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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0)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평화통일주일

관리자 2022-08-09 (화) 21:01 2년전 1063  

본문) 갈 5:1~15, 출 31:12-17, 마 12:9-14


강림 후 열 번째 주일이다. 나라가 일제(日帝)로부터 해방된 지 77주년이 된 때이기도 하다. 우리 교단은 오늘을 평화통일주일로 제정하여 해마다 지키고 있다. 이것은 나라는 해방되었으나 아직은 국토가 분단(分斷)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천추의 한(恨)이다! 남북만 하나 되면, 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탁월하고 놀라운 민족으로 보다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데-, 이렇게 분단을 해결하지 못한 체 살다보니, 나라가 안팎으로 이용당하거나 엉뚱한 일들로 국력을 소모시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럴 때 우리 국민이나 교회는 물론이지만, 특히 집권한 정부의 자주적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미국과의 건강한 동맹유지는 필요하지만, 회개할 줄 모르고 우리의 태도 변화만 요구하는 일본과의 맹목적인 관계 회복에만 매달리는 일은 심히 우려된다. 그리고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관계 유지도 긴요하다. 이런 주변 4대 강국의 틈새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우리의 자주성을 유지하고, 한반도 평화통일의 길을 꾸준히 모색하는 일이 크게 필요한 때이다.  


통일은 반드시 이룩해야 할 대업이다. 하지만 그 일은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하다. 평화는 통일 이전에 반드시 선행 되어야할 우리 남북의 행동지침이다. 피차 분쟁이 아닌 평화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필요를 나누고 교류하는 자세를 견지하다 보면, 통일은 한순간에 우리의 품에 안겨 질 것이다. 그러기에 통일에 앞서서 평화 구축은 선결 과제이다. 국지전(局地戰)이라도, 남북 사이의 분쟁은 절대 안 된다. 특히 현 정부는 이점을 절대 명심해야 한다.  


분단과 분열의 문제는 꼭 이념에서만 찾으려면 안 된다.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 에서만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분단과 단절을 안겨주는 영역들은 숱하게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민족 문제로 인한 분단, 인종으로 인한 분열, 종교로 인한 분열, 빈부로 인한 분열, 지역으로 인한 분열, 세대들로 인한 분열, 성별로 인한 분열 등등 그 요인들이 숱하게 많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모습은 한 하나님 밑에 사는 가족들 사이의 분열과 같지 않은가? 


이제 세상과 인간을 보는 시각(視覺)의 변화도 필요하다. 수평적 시각만이 아닌 수직적 시각도 필요하다. 수평적 시각은 형제자매 간의 시각이라면, 수직적 시각은 부모에게서의 자녀를 보는 시각과 같다. 수평적 시각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 차원이라면, 수직적 차원은 신과 인간의 관계 차원이랄 수 있다. 따라서 수직적 시각에서는 인간의 평등성과 보편성을 찾을 수 있다면, 수직적 시각에서는 인간의 특수성과 각자의 고귀함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사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이 둘 모두가 필요하다. 수평적 시각에서 나온 인간의 평등성과 보편성은 너무도 소중하다. 그래서 이 영역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공의로운 법(法)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제정해주신 율법(律法)이 바로 그 영역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수직적 시각도 더욱 필요하다. 그것은 마치 부모의 자식을 향한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과 돌봄의 힘과 같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 모든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잖은가! 이 영역이 바로 복음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가정에서는 부모를 안겨 주셨고, 세상을 향해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용서와 희생과 대속의 복음의 하나님을 보여 주셨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 두 영역들이 균형(均衡)있게 공급되어야 된다. 자녀들에게 아빠의 질서교육이 필요하듯, 엄마의 돌봄과 애정도 함께 필요하다. 우리는 유대교에서 아빠의 모습을, 그리스도교에서 엄마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런 부분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놀랍고도 탁월한 역할분담(役割分擔)이다. 


구약 영역에서 성부 하나님은 율법이라는 골격과 뼈대를 세워주셨는데, 복음서의 성자 예수께서는 그 율법이라는 뼈대에다 말씀과 생명의 옷을 입혀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그렇게 형성된 몸체에다 생기(혼-영혼)를 불어넣어 주셔서, 비로소 세상에 온전해진 그의 몸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종합판이 바로 창2:7에서 선보인 하나님의 생령(生靈)체의 등장이다. 이는 창조주가 빌려도 주시고 회수도 할 수 있는 존재의 등장을 말한다(시104:29참조). 


