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13:16~30, 애 3:55-66, 롬 7:14-25
사순절(四旬節)기가 시작되었다. 이때에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인류가 죄악의 멍에로 걸머진 저주와 죽음의 쇠사슬을 끊어내시려고, 그 죽음의 한복판을 향하여 홀로 들어가시는 40일간의 일정에 돌입하신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로서,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오직 당신 홀로 감당하면서 역사의 흐름을 한순간에 뒤엎어 놓아야할 기적을 이루어내셔야만 했다. 세례 요한의 예고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만이 보여주실 행보를 취하셨다(요1:29).
오늘의 말씀들은 그 절기 시작으로서, 예수께서 어떤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내용을 전한다. 당시의 유대교는 이 나사렛 예수를 매우 불편해 하면서 기회가 닺는 대로 예수 집단을 제거하고 무너뜨리려는 음모들을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바깥의 부정적 흐름도 내부의 호응을 받지 못하면 쉽지 않다. 제자단의 내부가 단일대오를 형성하여 외부의 공격을 완강히 막아내면, 예수 집단을 꺾어 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은 3.1절 제104주년 기념주일이다. 우리가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여 전국적으로 전개한 독립만세사건을 추념하고, 그 때의 애국애족 정신과 독립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연약한 우리나라를 강한 나라로 되살리자는 국민적 의지를 복돋고자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 만세 사건의 의미가 컸던 것은 우리 온 국민이 하나가 된 데에 있다. 만일 이 운동이 서로 편 가르기로 갈라져 양분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3.1운동의 정신을 추앙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조 500년 역사가 왜 무너졌나? 그 사연을 보면 우리의 약함이나 일제의 야욕만으로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게 더욱 용이했던 것은 이완용을 비롯한 밤의 자식들이 하나가 되어 나라를 일제에 넘기도록 협력한 고리들이 우리 내부에 강하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협력 때문에, 우리는 너무도 무력하게 나라의 국권을 일본에게 내어 주게 된 것이다. 이런 수치를 3.1독립만세 운동은 일정 부분 씻어낸 민족적 쾌거여서 3,1절이 더욱 의미가 큰 것이다.
사탄의 전략은 일정하다. 항상 내부의 균열을 노린다. 곧 자기들의 공격에 문고리를 터줄 내부의 조력자들 찾는 일을 중시한다. 그래서 내부가 혼란에 빠지면서 서로 싸우고 다투면서 분열로 무너지게 하는 일을 일삼는다. 나라도, 교회도, 가정도, 단체도 모두 그렇게 작업한다. 그래서 후회하게 하고, 서로 원망하게 하며, 나중에는 비관하여 서로 망하여 죽게 만든다. 그런 사탄의 손길이 지금, 예수 공동체인 제자단 속에 침투하여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탄의 공세와 침투에 제자단은 이제 어떻게 반응할까? 하지만 확실한 것이 보인다. 그곳은 나약한 제자단이 있더라도, 사탄을 이길 전능자이신 예수께서 계셨다.
사탄이 제자들 중 한 명을 자기 휘하에 두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러나 그를 통한 제자들 사이의 분열이나 해체나 고립되는 일들까지 후유증으로 번지는 데는 성공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 사탄의 간계한 생각과 그의 유혹에 빠져든 한 제자의 내부 활동 영역을 처음부터 다른 제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차단시켰기 때문이다(21-27절 참조).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피해는 오롯이 예수 자신에게만 돌리시고, 나머지 전체 제자들에게는 어찌하지 못하게 되도록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28-29절 참조).
예수께서 끌어안으신 피해도 아예 모든 죄인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놓을 계기로 삼고자 하셨던 것이었기에, 사탄과 그의 휘하에 들어간 제자의 배신행위는 결국 예수의 뜻과 계획을 실현하는 일에 기여하는 도구들로 이용된 셈이 되었다.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다가 이용을 당한 행보가 되고야 만 것이다. 그 바람에 앞에게 보았던 하늘에서의 사탄의 일차 패배가(계12:7-12) 이곳 지상에서의 2차 패배로 이어지는 충격적인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구약의 애가(哀歌)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투옥 중에서 부른 슬픈 노래로 알려졌다. 그런데 탄원과 부르짖음의 내용을 보면, 앞부분은 고난의 자리에 들어서게 하신 여호와를 향한 선지자의 탄원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함께, 후반부에는 여전히 자신을 억울하게 모함하고 조롱하는 주변의 공격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저주와 징벌을 내려달라는 탄원을 올리므로서, 그 역시 육신의 연약함에 쌓여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해 준다. 선지자도 양면성을 보인 것이다
로마서의 바울의 증언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상황과 한계를 고발한다. 그들은 본인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아 안의 육신의 힘에서 나오는 죄악의 현실과 악의 역사에 탄식한다. 이를 보면서 우리의 희망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요 그의 성령과의 꾸준한 동행에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이 항상 드러나 살도록, 그리고 죄의 법을 섬기려는 육신을 이기며 살게 하는 것이 우리가 극복해 내야할 길임을 깨닫게 한다.
