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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9)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2-08-02 (화) 09:34 2년전 941  

본문)  롬 12:9~21, 레 19:9-18, 눅 6:32 -38


강림 후 아홉째 주일이다.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가을의 문을 여는 입추(立秋)도 맞이하였다. 더위와 폭염과 장마들은 분명히 우리에게는 피하고 싶은 것들이지만, 그러나 만물을 익어가게 하는 열기도 되고 소화기도 되기에,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감사히 받아들여야 하겠다. 다만 이런 무더위 속에서도 인내로 우리의 먹거리 생산에 수고한 농부들과 관계자들의 건강과 행복은 기원한다. 


앞으로 지금의 기후 변화로 인한 지구촌의 계속되는 기상 이변과 자연 재화(災禍)들 이후에, 가장 우려가 되는 영역은 역시 식량(食糧) 문제이다. 비록 지금은 가장 천시 받는 일차 산업인 이지만, 농업은 종말로 갈수록 가장 절박한 인류의 생존의 목줄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어서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노력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쌀 이외에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의 농산물들이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어서 식량 자급률 높이기에 집중해야 하겠다. 식량의 위기만큼 절박한 위기는 더 없을 터이니까-!   


지난 주 우리는 지상에서의 우리의 삶을 거류민(居留民)과 나그네의 삶으로 확인하면서, 그러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갖고 지내야 마땅한 지를 살펴보았다. 육신의 욕정을 쫓는 삶을 버리고, 영적인 삶을 택하여야 함을 확인했다. 특히 머잖아 본향 길에 오를 것을 대비하면서, 우리의 삶이 하늘 시민권자의 품격에 맞도록 살아야 할 자들임도 다짐했다. 그렇다면 오늘 아홉째 주일에 주시는 주의 말씀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마음과 보물을 어디에다 어떻게 쌓아두고 살아갈 것이냐는 점이다. 물론 간략한 정답은 ‘땅에다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이다(마6:20). 그렇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이 무엇인가가 문제이다. 곧 우리의 재물을 하늘로 직송(直送)할 방법이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말씀들은 그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준다. 바로 ‘땅에 있는 하늘’에다 우리의 보물들을 쌓아두며 사는 일이다. 우리는 이 방법을 이미 예수의 비유의 말씀에서 찾은 바 있다(마25:31-이하 참조). 바로 이웃 속에서 찾는 거다. 


오늘의 세 본문 내용들도 한결같이 ‘이웃 사랑’의 삶을 고취하고 제시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곧 이웃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확인하라는 메시지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직설적 계명은 한마디도 없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이웃을 향한 삶의 계명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실천이 가능할 수 없는 내용들이기에 그렇다.    


그런데 순수한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거기에 따른 영적 기반(基盤)에 필요하다. 기반 없이 쌓아둔 집은 곧 그 쌓아올린 무게들을 견지지 못해 결국 허물어 질 터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그 기반은 무엇인가? 오늘의 말씀에 담긴 핵심적 내용을 중심으로 그 실체들을 확인해 본다.  


첫째, 내 모든 이웃사랑은 선(善)을 기반으로 한 것이어야만 한다. 어떤 인물, 어떤 여건을 만나도 나는 반드시 선한 마음으로 상대할 것이고, 또 선으로 끝내리라는 마지노선을 구축하고 견지하는 일이다(롬12:9,17,21절, 레19:9-10절, 눅6:35-38절 참조). 이 기반이 나를 크게 하고 넓혀 놓는 탁월한 영적 토대가 되고, 그 결과도 분명히 좋은 열매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둘째, 이웃 사랑할 때의 그 주도권(主導權) 행사는 내가 먼저 하겠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롬12:10,16절, 레19:9-13절, 눅6:32-35참조). 육적 인간의 계산법은 항상 조건반사(條件反射)적이다. 상대방에 따라서 자기도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영적 인간의 계산법은 내가 먼저 사랑과 선을 베풀고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상대에 대한 미움이나 파괴나 단절이 전혀 없음과, 오직 사랑과 화해와 공존의 마음이 있음을 상대에게 미리 알리는 것이다. 


셋째, 이웃 사랑의 수준은 원수(怨讐)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롬12:19-20절, 레19:18, 눅6:35-36절 참조). 따라서 비록 나를 괴롭히는 원수 같은 이들에게도 나는 먼저 사랑할 것이고, 기도할 것이며, 후의를 베풀 것이라는 마음의 배수진을 치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거류민들에게는 실질적인 원수는 없음을 자인(自認)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대상들로 보고 상대하는 것이다(롬8:28참조). 따라서 오늘은 이 세 가지 이웃 사랑의 기반을 발판으로 한 구체적인 사례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1) 이웃사랑은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만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그 기반은 철저하게 선(善)이어야한다(롬12:9, 레19:9-10, 딤전1:5). 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랑은 위선(僞善)이며 거짓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는 철저히 거짓과 위선적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선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위선과 거짓에 속한 악은 미워하고 배격해야 한다. 그게 살 길이며, 그럴 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암5:14-15참조).    