이런 생령체는 누굴까? 개별 인간이기도 하지만, 교회 공동체이기도 하다. 오늘 평화통일주일에 받게 된 세 본문 말씀들은 이러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할 분담에 따른 역사발전과 그에 따른 교회의 성숙한 응답을 다룬다. 따라서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세 분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가 사랑하는 교회들이 나아가야할 방향도 제시한다. 그 흐름은 ‘율법이냐 복음이냐’란 선택적 측면이 아니라, ‘율법에서 복음으로’라는 발전적 측면에 들어있다. 


이를 위해 안식일(安息日)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라는 점을 두면서도, 율법서에서는 하나님 사랑이란 차원으로 접근하였고, 복음서는 이웃 사랑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했다. 서신서는 이 두 차원을 통전하면서, 복음으로 얻어낸 자유(自由)가 방종이 아닌 서로간의 사랑의 틀 속에서 이웃 사랑과 섬김을 통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됨을 강조하고 있다.  


1. 구약 / 출31:12-17 /  “ 나와의 영원한 언약(言約)이며 표징(標徵)인 안식일을 지키라 ”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으로 본격적인 생활을 시작할 이스라엘에게 지금 다른 민족들과의 확연히 차별화되고 구별된 정체성(正體性-identity) 하나가 부여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차원에서 반드시 준수해야할 의무 사항으로서의 <안식일(安息日) 준수>였다. 이 일은 십계명 중 하나님 사랑차원의 계명들(1-4계명)을 꽃피울 수 있는 확실한 계명이었다. 

  

1)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함을 명령하시면서, 그 구체적인 이유들을 이렇게 밝히셨다. <안식일은 당신의 날>로서(13절), 여호와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일곱째 날을 쉬셨기 때문임을 그 이유로 밝히셨다(17절,하). 이는 이스라엘의 창조주요 뿌리 되신 여호와가 쉬신 날이기에, 그의 백성된 이스라엘도 쉬는 날로 지키는 것이 마땅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그만큼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논리였다 


2) 그리고 이러한 안식일 준수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해주는 랜드마크(landmark)로서, 온 세상과 후손 대대(代代)에 까지 표시해 줄 표징과 언약(言約)이 될 것이며, 그것도 영원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셨다(13,16-17절).    


3) 이 안식일 제정을 통하여 여호와가 겨냥하신 목표가 있다.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려고 나온 이스라엘을 당신과의 사랑을 강화시키고 거룩하게도 만들어서, 그들을 죄로 인한 심판을 받게 될 자들이 아닌 당신의 구원 받은 영원한 백성으로 삼고자 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선명한 목적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며 그 날을 더럽히는 자들은 ‘누구든지 반드시 죽이라’고 엄명(嚴命)까지 내리셨다(13-15절 참조). 


2. 복음서 / 마 12:9-14 /  “ 안식일에 선(善)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 


그러면 안식일 준수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힘쓰고 자신도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이웃들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좋을까? 사실 안식일 준수의 건은 하나님 사랑 차원에서는 훨씬 접근이 단순했으나, 이웃 사랑 차원에서는 다소 복잡했고 보완이 필요했다. 


특히 안식일에 이웃이 갑자기 몸의 질병으로 큰 고통을 받게 되거나, 물에 빠져서 생명이 사경(死境)을 헤매는 경우라면 어찌하면 좋겠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때에도 ‘안식일엔 일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만 생각하면서 그 곤경에 빠진 이웃을 외면해도 괜찮을까, 아니면 안식일일지라도 생명 살리는 일이라면, 먼저 해결부터 해야한다가 해답일까‘가 문제였다. 결국 ‘안식일을 위한 사람이어야 하나,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어야 하나’. 그게 문제가 된 시대였다. 


당시 극우(極右) 바리새인들은 이 안식일 문제를 두고 예수와 맞서고 있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는 문제를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하였으나, 당시의 예수님은 보다 상황적이고 개방적으로 대응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때 안식일 주인 의식을 가진 예수님의 새로운 원칙 추가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막2:27), 또 하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옳다’(12절, 막3:4 참조).    


1) 회당에서 예수를 만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물어왔다(10절). 그러자 예수께서는 즉답 대신에 이런 논증을 제기 하심으로서 그들의 대답을 유도하셨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살려내고자) 끌어내지 않겠느냐’(11절). 너무도 당연한 답을 전제로 질문을 던지신 주님은 ‘그 양보다 더 귀한 인간의 경우에는 더욱 선을 행해야만 되지 않겠느냐‘고 되묻는 것으로 자문자답하셨다(10-12절).  


