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8:12~27, 삼하 12:1-15, 행 3:11-21
사순절 둘째 주일이다. 삼월 들어 첫 번째 주일이기도 하다. 날씨도 완연히 겨울을 넘어선 듯하고, 대지에는 초록빛 새 순(筍)들이 그 동안 자신을 눌러왔던 대지의 무게를 밀쳐내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양상은 나무 가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바람에 인간들에게도 삶에 활력이 공급된다. 부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이 새 봄의 새 기운처럼, 모든 일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단이 사용 중인 삼위일체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 주일은 사순절 셋째 해의 두 번째 주일이다. 그러면서 지난 주일과 오늘에 주시는 세 본문 말씀 내용들이 놀랍게도 배신자(背信者)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배신자’란 말은 다소 부담을 주는 용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삶과도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보통 배신은 신의를 저버릴 때 적용된다. 변절이나 변질이나 배반과도 상통(相通)하기도 한다.
모든 관계를 맺게 하는 핵심적인 키(key)는 약속과 믿음이다. 이것들이 있으면,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는 동력이 발생한다. 국가 간에도 그렇고, 집단 간에도 그렇다. 우리 인간들 차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잘 작동하면, 그는 모든 일이 형통하고 행복해진다. 하지만 둘 사이에 배신이 발생하면, 그 결과는 예상 밖에 크다. 관계의 단절과 고립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과의 믿음과 신뢰 차원에서 보면, 인간은 그 누구도 이 배신의 문제에서 더욱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과 하나님은 절대적 믿음과 신뢰를 매체로 엮어진 관계이기에, 그것이 깨지는 문제가 발생하면, 양심의 고통이나 죄의식으로 큰 고통에 빠진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대하지 아니하시거나, 우리를 아주 엄격히 재판하듯이 대하시면,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그 분 앞에서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을 것이다. 불행한 인생으로 끝나게 된다.
인간들 사이에도 이 신뢰는 정말 중요하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고, 친구관계에서도 그러하다. 특히 교회 안에서 만나 형성된 성도들 사이의 신뢰는 소중하다. 친 가족 못잖게 유대를 맺고 살고 있기에, 잘 맺어져 있으면 천국을 맛보게 해준다. 상부상조하며 서로의 부족과 나약함을 채워주며, 온전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된다. 하지만 이 관계에 배신이나 변절이 발생하여 상호 불신하고 비난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주 불행해진다. 기쁨과 거둠도, 나눔도, 성장이나 성숙도 다 마귀에게 빼앗기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선 자리는 어디인가?
마침 오늘 세 본문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경청해보자. 오늘의 말씀들은 모두 배신(背信)에 관련된 내용들로 꾸며져 있다. 복음서는 제자 베드로의 스승 예수를 향한 배신의 이야기를 다룬다. 구약의 내용은 다윗 왕의 하나님을 향한 배신의 이야기가 올라와 있다. 서신서에서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배신 이야기를 전한다.
내용들이 모두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배신 이야기로만 끝내려 하지는 않고, 그 이상의 메시지를 주려고 한다. 배신한 자들의 태도 변화와 함께, 그런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기획된 일들을 추진하시는 하나님을 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본문에 담겨 있는 내용들을 보다 깊이 살피보아야 하겠다.
1. 복음서 / 요18:12-27 / “너(베드로)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본문은 이미 로마 군대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집 뜰로 끌려가신 예수를, 두 제자들이 뒤 따라 들어가면서 발생한 사건을 전한 내용이다. 한 제자는 그곳의 대제사장과도 아는 사이였던 인물이었고, 또 다른 제자는 시몬 베드로였다(12-15절). 제사장을 알았던 제자는 곧장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으나, 베드로는 못 들어간 체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 제자의 안내로 베드로가 들어갈 수 있었으나, 그때 문제들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1)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며 물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라고 부정하며 답했다(17절). 그래서 출입은 허용될 수 있었다. 그곳 뒤뜰에는 추위 때문에 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베드로는 거기에 합류했다.
