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계 2:8~11, 암 5:18-24, 막 13:1-13
강림 후 여섯째 주일이다. 무더위의 위세가 강해지고 있고, 코로나의 기세도 되살아나는 분위
기이다. 부디 주께서 여러분을 잘 지켜주시기 바란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는 이웃나라인 일본
의 전 수상인 아베 신조가 자국민의 총격으로 피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바람에 일본은 물
론 온 세계가 큰 충격을 받으면서, 그 영향이 어떻게 번질 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매우 불행한 일로서, 절대 환영할 수 없다. 야만적인 행위이고, 그
런 폭력으로는 세상의 그 어떠한 문제도 결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베 같은
정치적 거물의 피살사건은 자기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에게까지도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우리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와 얽힌 관계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아베는 평소에도 자기 나라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만들려고 현재의 평화헌법을 개정하
고자 꾸준히 노력해온 호전적인 인사였다. 그 바람에 그는 일본 극우세력의 동력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종군 위안부 사건과는 악연이 깊어서, 그와는 도저히 손잡을 수 없는 처지에 들어
가 있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의 국토인 독도를 자기네 것이라고 억지 부리는 주역이기도 하
다. 지금도 그 주변엔 다수의 혐한(嫌韓) 세력들이 포진되어서, 우리를 꾸준히 괴롭히기도 한
다. 회개할 줄 모르고 뻔뻔한 국수주의자란 인상만 남긴 인물이었다.
역사는 속일 수 없다. 그 많은 사건들 속에는 물론 놓치고 묻히는 일들도 많겠지만, 그러나
못된 악행을 그토록 저지른 일들이 많은데, 어찌 역사로부터 외면당하고 말 수 있겠는가? 게
다가 하나님은 역사의 주이시지 아니한가! 아베의 피살은 어떤 흐름으로 번져갈 것인지를 더
지나보아야 알겠지만, 그러나 그 개인으로서는 매우 허무하게 죽임 당함으로서, 하나님의 엄
중한 심판대에 올랐다. 부디 그의 죽음이 생산적인 한.일 관계에 큰 밑돌이 되기를 바란다.
사실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심판이라는 점에서는 어찌 아베의 경우만 해당되겠는가? 그 생
명의 소중성 면에서 결코 못잖은 우리 개개인 모두를 향한 심판도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
가도 해당 되고, 교회도 해당되며, 개개인은 물론이고 신자들 모두도 해당될 것이다. 여기 심
판을 말하는 데에는, 예수님의 다음의 말씀이 표준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되리라‘(요5:29참조).
마침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에 오르게 될 대상들을 향한 경고들이다.
동시에 불의의 곁길로 빠져들지 아니한 믿음의 행위에 대한 위로의 말씀들도 있다. 그리고 끝
까지 잘 견디어서 구원의 길에 들어오라는 격려와 당부의 말씀들도 담겨 있다. 그런데 이 대
상자들은 모두 세상 불신자들이 아니라, 모두가 변질되고 흔들리며 불의에 빠진 신자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 두자.
참고로 오늘의 증언의 순서는 서신서 부터가 아닌, 복음서의 내용에서부터 말씀을 풀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복음서의 내용 속에는 그 다음의 구약의 내용과 서신서의 내용들 모두를 다 품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즉 복음서의 첫 부분인 1-2절에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고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잘못 믿는 신앙 세력들에 대한 심판적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구약 아모스의 책망과 연계된다.
복음서의 둘째 부분인 3-8절과 셋째 부분인 9-13절은 서신서인 계시록 부분과 함께, 주님의
당신의 제자들과 교회들을 향한 경고와 위로, 그리고 시련기에 대응할 분부의 말씀이 겹쳐서
서술된 듯하기 때문이다.