2) 말문이 막힌 그들에게 주님은 그 한쪽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즉시 선행(善行)을 베푸셨다.  

‘손을 내밀라’. 그가 내밀자 그의 마른 손이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해졌다(13절). 


3) 결국 이 일은 예수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 듯했으나, 실재 사정은 훨씬 악화됐다.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살해음모가 본격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14절). 왜 그랬을까? 예수의 그런 안식일에 대한 폭넓은 해석은 십계명의 이웃 사랑의 폭을 크게 확대하고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복음이 되게 했지만, 그러나 엄격한 규율과 통제로 숱한 백성들을 죄인으로 정죄해오고 그들 위의 의인으로 군림해왔던 그들로서는, 밥상에 재뿌린 행동과 같았다. 예수를 보면서 스승을 만났다는 생각이 아니라, 훼방꾼을 만났다고 본 것이었다. 


3. 서신서 / 갈 5:1-15 / “너희가 얻은 그 자유(自由)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결국 유대인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의지해 온 이 안식일에 관련된 율법 조항은 예수의 새로운 이웃 사랑의 적용 원칙의 등장으로 인하여, 문자주의적 유대인들에게는 쓰라림을 안겨 주었으나 반대로 새로운 수혜자들도 숱하게 나타났다. 그 수혜자들은 누군가? 바로 비유대인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며, 오늘의 우리들이다. 그들은 이제 율법이나 할례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나온 믿음과 사랑으로 구원을 얻게 될 길을 확실히 찾았기 때문이었다. 


1)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 교회인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예수의 안식일에 대한 새 차원의 가르침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이방인)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自由)를 주셨다’고 설명하면서, ‘그러기에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절)로 권했다. 이는 갈라디아교회에는 유대교에서 입교해 들어왔던 일부 사람들이 그곳 현지인 성도들에게, 율법 준수와 할례에 의한 구원론을 꾸준히 권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차단하고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2) 바울은 단호했다. 율법과 할례로 구원받으려는 자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될 유익은 전무할 것이며(2절), 도리어 율법 전체(613가지)를 지켜야만 되는 의무도 져야할 것이고(3절), 그리스도와는 상관없어져서 은혜(恩惠)에서도 떨어질 사람이라고 규정했다(4절). 그는 율법이 지워 준 무거운 멍에들을 가볍게 하면서 십자가에서 속죄와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 예수가 그에 대한 믿음만으로도 구원받게 되는 축복을 안겨 준 것을 거부한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3) 사도는 그들 거짓 교사들에게도 강한 분노를 표시하면서, 교회의 단호한 대처를 주문했다(7-12절 참조). 그들은 그곳 현지교우들의 신앙 발전을 훼방하고 진리를 거스르게 하는 자들이다(7절). 결코 성령께서 보낸 자가 아니다(8절). 그들은 지금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펴지듯 퍼져 있는데(9절), 그런 ‘요동하게 하는 자’는 꼭 심판을 받을 것이다(10절). 따라서 교회도 이제는 ‘십자가의 걸림돌’이요 ‘어지럽게 하는 자들’을 단호히 베어 버려야 한다(11-12절 참조).


4) 사도는 뜨겁게 상기시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할례냐 무할례냐‘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6절). 그들은 자신이 ‘무거운 율법을 건너 뛰어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 자유민이 된 자들’임을 기억하면서, 주어진 그 자유로 절대 육체(범죄)의 기회를 삼지 말고 전적으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며 살아야 된다(13절). 사실 ‘네 이웃 사랑하기’속에 온 율법이 다 들어있을 뿐이다(13-14절).  


5) 그러면서 사도는 두 측의 싸움이 가져다 줄 후유증에도 경계한다. 싸우면 결국 피차에게 멸망을 안겨 줄 수 있기 때문이다(15절). 특히 바로 그 양측 모두의 멸망은 악한 자들의 궁극적인 노림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령의 사람들이 끝내 조심하고 걸러낼 부분들이다. 


o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서로의 깊은 연대와 역할분담 속에서, 이 인간의 죄악과 병든 역사를 치유하고 자유하게 해 오셨는지를 성찰하였다. 성부의 안식일 제정을 통하여 당신과 인간들의 관계를 확고히 하셨다면, 성부는 그 사랑의 영역을 이웃에게까지 포용하게 하시는 넓은 길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교회들이 서로 종노릇하며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의 법을 성취하게 일깨워 주셨다. 이런 사랑의 역사가 민족과 교회에 임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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