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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2-07-20 (수) 07:58 2년전 960  

본문)  계 19:1~10, 미 4:1-4, 마25:31-46


강림 후 일곱째 주일이다. 최근 급격히 상황이 호전되었던 코로나가 다시 기운을 내고 있는 추세여서 염려스럽다. 게다가 가장 우려되는 일은 치솟는 물가고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전에 들어가면서, 석유와 가스와 식량 등의 생필수품의 수급 등이 힘들어지면서, 온 세계 경제가 장기 침체기가 들어가고, 인플레이션과 고금리와 고물가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런 중에 그런 추세에 대한 우리 집권층의 대응력이 너무 빈곤한 것도 더욱 큰 위기이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동맹 강화책동에 우리 정부가 앞장서며 겁 없이 뛰어든 일이다. 그 바람에 한미일 삼각 체제를 바탕으로 북한과의 관계 악화는 물론, 중국과의 대립각을 세우려는 미국의 패권주의 정책에 우리가 철없이 방패막이가 되고 있다. 그 바람에 우리의 대(對)중국 무역이 급격히 적자로 돌아서면서, 계속하여 해외 무역의 적자 폭이 커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의 대외 경제 신용도도 신용 불량국 50개 국가들 속으로 떨어졌다. 


일본을 향한 모욕적인 친화 정책을 펴는 일도 우리의 자존심을 크게 훼손한다. 전혀 회개할 줄 모르고, 우리보고 먼저 잘못을 고치라고 압박하는 일본에게 왜 그렇게 친절해야 하는가? 대체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보니, 그 동안 지지하던 보수 세력도 크게 요동하는 듯하다. 대통령의 무능과 무대책에 국민들이 통탄해하는 실정이다. 지난 정부가 쌓아 올린 국가의 위상과 자존심이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사태를 이제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늘에 주시는 세 본문 말씀들을 통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한다. 심판은 결과만을 묻는 과정이기에, 회개나 반성의 내용이 없이 오직 단호함만을 드러낸다. 물론 본문은 최후의 심판을 안겨 줄 인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펼쳐질 심판의 내용이라서, 아직은 우리에게는 여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지금 즉시 못 고치면, 치명적인 최후는 금방 내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 본문은 서신서인 계시록이 우리 심판의 최후의 무대요 종합적인 성격에 대한 예표로 보이기에, 구약과 복음서 이후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려고 한다. 그런데 구약의 성부 하나님의 세상 심판과 복음서에서의 성자 예수님의 세상 심판에 대한 주요 포인트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계시록은 이 모든 것을 녹여낸 종합적 판단을 담아낸 곳이다. 


먼저 구약의 미가 예언자는 세상 끝 날에 온 세계인들이 여호와의 집(산)에 몰려 올 것을 예견한다. 그곳은 율법과 여호와의 말씀이 나오는 도성 예루살렘이다. 그곳에서 여호와는 몰려든 민족들을 심판하시고 판결하신다. 그 기준은 자신의 삶이 평화였느냐 다툼이었느냐에 있다. 복음서의 심판 이야기는 놀랍다. 그 심판 기준이 매우 긴장감을 주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 사랑에서까지도 확인시키면서 살아왔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미래 예표형(型) 기록인 계시록은 하나님의 지구촌 심판에 대한 하늘 생명들의 찬양으로 가득하다. 그 주요 내용은 두 가지 차원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이 세상의 큰 음녀였던 제국(帝國)을 꺾으신 여호와의 심판이 의(義)로우셨음을 찬양하고 있다. 또 하나는 그런 제국의 학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올바른 행실과 품격으로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는 하늘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되는 복을 내리신 조치를 찬양하고 있다.


1. 예언서 / 미4:1-4/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고”


미가 예언자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시온) 성전에서부터 온 누리에 평화와 정의를 이루실 미래를 내다보았다. 그 세상은 이스라엘을 세계가 지배하는 힘과 무력의 나라로 세움으로써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평화와 화해의 말씀을 통해 되는 것이었다(사2:1-5참조) 


1) 예언자가 본 말(末)일은 인류 최후의 날이 아니라 메시아가 오셔서 활동하실 때이다.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기이다. 그러기에 이때는 예수의 지상 사역 이후, 성령이 오셔서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온 세상에 교회들이 세워지고, 그로 인한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들은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교회 공동체로 들어올 것을 예고한 내용이 분명하다.(1-2절참조)


2) 특히 그 때의 몰려오는 이방인들의 희망은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을 가르치는 곳인 새 예루살렘(시온)이었고 교회 공동체이기도 하다(2절). 