이웃 사랑으로 무엇을 드러내려는가? 자신이 선에 속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암5:15절). 자신의 관대함이나 훌륭함을 과시하는 기회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입증하려는 것이면 다욱 좋다. 자칫하면, 매우 좋은 일인 이웃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뜻밖에도 악에 지는 함정에 빠져드는 경우는 극히 조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두 가지 경우를 잠시 소개한다.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은 나그네와 손 대접하기를 매우 활발히 하다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창18장에서 보면, 날씨가 뜨거운 어느 날에 그는 장막 문 맞은  편에 나그네들 세 명이 서 있는 것을 본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정중하고 예의를 갖추어 자기 집에서 편히 쉬었다 가시라고 요청한다. 그 바람에 아브라함의 집에는 뜻밖의 풍성한 잔치가 펼쳐진다. 


그런 아브라함의 진심어린 영접을 받은 후, 그들의 입에서 뜻밖에 축복이 나왔다. ‘내년 이맘 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0절). 아브라함 부부는 당황스럽게 받았으나, 결국 그 예언대로 아브라함은 100세에 부인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을 받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데 결정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할 아들을 그 때, 그 진실한 이웃 사랑의 열매로서 얻어낸 것이었다. 롬12:10-13의 말씀대로, 그는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손 대접에 힘쓰는 자’의 모범이셨던 것이다.  


-반면에 형제 사랑을 진실과 정직이 아닌 거짓과 위선(僞善)으로 나아갔다고 비참하게 저주 당하여 죽게 된 부부도 있었다. 행5장에 나타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바로 그들이었다. 당시 교회는 성령의 뜨거운 역사 속에 자신의 재물과 소유를 팔아서 헌물하는 손길들이 많았다. 바나바 같은 디아스포라가 그 대표적인 헌신자였다(행4:36-37참조). 


그런데 그런 부류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참여하였다. 그들도 그런 봉헌 행렬에 참여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바나바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기는 했으나, 정직이 아닌 거짓으로 임한 것이다. 얼마는 감추고 얼마만 사도들 앞에 내놓았다.(3-8절 참조). 성령의 역사 속에 악령의 거짓과 위선과 허위인 악의 씨를 뿌리려 든 것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 부부는 몇 시간 간격으로 죽어 장사지내는 치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거류민들의 이웃 사랑은 반드시 선함과 배려가 그 바탕이어야 한다. 거짓이나 과시용이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구약 레위기에서는 자신이 농사짓고 추수한 후에, 보여주어야 할 선행에 대해서도 이러한 행동 지침(指針)들도 받았다. ‘곡식 거둘 때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원 열매도 다 따지 말고,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며,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레19:9-10절 참조). 주의 백성의 이웃 사랑의 품격을 본다. 


2) 이웃 사랑에는 먼저 주도권(主導權)을 행사하는 일이 중요하기에, 그것을 놓치지 말고 선제적(先制的)인 행동으로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물론 개입에 조심해야할 행동도 유의해야 한다. 


오늘의 말씀들 중에는 ‘사로 —하라’라는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예컨대, ‘서로 우애’(10절), ‘서로 먼저 하며’(10절),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16절),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레19:11)라는 표현들이 있고, 그런 뜻과 내용을 담은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그리고 ‘주라’는 등등의 표현들이 많이 담겨 있다. 이런 지침에는 모두 상대(相對)가 있다. 따라서 자칫하면 이 계명들은 절대 계명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 되기 쉽다. 


그것은 ‘상대가 나에게 하면, 나도 하겠다’, ‘상대에 따라서 나도 입장을 취하겠다’는 입장 때문이다. 이런 수준이 되면, 이 계명은 빛이 바래진다. 상대 때문에 자기도 실천을 아예 못하는 경우가 계속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게 되면 해야 될 일을 하나도 못하고 만다. 전진이나 발전은 없게 된다. 자칫 악순환의 반복에 빠져들게 되고 만다. 그 바람에 상대가 아닌 내가, 일과 판의 그르침의 원흉(元凶)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우리나라 여.야간 정치판과 같다)  


이에 대하여 복음서의 예수님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칭찬 받을 것만 찾아 행하다가, 결국은 죄인과의 차별화된 의인만의 행동이나 가치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수준에 떨어지는 부끄러운 경우들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일, 자기에게 대접한 사람만 대접하는 일, 그리고 자기에게 주는 자에게만 주는 일종의 상부상조식 행위들은 죄인들의 수준이어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상은 전무하는 점이다(32-34절 참조). 


