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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교회연합주일

관리자 2022-09-06 (화) 16:59 2년전 1006  

본문) 창 11:1~9, 막 13:14-27, 고후 4:1-6


창조절 둘째 주일이다. 지난 주간은 초강력 에이급 태풍인 ‘힌남노’가 우리나라를 관통하면서, 온 국민이 자연의 맹위(猛威) 앞에서 숨죽이며 보낸 때였다. 그 바람에 즐거워야할 추석 대목도 덧없이 지난 듯하다. 그래도 태풍이 할퀴고 남긴 자국들은 한 동안 우리의 가슴에서는 사라지지 아니할 듯하다. 확실한 점은 이런 자연의 대 재해(災害)의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상은 여전히 부유층이 아닌 빈곤(貧困)층이라는 점이다. 


이런 모습은 여전히 기후변화를 통한 이상기온 상승을 저지하고자 애쓰는 세계인의 녹색성장의 길을 애써 외면하면서,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인 원자력 중심의 경제발전을 고집하는 현 정부의 회개할 줄 모르는 모습과 함께, 우리에게 깊은 통증과 큰 비애를 안긴다. 그가 찾는 국민은 누구이며, 그가 외치는 자유와 공정과 상식은 대체 누구를 겨냥한 것일까? 모두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보호하려는 것들로만 들린다. 정말 그의 엇갈린 행보가 너무도 우려된다.    


게다가 금과옥조처럼 강조한 한미동맹과 한일관계 회복을 위한 이 정부의 노력에 대한 댓가는 정말 허망하다. 미국은 우리 한국으로부터 바이오 전자산업의 핵심기술 생산처를 미국으로 확정짓고 자국 이익을 한껏 챙긴 후에, 최근의 전기자동차 관세에서는 우리 한국에는 다른 나라와는 아주 다른 차별을 내리는 바람에, 우리 한국을 ‘자국의 호구(虎口)’로 삼았음이 드러났다. 일본을 향한 정부 측의 저자세는 우리 국민을 계속 어리둥절하게 할 정도이다. 왜 이러는가? 


자기 가슴에 국민이 없음에도 국민만을 찾는 정부, 자기 안에는 정의와 공정이 없음에도 법과 원칙만 강조하는 정부, 민족의 역사와 미래를 향한 비전과 청사진이 전무함에도 장악한 권력을 사유화하는 일에게 눈이 활짝 떠 있는 정부, 이런 정부의 현재의 모습은 마치 오늘의 창세기 본문에 등장한 ‘권력과 아집의 바벨(Babel) 정부’와 하등에 다를 바 없다. 곧 바벨탑 문화는 백성을 결집시켜서, 자기 이름을 하늘 높이 날리고자 힘없는 백성들을 희생시킨 허세였다.  


게다가 이 정부의 진짜 우려스런 행동은 인사정책이다. 오직 자기들만이 모든 영역에서의 엘리트임을 내세우며, 대통령 직속의 검찰출신들을 정부의 모든 핵심 요직에 배치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바보인줄 모르고, 자기들만 한 능력자가 없음을 공언하면서 자기 직계 부대를 권력자들로 줄줄이 세우고 있다. 경찰 권력도 장악하는 중이다. 꼭 군사정권의 전철을 밟고 있다. 지금이 어떤 때인지-, 정말 분별력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마침 오늘은 한국교회의 연합주일이기도 하다. 교회의 연합은 아름다운 일이다. 분열이 준 피해를 생각하면,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꼭 이루어야할 전 교회 공동체의 기도의 과제이다. 하지만 교회 연합은 명분보다도 실질이 중요하다. 팀과 공동체의 결속됨으로 어떤 스타와 인물의 위상 제고를 위한 것 수준 정도들 못 넘어가는 일은 허망하다. 하지만 연합의 정신과 큰 뜻이 더욱 강조됨이 필요하다. 전 성도들을 주의 백성으로 묶어주고, 존중히 여기며, 사랑으로 힘의 결속을 도모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게하는 일이 보다 시급하다.



연합 운동도 주도자들이 건강해야 된다. 자기 욕망과 타인에 대한 배려의 정신이 전무한 자들이 연합 운동의 리더가 되면, 그 때는 그 운동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교회 연합주일에 받게 된 바벨탑 이야기는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함께(5절), 그 잘못된 연합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함께 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6-9절).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세 본문 내용을 이렇게 보는 것이 좋겠다.   


창세기에는 타락한 사람들이 서로 흩어져 가다가, 공동의 이슈를 생산하면서 바벨탑 건설이란 대형 토목공사아래 결집하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한다. 이에 하나님은 관심을 갖고 직접 내려오셔서 관찰하시는데 그 모임의 최종 평가는, ‘위험하니 헤쳐 살게 함이 좋다’였다. 