1. 예수님은 성전이라도 제 역할을 상실하면 버리신다 / 복음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도 불의에 빠지면 외면하신다 / 예언서
성령님은 혈육이 유대인이라도 교만하고 사랑을 잃으면 마귀 자식으로 보신다 / 서신서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시각은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성전 자체의 가치와
소중함을 외면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제 역할을 수행
하지 못한 체, 오로지 물질과 수익사업 등에 더욱 관심을 집중하는 모습에 대한 강한 혐오감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주님은 ‘기도하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며 질책하시면서,
성전의 정화를 위한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으셨다(막11:11-17, 요2:14-16참조)
그러기에 예수님에게는 헤롯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적인 화려함에는 전혀 감동이 없으
셨고, 오히려 그 성전이 머잖아 처절히 파괴될 것을 미리 내다 보시면서, 제자들도 그런 상황
에 미리 대비하게 하셨다(1-2절). 주님이 보신 그 성전의 미래는 어떤 것이었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절). 사실 그 예언대로, 이 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
의 군대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통곡(痛哭)의 벽’이 그 잔해이다
2) 주님의 이러한 세상의 성전을 향한 비판적 시각은 그의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시각과도 흡
사하다.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 드러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된 신앙과 그 행위들을 향한 여
호와의 책망에서도 그 모습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누구였나? 남 왕국
출신이면서도 북왕국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 활동을 한 별난 선지자였다. 신분도 유대 땅 드고
아에서 양을 치던 목동출신이었고, 이스라엘의 ‘최초의 문서 예언자’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40여년 장기집권을 하면서 (주전787-747년) 정치적
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번영을 누리던 시기였고, 앗수르 제국도 아직은 힘을 키우고 있는 때였
다. 그런 환경에서 아모스는 뜻밖에도 하나님의 위탁(委託)을 받아, 배부르고 자신감에 차 있
던 사회와 정치 및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강한 적군의 침공을 받아 사로잡혀 갈 것을
강하게 선포했다(참조-주전722년에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함). 얼마나 황당해 했을까?
그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본문에 나타난 원인들 중심으로 보면, 대략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들의 형식적 예배 행위가 심각했기 때문이다(18-20절). 그들은 외형적으로는 자기들
이 ‘여호와의 날’을 사모한다면서 경건의 모양내기에는 힘쓰고 있었으나(성대한 예배 & 요란
스러운 절기 제사들), 실재의 삶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아니할 뿐더러, 서로의 사랑도
못하며 지내는 등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동들을 거침없이 자행했기 때문이다(21-23절 참조).
그런 위선적 경건행위들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의 외면을 당하는 무서운 결과로 나타날 것임
을 통보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사모하던 그 여호와의 날이, 축복의 날이 아니라 어둠과
저주의 날로 나타날 것이다. 그 날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자를 피
하려다가 곰을 만남과 같고, 집에서 벽에 손을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은 상황처럼 나타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18-20절).
더 큰 문제는 그들 부유층들이 깊은 부패의 늪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부정부패의 구조
속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의 주범이 되어 있으면서, 하나님께는 경건한 체하고 복과 구
원을 요구하며 지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찬송과 예물을 절대 기뻐하지 아니
하셨다. 그리고 다만 그들에게 이것을 요구하셨다. ‘오직 정의(正義)를 물 같이, 공의(公義)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라’(24절). 사회적 약자 사랑을 외면한 자를 향한 경고였다.
3) 서머나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받은 교회였다. 그런 데에도 그들 내부에는
그들을 괴롭힌 악한 무리들이 있었다. 바로 개종(改宗)해서 교회에 들어온 유대인들로서, 그들
은 이방인 중심의 서머나 교회에서 늘 자신들은 ‘참 이스라엘’이라고 뽐내며 산 자들이었다(9
절 하). 그러면서 자기들의 율법적 기준에 따라서 동료 기독교인들을 비방하고 고발도 서슴지
않아서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무리들이었다.
주님은 이들을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라고 규정하셨다(9절.하). 진정한 개종자
가 못되고, 포기하지 못한 율법주의와 그 속물로서 형제들을 심판하고 정죄하며 교만으로 온
교회를 어지럽히고 신실한 자들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런
위선적 인물들을 냉정하게 구별해 내신다. 그리고 그들 위해 둘째 사망도 준비하셨다(11절).
2. 예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제자들을 일깨워 주시고 돌보시고 무장 시키신다 / 복음서
하나님은 언행일치된 백성들과 정의와 공의의 삶을 준수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 예언서
성령님은 환란과 궁핍에서도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신다 / 서신서
1) 예수님은 성전에 관한 예고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4명)이 그 시기와 징조에 대하여 궁금해
하며 물어오자, 그 사전 징조들과 주의할 일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하셨다 :
-거짓 선지자들과 메시아들이 출현하여 서로 ‘내가 그다’라며 미혹할 터이니 주의하라(5-6절).