1. 복음서 / 요13:16-30 / “ 사탄이 조각을 받은 유다에게 들어간지라.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 펼쳐지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하면서 세상을 장악해 온 사탄과의 최후의 일전을 펼치시게 된 장면을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예수와 사탄의 대 지략 싸움도 볼만하고, 그 싸움에서 제자들이 휘말려들지 않도록 예수께서 방어망을 완벽하게 쳐서 남은 제자들의 미래를 지켜내시는 예수님의 지혜도 돋보인다. 사탄은 목표는 예수의 처형과 제자단의 몰락에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모두 허사였다.
1) 성찬 예전 후, 임박한 당신을 향한 체포와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신 예수께서, 자기들끼리만 남게 될 제자들에게 다가 올 어떠한 외로움이나 고난과 시련에도 이 말씀만 생각하면 반드시 극복해낼 차원의 메시지 하나를 제시하셨다(16-17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福)이 있으리라’(16절).
무슨 말씀인가? 홀로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아무리 심한 고생과 환란을 당할 터인데, 그때마다 주님께서 주신 이 말씀을 생각하면 자신이 받고 있는 고난들을 무거운 것이 아니라 아주 가벼운 것들이 되어 그 고비를 견디게 하는 일종의 예방(면역)주사와 같은 처방약을 주신 것이다. 결국 주님은 제자들의 예상되는 고난을 미리 보시면서, 그것에 도피가 아니라 대면하되 기쁘고 영광스럽게 극복해낼 특약(特藥)을 처방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빌립보 감옥에서의 바울과 실라의 모습과 그 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행16:25 이하 참조).
2) 그러면서 예수님은 시편의 내용을 근거삼아. 제자단 내부에서 배신자가 일어났음을 밝히셨다(18-19절). 시41:9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굼치를 들었다’(시41:9)는 내용을 근거 삼사 밝히셨다. 실로 폭탄 발언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전혀 소화되지 못한 말씀이었다. 제자들 자신들도 그런 일은 상상도 못할 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 점을 헤아리신 예수께서는 비록 한 명의 배신자가 등장했다 해도, 남은 모든 제자들에 대한 신뢰와 권위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안심의 말씀도 덧붙여 주셨다(20절).
3) 정작 마음의 괴로움에 시달리는 분은 예수 자신이셨다. 그 배신자가 당신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고, 그곳도 제자단의 경리책임까지 맡은 자(29절)인 그가 당신을 끝까지 좇지 못하고 자기 길을 완고하게 고집하다가(신31:27참조) 사탄의 종이 되어 당신을 죽음에 자리에로 인도하는 자가 되었으니, 스승으로서의 그 괴로움과 충격은 얼마나 크셨겠는가-!(21절). 결국, 예수님은 당신의 입으로 제자들 모두에게 이 사실을 토하셨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4)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서로 의심하면서도,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비록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입을 통하여, ‘주여 누구입니까’(25절)라고 물었으나, 예수님은 구체적인 대상을 호명하지 않는 대신,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라고 하시면서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26절). 그러면서 유다에게 한 말씀하셨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며 그의 행동을 허락하는 말씀을 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 행위로 사탄이 유다의 속에 들어갔다고 전하면서, 그 조각을 받은 유다가 곧 나갔다고 전한다(30절).
5) 혼란에 빠진 제자들은 여전히 유다의 배신을 알아채지 못한 체, 예수님의 한 말씀에 그가 곧장 밖으로 나가는 것이 모임의 회계로서 명절에 쓸 물건을 사고자 함이거나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주기 위해서 나간 행위로 간주할 정도였다(29절).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아주 분명했다. 유다가 당신을 파는 행위를 주저 없이 진행하도록 압박하셨던 것이다. 즉 당신에게 임박한 수난 사건을 피하려 하지 않은 체, 스스로 집행시키는 행동을 주도하고 계셨다.