3) 하지만 그렇게 모여든 백성들을 향하여 메시야께서 펼치신 나라는 평화(平和)가 실현되며 사랑과 화해와 용서가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곳이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전쟁은 연습도 하지 아니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 수고로 노동의 열매를 따먹게 되는 매우 정의롭고 공의로운 곳이었다(3-4절 참조). 불의나 불공정이나 무력의 힘은 전혀 발붙일 만한 곳이 아니었다. 


4) 그러기에 그 나라의 구성원이 될 자격(資格)의 기준은 그가 메시야의 뜻을 따라서 평화와 정의와 공의를 위해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여부에 달렸다(3절, 상). 탐욕과 불의와 혈육의 힘의 논리를 좇은 자들은 철저히 배제당하는 곳이었다.  


2. 복음서 / 마25:31-46 /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성자인 예수의 심판 예고는 더욱 예리하고 날카롭다. 그는 당신이 다시 오실 마지막 그 날에는 어떤 심판이 펼쳐질 것인지를 매우 생생히 예고하셨다. 그것은 당신 앞에 나온 모든 민족들을 구분하시되, 마치 목자가 양을 오른편에 두고, 염소를 왼편에 두듯이 구분하시겠다고 천명하셨다(31-32절). 


양과 염소는 낮에는 함께 어울려 산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갈라진다. 염소들은 밤에 양들보다 더 따뜻한 잠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에스겔서에 의하면, 평소 염소는 양에 비하여 행동이 거칠고 이기적이어서, 함께 지내는 양들에게 숱한 어려움과 피해를 많이 안겨주는 짐승임이 드러났다(겔34:17-22참조). 그런 무례와 거친 행동을 이웃에게 보이고 사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목자의 심판과 분리를 여기에서 예고하신 것이다(롬14:10 참조).   


이 대목을 보면, 주님은 평소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엄중하게 지켜보고 계신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지내는 이웃들을 향해서 어떤 마음과 태도를 보이고 살고 있는 지를 지켜보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 사랑을 말로만 하고 사는 자들인가, 아니면 그 사랑을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향해서까지 펼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매우 신중히 지켜보신다는 것이다. 


무례하고 배타적인 크리스쳔인가, 아니며 따뜻하고 포용적인 크리스쳔인가를 보신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크리스쳔인가, 헌신적이고 배려하는 크리스쳔인가를 보신다. 자기중심적인가, 이웃 중심적인가를 보신가? 사익 중심인가, 공익 중심인가를 보신다. 이런 모습은 평소에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심판과 결산 때에는, 결정적인 판단의 지표가 되는 부분이다. 내가 주님의 오른편으로 배치될 것인지, 왼편으로 버림당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짓는 지표(指標)들이다. 


이것은 곧 들은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을 그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고 관념적(觀念的)인 차원에만 두고 살았는지, 아니면 삶의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있음을 드러내고 사는 지의 여부(與否)를 당신의 최후의 심판과 분리의 기준으로 삼고 계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말씀을 머릿속에 만 두고 사는 자인지, 가슴 속에 두고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지를 냉철히 지켜보고 심판하시는 주님이시다.  


1) 그런데 우리들을 양과 염소로 구별 짓게 하는 구체적인 지침(指針)들이 보인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구체적인 자선적(慈善的) 행위의 목록들을 보자. 내용은 대략 6가지였다. 


☞ 상대가 배고파 할 때 어떻게 하였느냐, 목마를 때에 어떻게 하였느냐, 나그네 되었을 때 어떻게 하였느냐, 헐벗었을 때 어떻게 하였느냐, 병(病)들었을 때에 어떻게 하였느냐, 그리고 옥(獄)에 갇혔을 때에 어떻게 대응하였느냐 였다(35-36절, 42-43절 참조). 


2) 이런 기준을 제시하면서, 당신의 오른 편에 있게 된 자들에게 이런 축복을 하셨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相續)하라.’(34절)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혀 주셨다. 그들 모두가 당신이 앞의 6가지 상황에 처하여 힘들었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마시게 하였으며 영접해 주었고 옷을 입혔으며 돌보았고 와서 보았다며 그들의 베푼 친절과 자선의 행위를 기억하고 계셨음을 말씀하셨다(35-36절).   