2) 그 때 사람들 중 하나가 베드로에게 또 물어왔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또 부인했다. ‘나는 아니다’(25절). 그 후 또 다른 한 사람, 곧 동산에서 베드로의 칼에 귀를 잘린 바 있었던 자의 친족이라는 자가 베드로를 잘 안다는 듯, 이렇게 물어왔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26절). 하지만 베드로는 즉시 부인했다. ‘나는 아니다’. 그러자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일은 얼마 전, ‘나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며 큰 소리쳤던 베드로에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37절, 13:37-38 참조)
3) 여기서 우리는 지난 주일의 복음서의 주인공이었던 가룟 유다와 함께, 오늘의 이 베드로를 잇달아 만난다. 이 둘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단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던 자들이었으나, (가룟 유다는 재정담당자 & 베드로는 수제자) 묘하게도 이 둘은 예수의 마지막 길에서 배신과 부인의 쓴 맛을 스승 예수께 안겨 준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두 사람의 결말은 아주 판이했다. 유다는 자살로 목숨을 끊었으나, 베드로는 용서받고 수제자의 영광을 누렸다.
4) 무엇이 이 둘을 그토록 갈라지게 했을까? 유다의 배신의 근원은 자기주장이나 입장이 예수의 것보다도 더 강했다는 데 있다(요13:16-30-전주 참조). 그 점은 예수께서 평소 이렇게 제자의 조건으로 제시한 내용과 상치된 모습이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곧 주님은 이렇게 주의를 주신 바가 있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느니라'(요13:16-17). 유다는 바로 이 부분에서 넘어진 것이다.
5) 그래서 사랑과 용서와 긍휼과 자비와 섬김이란 스승 예수의 선교 방식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육신적인 힘과 돈과 권력의 힘을 더욱 믿었다. 결국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베드로는 순전히 자기가 약하고 부족해서 스승을 모른다고 했다. 예수가 틀려서가 아니라, 자기가 살려고 외부위협이 두려워서 부인했다. 그러기에 정신이 들었을 때, 통곡할 수 있었고 회개도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 입장에서는 누굴 배제하고 누굴 용납하실 수 있을까? 자기주장과 확신에 강한 유다일까, 아니면 자기 부족과 연약함에 떨고 있는 베드로일까?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을 틈이 없는 유다일까, 긍휼과 자비를 힘입을 수 있는 베드로일까? 바로 그 차이에서 베드로가 되살아났다! 그에게는 자신의 연약함을 채워줄 주님의 강함과 담대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6) 우리 신앙 공동체에도 이런 두 형태의 예수 배신자들이 공존한다. 유다처럼, 항상 자기중심이고 예수의 말씀도 참고삼을 뿐이다. 신앙이나 말씀보다 자기 지식이나 권력이나 물질의 힘을 더 신뢰하며 산다. 이런 이들에게 구원은 없다! 하지만 베드로와 같은 배신자들도 많다. 비겁하고 나약하지만, 자신의 마음은 항상 예수를 시인하고 신뢰한다. 종종 유혹과 협박에 굴복하지만, 그러나 회개할 줄 알고 눈물로 자신의 약함을 고한다. 주의 긍휼을 받을 줄 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헤아리신다. 그의 배신이 자만(교만) 때문인지 연약함 때문인지를 살피신다.
2. 구약 / 삼하 12:1-15 / “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또 다른 배신자요 죄인을 만난다. 바로 왕 다윗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누구도 받지 못했던 은혜와 영광을 크게 입은 사람이다.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서 광야에서 오로지 양무리들을 치던 소박한 목동(牧童)이었던 그가, 지금은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어 온 나라를 다스리는 인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지금 아주 허무한 시험(?)에 빠져서, 뜻밖의 깊은 함정에 빠져든 것이다. 자아(自我)속에 내재한 육정의 욕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그 시험에 굴복한 까닭이었다(롬7:14- )
여러분들은 다윗의 범죄 내용을 잘 아신다. 그가 시험에 빠져든 것은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보였을 때였다. 어느 날 밤에 나신(裸身)으로 목욕하던 한 여인 밧세바를 보고, 몸에서 일어난 육정을 뿌리치지 못하면서, 그의 견고한 믿음의 삶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는 –소위 그 답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망나니짓을 계속했다. 그때의 그에게는 공의로운 하나님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아주 돌변(突變)한 인물로 행동하였다.
