에 그들이 옛 조상들처럼 반발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과오와 그에 대한 죄를 자백하고 나왔다(12-15절,상)는 점이다. 선지자의 지적대로 살지 못해서 자기들이 이토록 질곡에서 구원받지 못하다고 자백한 것이다.
3) 그러자, 이번에는 그런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을 자인하고 나온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발동(發動)되었다(시103:8-14절 참조). 그들 스스로가 힘과 능력을 발휘할 수 없어서, 법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하고, 중재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판단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부족함을 돕고 해결해 줄 당신의 손길을 보내겠다는 판단을 하신 것이다.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발판으로, 여호와의 자비로운 도움을 보낼 것을 결정하신 것이다(15절,하-19절 참조).
4) 그게 바로 그들을 위하여 구속자를 파송하신 일이었다. 보내되 자기의 죄과(罪過)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기리 도우실 것을 예고하셨다(20절). 대체 이 구속자가 누구일까? 바로 복음서의 주인공이자 십자가를 지신 우리 구주 예수이셨다. 이 예언의 성취자 예수이시다.
3. 서신서 / 딤전 1:12-17 / “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본문은 그 예언에 따라 이 세상의 죄인들을 살리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방문을 직접 받아 그 예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고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새로운 차원의 인생을 살게 된 사도 바울의 간증문이다. 예전에 그는 최악의 예수와 성도의 박해자였었는데, 지금은 그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전하는 최고의 전도자가 된 사람이다. 바울은 그 이유를, 자신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을 주께서 관용해주시고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라 했다(13절).
동시에 그런 자신을 긍휼과 자비로 부르신 데에는 주님의 깊은 뜻이 있음도 알렸다. 자신과 같이 여전히 예수에 무지하여 범죄하고 사는 수많은 자들에게 주님을 알리고 주 앞에 불러 모으시고자 하는 일에 바울을 앞세워 일하고자 하심 때문이라 말했다. 즉 자신에게는 이방인과 불신자를 구원해내려는 소명(召命)이 주님으로부터 부여되어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바울은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린 것이다(16-17절 참조).
o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 고백과 믿음 속에 세상의 구원의 빛이 있다. 예수님은 세상과 인간들, 특히 죄와 악마의 무거운 멍에에 짓눌려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해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시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하시려는 사랑의 마음이 가득하시다. 그의 십자가 죽음도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선택하신 몫이었다. 참 순교의 길도 여셨고, 살아날 길도 여신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