3) 이에 놀란 것은 그 판정을 들었던 당사자였다. 자기들은 주님에게 직접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어찌 자기들이 주님께 그런 환대를 베풀었다고 말씀하시느냐는 것이다(37-39절). 그래서 건너온 주님의 답변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곧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  


4) 이런 현상은 정반대 편의 경우, 곧 주님의 왼편에 배치되어,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떨어지게 되는 저주(詛呪)를 받게 된 자들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42-45절). 그들은 그들 주변의 작은 이웃들의 고통과 고난을 외면하면서 자기 일에만 몰두하여 산 것이, 바로 그들이 믿는 주님을 향해서도 그렇게 취한 행위였음을 모르고 살아론 것이다. 결국 그들은 특별히 악행을 저질러서 심판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감당해야할 행동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온 무(無)행위 때문에 저주의 심판대에 서게 된 것이었다(24-30절 참조).


5) 실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흔히 구원의 이중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틀 속에서 산다(마22:34-40 참조).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이 사랑 계명을 분리하여 생각하고 실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께만 드리면 되고, 이웃 사랑은 사람에게만 베풀면 된다는 생각이다. 이 둘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6) 하지만 이 분문은 그러한 우리의 고착된 이중적 인식과 구원론에 대한 의식구조를 파괴한다. 아니, 매우 경이롭게 이 두 사랑들의 내적(內的)인 통일을 보여준다. 하나님 사랑을 이웃 사랑의 현장에서 구현하지 않으면, 그건 제대로 된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론적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나 온정주의는 결코 구원의 대안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 대신, 궁핍과 고독에 빠진 자들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만나기를 권한다. 그들을 도와 주님께 기쁨을 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래야만 우리는 비로소 영벌(永罰)이 아닌 영생(永生)을 상속할 것이다.  


3. 서신서 / 계19:1-10 /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은 옳은 행실로 산 성도만이 입게 된다”  


계시록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모든 최후의 심판들이 의롭고 정당한 것이었음을 시인하며, 그에 ‘할렐루야 아멘’으로 영광 돌리며 찬양하는 내용들이다. 거기에는 하늘에 있는 허다한 무리들과(1,6절), 24장로와 4생물과(4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종들(5절) 모두가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통치를 찬양한다. 우리가 이제 하늘의 이 거룩한 마지막 심판적 행사를 주목해야할 이유는 이 장면은 영원한 그 날에 펼쳐질 현장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의 내용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곳에는 두 갈레의 심판이 예고됐다. 

1) 하나는 바벨론 제국(帝國)을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고 또 완전히 패망시키신 일이다. 바벨론은 지상에서 신권을 행사하며 모든 나라와 민족 위에 군림한 모든 제국들의 상징이다. 이런 제국은 인류사에서 끝없이 부침(浮沈)을 거듭하며 등장해왔다. 이스라엘도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으로 이어지는 제국들의 통치하에 늘 탄식하고 신음해 왔다. 


제국들은 언제나 자국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주변의 약소국들을 억압하고 짓밟으며 괴롭혀 왔다. 자기는 한없이 부패하고 각종 우상들에 휘둘리며 지내다 망해갔다. 주님은 그들을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淫女)’라고 규정하셨다(2절). 그 제국의 역사는 21세기인 지금도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 등으로 여전히 위세를 부린다. 그러기에 주님에게 그들(과 그 추종자들)은 언제나 심판의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제국들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2) 동시에 의로우신 하나님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여시면서, 거기에 초청받게 된 이들에게 큰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 주신다(7-9절). 이 장면은 세상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끝내면서, 어린 양 예수께서 신부를 맞이하는 정식 결혼식이 개최되어, 그 신부와 함께 영생을 향유하게 되는 일이 영생의 시작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신부는 누군가? 지상(地上)의 교회이다. 그리고 그 예전에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예복으로 입고 초청된 이들은 누군가(8절)? 


바로 앞에서(미가서와 복음서에서) 확인된 선행을 좇아 살아온 믿음의 사람들이다.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며, 고난 받는 이웃들을 하나님 사랑의 대상으로 알고 사랑하고 섬기며 살면서 옳은 행실을 추구해온 당신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에서 의를 추구하기 위하여, 숱한 외로움과 따돌림과 손해 당함을 감수하면서도-, 끝내 그 시련들을 견디어냄으로서 그들이 진정으로 복 받은 자들임을 그날 그 자리에서 확인받게 된 것이다(9절,막13:13 참조). 


o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과연 그 최후의 영광의 자리에 내가 있을 것이냐는 점이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찬송가사가 생각나게 하는 순간이다. 나는 그 순간 그곳에 있을까! 오른 편인가, 왼편인가? 이제 그 날 그 때에 어린 양의 초대장을 받아들고 기뻐 뛰는 내 모습을 꿈꾸자. 이 일은 평생을 걸고 매달려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평화중심, 이웃중심의 따뜻한 삶과 함께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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