그러자 권력의 횡포가 잇따랐다. 그 여인과의 관계로 임신하는 등의 부작용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한창 전쟁 중에 있었던 그 남편인 우리아에게 특별 휴가도 주어서 부부관계를 맺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이번에는 아예 그 우리아를 암몬과의 전장 최전선에 내보내어 전사하게 한 것이다(11:24). 그 후에 그 여자를 자기 후처로 데려와 아이도 낳고 살기 시작했다. 권력의 폭력이 어디까지 갈 수가 있는지를 끝판 왕으로 보여준 다윗의 모습이었다
다윗의 이런 악행은 얼마든지 여건상 땅에 묻힐 수 있었다. 하지만 다윗의 그런 모습을 결코 참을 수 없었던 이가 있었다. 바로 그의 주인이셨던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의 그런 어긋난 행동에 침묵하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종인 선지자 나단을 그에게 보내셔서, 질책과 심판을 선고를 내리셨다. 요지(要旨)는 이것이었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은혜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그토록 나를 업신여기고 이런 죄를 범했느냐’(7, 10-12절).
다윗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유다와 같았는가, 베드로와 같았는가? 그는 여호와의 책망 앞에 무릎을 꿇었다.-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나이다‘(13절, 시51편 참조).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범죄와 부족을 자백했다. 그게 바로 다윗이었다. 이 일로 인해 숱한 부끄러움이 그의 노년에 밀려왔어도, 그는 하나님과 역사에 버림당하지 않고 사랑받는 인물일 수 있었다.
3. 서신서 / 행 3:11-21 / “ 너희가 알지 못해서 그리하였으니,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
하나님을 향한 또 다른 범죄 그룹이 있었다. 바로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 지도자였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나사렛 예수가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자기 율법종교를 파괴하며, 나라를 거들 낼 주범이라면서 그를 미워하고 증오할 때, 예수가 진짜 그럴 인물인줄만 알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하나로 힘을 모아주었던 무리들이었다. 그 바람에 자기들도 예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공범(共犯)들이 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대혼란 속에 빠져서 사도들에게 나아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해야 구원을 받겠느냐’라며 고민을 털어 논 것이다(행2:37). 실로 대 변화였다.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과 착각이 가져온 결과에, 크고 깊은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첫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자가, 자기들 앞과 성전 문전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벌떡 일어나 걸면서, 완전히 치유 받는 모습을 보였기때문이다. 가장 흉악범이라는 예수의 이름이 그토록 저주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앉은뱅이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오직 메시아만이 할 일이었는데-, ‘자기들이 죽였던 그 예수가 그 일을 하였다’는 사도들의 증언을 이제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도들의 강력한 증언에 의하면, 자신들이 죽였던 그 예수, 자기들 앞에서 다시 부활하신 그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이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하며 기다려왔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증언에는 실로 진퇴양난의 심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사도들의 증언이 그들을 살렸다! ‘너희가 알지 못해서 그런 죄악을 저질렀고, 너희 관리들도 그러했으니, 이제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함을 받으라’(17-20절).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정말 몰라서 지은 죄, 알지 못하여 지은 죄는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메시지는 그들 모두를 회개와 예수 앞으로 불러 모으면서, 결국 예루살렘의 원시교회, 곧 세계교회의 모태(母胎)가 되었다. 참다운 기쁨을 찾은 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o 사순절은 믿음과 신뢰 회복의 계절이다. 이 시대를 망가뜨리고 친구와 이웃과의 관계를 망가뜨린 일들이 산적해 있다. 이런 문제는 우리 개인은 물론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까지 삶의 질을 파괴시키고 있다. 따라서 모든 신뢰는 필히 회복되어야 한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보다도 자기주장과 교만을 고집하는 마음은 구원 받을 수 없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며 사는 자들도 회개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과 나약함을 시인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용서와 도우심을 구하면서 사는 길을 확실히 택해야 한다. 내가 부족하고 나약해서 쓰러지고 넘어지는 것은 치명적 죄가 아니다. 붙들어 주실 이가 있다. 다만 베드로처럼 회개할 수 있어야하고, 다윗처럼 자신의 과오를 시인할 수 있어야 하며, 예루살렘 주민처럼 자신의 미숙한 분별력을 탓하며 주님의 긍휼의 품에 안길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다시 새 삶을 부여받게 될 곳임을 기억하자. 잊지 말자. 하나님은 완전한 자가 아니라, 회개한 배신자들을 들어 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