-난리와 소문들도 무성할 것이고, 민족 간에 나라 사이에 전쟁과 싸움이 발생하기도 하고, 처
처에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이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게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7-8절).
그와 함께 제자들 자신에게 발생할 심각한 일들도 예고하시면서 이렇게 언급하셨다(9-13절) :
-한마디로, 제자들에게는 ‘피의 증언’을 감내(堪耐)해야 할 때가 올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것은 스승 예수께서 세상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그러하리라는 것이었다
(13절, 요16:8-11절 참조). 제자들로서는 피할 수 없는 ‘최후의 일전(一戰)’이기도 했다.
-즉 사람들이 그들을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을 회당에서 매질할 것이며, 예수로 인한 심문을
이유로 그들은 권력자와 임금들 앞에 서게 되리라고 예고를 하셨다(9절). 놀라운 것은 그 때에
그들을 넘겨주는 사람들이, 남이 아닌 자신의 혈족들인 가족(家族)들이라는 점이다(12절). 이
는 무엇을 말하나? 천국 가는 가족과 지상의 가족은 똑같지 아니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신
것이다. 가족 중에도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택한 자들은, 어쩔 수 없음을 시사하신 것이다.
-그 일들에는 고난이 따르지만, 복음(福音)이 만국에 전파되는 계기도 된다고 보셨다(10절).
-여기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매우 특별한 사전 당부(當付)의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그 때에
무슨 말로 박해자들에게 증언할 것인지를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유는 너
희와 함께 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너희가 답변할 말씀을 그 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1절).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련과 미움의 공세에서도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일이다, 구원은 바로 그
너머의 지평(地坪)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13절). 여기에서 ‘끝’이란 죽음이나 순교를 의미
하는 것이 분명하다(눅21:19, 계2:10절). 거기에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충분한 위로와 평안의
선물이 준비되어 있음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계시록의 서머나 교회는 그런 주님
의 분부를 잘 지켜내어 영원히 칭찬 받는 교회공동체의 모델이 되었다. 그 내용을 보자.
3.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이 씌워줄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자들을 찾으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결코 심판이나 정죄만을 일삼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 일에는 큰 아픔을 가
지신다. 오히려 칭찬과 위로와 격려하시는 일에 더욱 적극적이시다. 그런 점에서 소아시아에
있던 7교회들 중에서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받았던 아주 좋은 모델 교회였다. 주님을 기쁘시게 한 교회였단 말이다. 무엇 때문이었는가?
1) 믿음 안에서 얻게 된 영적 부요를 유지하기 위하여, 환난을 당하고 가난해지는 일을 마다
하지 않은 지조(志操)와 절개(節槪)를 갖춘 교회였기 때문이었다(9절 참조). 당시의 서머나는
이름난 포도산지로서 포도주 산업과 관광업 등으로 매우 풍요를 누리던 곳이었다. 게다가 각
종 이방 종교들과 유흥 문화가 성업을 이룬 곳이기도 했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도 숭배한 곳
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곳 지역민들은 물론 신자들도 가난을 모르고 지낼 정도였다,
2) 서머나 교회는 이러한 환락의 도시문화에 동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좇아 절제와 가난의
영성을 소중히 여기며 그런 문화를 거부했다. 그 바람에 지역민이나 동료인 유대 개종자들로
부터의 비난과 조소도 당하면서 미움을 받고 살았다. 당연히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중에 오직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이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됨을 기뻐한 것이다. 그들은 행동으로 세상의 부(富)가 아닌
믿음의 부유를 선택한 것이다(9-10절, 막13:9-13절 참조).
3) 그런 신실한 믿음의 교회를 지켜보신 주님께서 어찌 침묵하실 수 있겠는가? 요한을 통하여
주님은 그들을 이렇게 칭찬하셨다.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
니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
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0-11절)
o 우리는 지금 내 신앙의 진정성을 묻는 숱한 유혹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세상의
흐름의 물결에 편승하여 내 신앙의 뿌리도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점검해야 한다. 형식
적인 신앙만으로는 절대 둘째 사망을 피할 수 없다. 세상의 불의한 일에 편승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죄악에 빠져서도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예수와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믿음과 영원한 생명을 택하고자, 환난과
궁핍도 불사한 서머나 교회의 영적 부유를 우리도 취해야 한다. 이는 세상과의 제법 긴 싸움
일수도 있기에, 성령의 강한 도움이 필요하다. 부디 끝까지 견디어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