6) 성경은 그 때가 밤이었다고 말한다(30절,하). 무엇을 말하려는가? 이는 어둠의 세력이 빛의 세력을 함몰시키고자 작업을 본격화한 시각을 그렇게 말한 것이다. 빛과 생명의 세력의 본체로 오신 메시아 예수를 향한 어둠과 사망과 저주의 세력의 마지막 총 공격이 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놀랍게도 피해자이신 예수는 배신한 제자 유다를 미끼로 세상 권세를 쥔 사탄을 잡고자 자신을 죽음의 세력인 사탄 속으로 들어가셨다. 과연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인가!
2. 구약 / 애 3:55-66 / “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이르시되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
본문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나라가 망하고, 선지자 자신은 모든 백성들의 오해와 공격을 통하여 투옥되어 고생하게 된 상황 속에서, 오직 거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이끄신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이다. 사실 예레미야는 줄기차게 유대 왕국이 바벨론에 항복할 것과 그들의 지배를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온 나라와 위정자들에게 선포하였다. 그 이유는 부패하고 우상숭배로 타락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 바람에 선지자는 나라에게는 역적(逆賊) 같은 존재로 인식되면서, 투옥당하고 온갖 세상의 비난과 모멸을 다 당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너무 큰 고통을 당한 것이다. 그 바람에 ‘눈물의 선지자’란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그게 나라가 살 길’이라면서 선포를 굽히지 않았다. 그 고통과 심판의 터널을 지나야 비로소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투옥 중인 선지자가 할 일이란 여호와께 탄식과 부르짖는 기도뿐이었다(55-56절).
마치 겟세마네의 주님의 기도였고, 십자가상에서의 부르짖음이었다(마15:34참조). 그러자 그가 여호와로부터 하나의 응답을 받았다. 그에게 가까이 오신 주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해주셨다(57절). 예언자는 그 말씀을 이렇게 풀이했다.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58절). 선지자의 이 증언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최후로 토하신 말씀인 ‘다 이루었다’(요19:30)를 회상하게 하는 내용과 비견(比肩)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하여 끊임없이 박해와 조롱과 모해와 원통함을 쏟아 붓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마음이 불편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공의로운 여호와께서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해주시고 저주와 함께 진로도 쏟아서 그들을 멸해달라고 탄원한다. 실재로 선지자의 이 기도는 성취되기도 했다. 그 공격자들은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곧 바로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지자는 그 자신은 그리스도와는 달리, 여전히 육신에 속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3. 서신서 / 롬 7:14-25 / “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본문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밝힌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 축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영을 거스리는 육체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데에는 기여할 수 있으나, 그 육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 본연의 죄성(罪性)과 거스림까지는 손댈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율법이 아닌 예수의 십자가 복음에서 나오는 자비와 긍휼의 복음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바울은 두 대조적인 증거들로 설명한다.
1)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신령한 것이기에, 그를 통한 구원까지도 바라고 의지하려 하지만, 그 개체인 ‘나’란 존재를 보면 금새 내가 무척 모순덩어리인 것을 알게 된다. 즉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내 육신이 죄(罪) 아래 팔린 까닭이다(14-15절). 이 말은 내 안의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여서, 마음의 소원과는 달리 몸의 선행이 나오지 못한다(17-20절).
2) 결국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정리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속사람과는 달리, 내 지체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고 저항하게 하는 악과 죄의 법이 공존하고 있다(21-23절).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아예 마귀의 휘하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과는 달리, 무척 곤고(困苦)한 존재들이다. 사망의 몸에서 자신을 건져내야만 하는 존재인 까닭이다(24절). 그것도 한 평생 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 자기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말씀을 더 신뢰하며 살아가야 가능하다(25절).
o 사람들 중에는 밤을 여는 사람들이 있고, 낮을 여는 이들도 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확연하게 가를까? 결국 자기 육체의 욕망을 어떻게 다스렸느냐에 따라서 결정 난다고 보인다. 육체의 소욕을 꺾고 부정한 사람은 선과 의를 추구하면서 세상에 빛의 자녀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만, 육체의 소욕에 굴복한 사람은 어둠과 밤의 세상의 문을 연 사람이 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다 곤고한 자들이다. 마음의 전쟁터를 누구에게 내어 주느냐를 놓고 늘 나름대로 씨름을 하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나 선지자 예례미야나 사도 바울 모두가 그 씨름을 치룬 이들이다. 우리 모두도 그렇고, 나도 그러하다. 이 사순절에 내 속을 점검하자. 내 안의 전쟁터는 지금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 예수와 말씀인가, 내 욕망과 만족인가? 그 결론에 따라서 나는 가룟 유다도 될 수 있고, 예레미야나 바울도 될 수 있다. 사순절이요 3.1절기념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은 이런 싸움에서 승리한 이들의 출현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