복음서는 세계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권력층으로부터 가장 무자비한 박해와 처형을 받게 된 때(수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 유대교 박해 & 유대와 로마의 전쟁)를 배경으로 그 때의 살아남은 백성들의 유의할 사항들을 말한다. 서신서는 고난과 환란의 시대에서 그리스도의 빛이 발하는 현장을 소개한다. 곧 부르심의 직분에 충실하게 예수의 주되심과 전파자들이 모든 이의 종(從)됨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나게 하심을 알린다.

    

1. 구약 / 창 11:1-9 / “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을 그 도시에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


에덴에서 밀려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워진 인간상은 그 때부터 자신의 생존과 자존(自尊)을 위하여 더욱 매달리는 행보를 취한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상당히 거대한 군상(群像)을 이루고 살게 되면서, 자신이 가진 결집된 힘에 대하여 관심한다. 소위 ‘집단(集團)’의 힘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는 소외(疏外)감을 탈피하고, 집단 내지 단체를 대신할 이름들을 휘날릴 것을 도모하시 시작한다(4절 참조).  


본문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넓은 평지인 시날(Shinar)이 무대로 소개되고 있고(2절), 그곳에서의 거대한 탑인 바벨탑 건설을 시도했던 일이 등장한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그 역사 전후로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고 보인다. 이집트의 스핑크스, 중국의 만리장성, 페루 잉카문명의 마추픽추, 인도의 타지마할, 요르단의 페트라 등등 기타 세계 처처에 알려지지 않았던 유무형의 중대형 성읍과 탑들의 건축물 등등---. 그런데 성경은 이런 일들을 지켜보신 하나님이 그런 일을 부정적으로 보시고, 그들의 일손이 중단되게 하신 모습들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그들 권력자들이 그 탑을 높이 쌓아서, 자기들의 이름을 온 천하에 과시하려고 한 점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4절). 그래서 그들의 하나 된 언어를 혼잡(=바벨)하게 만들어 서로의 소통을 못하게 만드신 것이다(6-7절 참조). 하지만 더 직접적 원인은 이 일 때문에 엄청난 국고가 손실되면서 국민의 삶이 피폐해지고, 민중의 노동력 착취와 인권 탄압으로 인한 탄식과 신음들이 커지면서, 이 일이 중단됐다고 보인다. 


(결국 바벨탑 프로그램은 인간들의 결속과 이름 내기에 집중된 행동들로서, 전혀 비생산적인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창11장 본문). 그러기에 이번에는 그런 인간들의 집단행동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나서서 당신과의 소통과 관계 확립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들을 출현하게 하는 역사의 새 방법을 선택하셨다. 바로 창12장의 아브라함을 소명자로 불러 세우시고 그와의 언약과 축복으로 새롭게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지구촌에 출범시키는 일이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다음 주, 남신도회 주일(9.18 일자)에서 제대로 만나게 된다.)      


2. 복음서 / 막 13 : 14-27 / “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에 두시고 지켜내시면서 끝내 살리시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억압자나 박해자나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떤 자들이 하나님의 편(便)들어 주시는 무리들에 속하는 자들일까? 그 점에서 오늘의 복음서는 매우 흔치 않는 모습으로 그 대답을 제공하여 준다. 


배경은 마치 지구촌이 최후의 날이라도 맞이한 상황처럼 보인다. 여기서는 억압자와 피압박자들이 아주 대조적으로 그 날을 맞이하는 중이다. 너무 일방적이고 속수무책의 형국이다.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라’. 이게 그 때의 최선의 대책일 정도였다(14-18절). 천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일이었기에, 정말 유구무언의 순간들이었다. ‘하나님은 그 때 어디 계시기에-!’


학자들은 이 본문이 희랍 제국에서 제2 알렉산더와 같은 탁월한 왕이었던 수리아의 안티우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당시 자기 눈에 가시처럼 보였던 유일한 신본주의자들인 유대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의 상황을 담고 있다고 본다(기원전170년). 그는 자신이 대표적인 인본주의자로서, 신본주의자들인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신앙 박해를 가했던 것이다. 다행이 BC 160년경에 끝나긴 했지만-.


그 때 주어진 성도들을 향한 긴급한 대책은 이랬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에 서거든)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逃亡)하라(14절). 지붕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무엇을 가지려고 들어가지도 말라.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려 뒤로 돌이키지도 말라(15-16절). 아이 밴 자와 젖먹이는 자는 화가 있다(17절). 이런 일이 겨울이 터지지 않도록 기도하라’(18절). 그 때는 도망, 피난, 기도가 믿은 자의 유일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이렇게 사태가 완화됨을 다행스러운 일로 술회한다(20절). 그들의 폭력 행위가 예상 밖에 길지 아니함은 하나님이 그 날을 감(減)하셨기 때문으로 본 것이다. 그 점을 함께 감사하자는 뜻이다. 이런 하나님의 대책을 보면, 확실히 우리 인간의 대응의 결과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취할 행동의 지침들은 나왔다. 맞섬이 아니라면, 무엇들인가? 