그러기에 문제 해결의 키가 필요하다. 참된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상대 눈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확고한 태도와 입장이 보다 중요한 까닭이다. 내가 무슨 입장에 있는 지, 내 마음에 품은 것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보여줄 적극적, 선제적 행동이 중요하다. 물론 여기에는 지혜와 분별력도 필요하리라. 하지만 상대의 입장 여하나 반응 여하에 따라서 내 행동도 결정하겠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담대히 그러나 겸손히, 사랑의 주도권을 펼치는 것이 좋다. 


아브라함의 주도권 행사는 여전히 아주 귀한 모범이다. 우리도 그 조상을 본받아야만 한다. 보다 구체적인 주도권 행사의 영역들은 어디여야 할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일들(13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들(15절),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하게 문제를 풀려는 행동들(17절),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려는 일들(18절), 특히 원수가 발생할 때, 그것을 내가 주도적으로 풀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들이다(19절).  


동시에 주님이 내려주신 지침인 이런 말씀도 선제적 이웃 사랑의 행동들이 되어야 한다(35-38절 참조). ‘원수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는 일, 그래서 자신의 자비함을 보여주는 일, 남을 비판하지 않는 일, 정죄하지 않는 일, 용서하는 일, 그리고 주는 일 등등이다. 이런 일까지 감당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상이 크고,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되며, 나중에 돌아올 비판, 정죄, 용서, 일체의 보상들에서 우리들이 안전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반면에 레위기 말씀이 요구한 금지 사항도 필히 준수할 내용들이다. 곧 ‘도둑질하지 말고 속이거나 거짓말 하지 않는 일(11절), 이웃을 억압하지 않는 일과 착취하지 않는 일, 그리고 품꾼의 품삯 지급을 지체시키는 일(13절), 장애인들을 괴롭히는 일들(14절), 불공정한 재판을 하는 일이나 공의를 해치는 편파적 변호를 하는 일(15절), 사람을 비방하는 일과 이웃의 고혈(膏血)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일(16절), 그리고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일(17절) 등등이다. 


3) 이웃 사랑은 반드시 원수(怨讐) 사랑의 수준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원수는 누굴까? 멀리 있는 사람일까, 가까이 있는 사람일까? 아무래도 멀리 있는 사람이 내 원수가 될 리는 없다. 대부분 내 삶과 관련된 인물들 중에서 가까이서 삶을 공유하며 살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바람에 가까운 이웃이 이러저런 이유로, 내 애증(愛憎)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바람에 그 원수 된 이들은 끊임없이 내 삶에 직간접의 영향을 끼친다.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하늘 백성으로서의 내가 그런 원수된 이를 어떻게 대하여야 좋을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겠지만, 그럴 수 없이 삶이 얽혀 산다면, 어떻게 할까? 특히 오늘의 세 본문은 모두가 그런 원수된 자들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들은 우리에게 일관(一貫)된 요구를 한다. 그것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다(롬12:21). 그 방법들을 다시 보자.


- 서신서는 원수 갚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며, 선대(善待)하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했다(롬12:19-20). 율법은 원수 갚지 말고, 원망도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내 자신과 같이 하라고까지 요구한다(레19:18). 복음서는 아예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도 주라고 하신다. 비판도 정죄도 말고 용서하라. 그의 필요한 것도 주라고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라 명하신다(눅6:35-38절). 


- 이런 ‘원수를 친구로 삼는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상에서 이웃들에게 펼쳐야할 높은 품격이요 힘이고 가치라는 점을 역설하신다. 이런 일은 육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원수와 죄인을 속죄하시려고 저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신앙 안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그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믿음과 의지로 나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가능하게 도우신다.  


o 우리 거류민들은 본향 중심의 생활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 땅의 생활을 천년만년 할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다만, 그 하늘은 죽어서 가는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찾아야할 하늘임도 명심해야 한다. 이웃 사랑은 그 핵심이다. 이웃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되기 때문이다. 선한 행실과 그것도 주도적으로 행할 행동과 원수까지도 친구로 삼을 사랑을 펼쳐 가야할 과제가 우리에게 평생토록 주어진 삶의 과제들이다. 바로 여기서 승리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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