믿음 공동체의 내외분에서 분출하는 거짓 세력들 및 이단(異端)들에 대한 예리한 분별력을 발휘하는 일과 흔들리지 않는 종말의 믿음을 견지하는 자세이다(21-27절 참조). 사실 주님은 대환란기에 외부에서 가해오는 탄압이나 박해보다 더 위험한 일은 내부에서 발생하는 거짓 영과 그리스도의 출현 문제로 보았다(21-23절). 외부의 것은 우리의 영혼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지만, 내부의 거짓 세력은 우리 영혼을 아예 해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혹이 최고의 적이다!


그렇다면 시련과 박해의 터널을 통과한 성도들은 안전할까? 어둠이 지났으니, 이제는 광명한 태양의 시대만 열리게 될까? 아니다. 그들은 찾아온 광명의 빛 아래에서 또 다른 참상(慘狀)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참상이란 무엇일까?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하늘의 별들이 떨어진 모습도 보는 일이다. 그래서 하늘같은 스타들이 주저앉는 처참한 모습에 깊은 충격과 비애를 당하는 일이다(24-25절). 그런 점에서 하늘의 스타들은 진짜 저 하늘의 천체(天體)들은 아니다. 그들은 바로 내 마음은 물론, 주변의 신앙의 큰 스타였던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그 무서운 박해와 시련에서, 한순간에 변절(變節)되고 추(醜)해지고 실망(失望)을 안겨준 선배의 모습을 말한다. 그래서 내 연약한 신앙에 큰 시련과 시험을 안겨준 존재이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권고(勸告)를 보내신다. 그런 마지막 인간적인 장벽들에 휘둘리지 말고, 믿음으로 잘 극복해서 그 마음과 고통의 시련을 이겨낸 사람만이 큰 권능과 영광중에 오시는 인자(人子)를 보게 될 것이라고(26절). 그런 사람만이, 오신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어 당신의 택(擇)한 자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재(再)약속해주신 바로 그 구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26-27절, 신4:32, 눅21:28,, 살전4:17참조). 


3. 서신서 / 고후 4:1-6 / “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그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반(反)신앙적인 바벨탑 문화를 쫓기를 거부하고, 거짓 선지자들처럼 이적과 기사 중심의 미혹(迷惑)하는 증언자들의 모습도 아닌-, 제3의 길인 다시 오실 메시아를 제대로 드러내려는 그의 양심적 증언에서 복음의 빛이 드러남을 밝힌다. 매우 체험적인 그의 증언은, 자신의 사도의 직분(職分)에 따른 양심적 전파를 통하여 그 빛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자비(긍휼)하심에 따라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도직(使徒職)을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온 교회에 천명하였다. 이는 그와 함께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모든 주의 종들과 성도들 섬기는 일꾼들에게도 핵심이 될 지침일 것이다. 


1) 우리는 낙심(落心)하지 않는다(1절, 하). 하나님의 종이 낙심하는 모습은 그를 부르신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태도이다. 왜 주의 일꾼들이 ‘항상 기뻐하라’(살전5:16)를 실천해야 하나. 낙심은 거듭나지 못한 본능에서 나온다. 거듭난 종들은 결코 낙심에 매일 수 없다. 


2) 우리는 부끄러워 밝힐 수 없는 일을 거부하고, 간교(奸巧)하게 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는다. 오직 진리만을 드러내되, 모두의 양심에다 떳떳히 전한다(2절). 혹 복음이 가려졌다면 그것은 멸망 받을 자에게 가려진 것이다.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못 보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4절). 주의 종이면서도 주인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앞세우려는 말씀의 사유화는 극복돼야만 한다. 


3) 우리는 스스로를 전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님으로 선포한다. 아울러 우리는 예수를 따르므로 우리를 모두의 종(從)으로 내세운다(5절). 바울의 이러한 분명한 초점을 갖춘 고백은 오직 주인만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메신저로서의 충성스러운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당연히 주의 빛과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7절).    


o 교회의 연합은 당연히 강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은 보다 성서적이어야 한다. 힘의 결집이나 이름값 높이기로 초점이 모아지는 연합운동을 배제되어야 한다. 그보다는 주의 몸된 교회로서, 모든 지체들이 서로의 은사를 공유하고 부족함을 공급하며 나누어서, 모두의 지혜와 건강을 도모할 하나 됨이 권장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모든 역사와 생명들의 주(主)되심이 더욱 강조되고, 동시에 그 예수의 지체로서의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모두를 섬기려는 종 일 뿐이라고 고백하는 연합운동들이 아름답고 활발히 전개되어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의 복음의 빛은 찬란히 세상을 밝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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