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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5)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2-07-05 (화) 10:12 2년전 955  

본문)  고전 12:1~11, 슥 4: 1-14, 눅 17:5-10 


오늘은 강림 후 다섯째 주일이다. 무더위의 위력도 강해졌다. 산천초목들도 크게 무성해졌다. 게다가 장마철의 습함도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으니, 여러분 부디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듣자하니, 7월부터는 횡단보도 우회전이나 건널목이나 어린이 보호구역이나 회전 교차로에 관련된 교통법규들도 강화되고, 일시정지에 따른 단속도 강화된다고 한다. 자동차는 매우 편리한 것이지만, 그것을 즐기고 살려면, 거기에 관련된 교통법규(交通法規)에도 함께 정통하지 않으면, 오히려 많이 불편해질 터이니 주지하시기 바란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디 차량(車輛)뿐이겠는가? 가까이는 우리의 몸이나 개인 내지 가정이 소유한 일체의 것들에도 항상 조심하고 지켜야할 내규(內規)들이 있다. 평소에도 이런 것들에 유념해야 할 것은, 만일 이런 점에서 소홀하면 바로 우리의 몸에 이상이 생겨 병이 든다거나, 삶에 다양한 불이익들이 발생하면서 우리의 삶의 질(質)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모두가 법(法)이 있고, 내규(內規)가 있다. 부부가 되는 데에도 있고, 부모가 되는 데에도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되는 데에도 있다. 한 나라의 국민이 되는 데에도 있고, 한 공동체의 회원이나 고참과 원로가 되는 데에도 있다. 무조건 때가 되고, 태어나면 거져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맞이하면 물론 되기는 되는데, 대부분 엉터리가 된다. 배에도 길이 있고, 비행기도 좁은 하늘 잘 살펴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그 단계 단계마다, 변화와 고비마다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아마 평생을 배우고 훈련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처녀가 되고 총각이 됨에도 필요하고, 홀아비 되고 과부 되는 일에도 필요하며, 죽게 되는 순간에도 그 안내가 필요하다. 높아지고 책임이 큰 자리일수록 배움과 훈련은 절대적이다. 대통령이 대비 없이 되면 그 나라와 백성은 어찌될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은 대체 어떤 부분에 대하여 정통하여서 살아가야 할까? 사실 우리는 매우 독특한 무리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이는 세상 세계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도 배우고 익히며 사는 존재들이며, 순간적인 땅의 세계만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의 세계에 대하여서도 끊임없이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무엇이 악하고 선하며, 불의하고 정의로운 지도 함께 배우고 살아가고 있잖은가-!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는 배 이상, 크고 낯설고 놀랍고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면서 살아가는 항해인(航海人)들이다. 마치 ‘영적 콜럼버스’라 할까! 그런 존재가 우리 기독교인들이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큰 일과 역할(소금과 빛)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본래 배우고 익히면, 그만큼 그 발견한 영역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게 되는 존재가 아닌가! 교회의 제(諸) 모임들은 그런 과제 해결을 위한 정말 탁월한 선물들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받게 된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한 이 부분은 매우 주목된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12:1)


바울의 이런 신령한 것에 관한 지식을 가져달라는 요청은,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 신령한 것에 무지하여 겪게 된 영적 대혼란과 곤경 때문에 발생한 안타까운 일들 때문이었다. 즉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신령한 선물들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가진 것이 복(福)이 아니라, 화(禍)가 되는 사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소중한 은사들을 자기 자랑과 자만의 기회로 만들면서, 교회의 분열의 도구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고전1-3장 참조)


그 바람에 고린도교회는 풍요 속에 혼란의 깊은 상처만 남겼고,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뜻은 땅에 묻은 체, 하나님의 영광만 가리고 말았다. 이는 마치 기본과 윤리가 없이 부자 된 사람들의 경우와 같고, 인간도 못된 자들이 고관이 되고 권력자가 된 경우와 같았다. 준비 없이 배우자가 되고 부모가 된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영적 기초가 없이 목회자가 된 이들도 해당되고, 깨어있는 성도가 못되기에 좋은 목자 모시기가 불가함도 해당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경우에 ‘무지가 병(病)이며 악(惡)임’을 깨닫고, 제대로 배우고 익혀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보다 높고 크고 넓고 긴 차원의 세계에도 들어 갈 수 있어야겠다. 특히 신령한 세계를 제대로 배우고 익혀서 풍성한 하늘의 축복을 받아야 하겠다.


1. 서신서 / 고전 12:1-11 /  “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전12장은 은사의 장(章)으로 알려졌다. 은사는 재능이며 탈렌트(talent)이다. 그렇다면, 먼저 묻자. 은사는 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내가 원해서 생긴 건가? 아니면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받아낸 것인가? 대답은 분명하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받아서 갖게 된 것이다. 조상의 덕도 크지만, 그러나 더욱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은사들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일까? 


주신 분의 뜻 때문이다(11절). 무슨 뜻인지는 쉽게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은사는 귀한 것이며, 다른 이보다는 다소 차이 나게 받은 것이어서,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매우 자부심도 생기고, 자랑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마치 자기 것인 양 뽐내거나 교만하거나 사익(私益)중심의 도구로 사용하면은 큰 잘못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고린도교회였기에, 그들은 큰 은사를 받고서 큰 시험에 휘말리고 만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한 상식과 지식을 일깨우고자, 바울은 은사의 내용과 그 공급된 이유를 말해준다. 그 핵심 이유는 바로 ‘모두를 유익(有益)하게 하려 하심이라’이다(7절). 여기에서의 유익은 본인 개인적 사익(私益)이 아니라 공익(共益)을 말한 것이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자들에게 필요한 은사와 재능을 부어주셨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만한 이유들을 설명하고자, 바울은 신령(神靈)한 것(선물/영)들에 대하여 집중해서 교육한다 :  


1) 사람은 매우 자율적(自律的) 능력을 가진 존재인 듯하지만, 사실은 그에게 ‘어떤 영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대로 말하며 사는 타율적(他律的)인 존재일 뿐이다. 예컨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사는 세상 사람들은, 말 못하는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 산다. 반면에 하늘의 신령한 영인 성령을 받은 이들은, 예수가 주(主)라고 고백하며 산다. 성령이 그를 ‘예수는 주이시다’고 고백하게 하기 때문이다(2-3절).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실존(實存)이다. 


2) 이를 계기로 바울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들에 관하여 정리된 가르침을 제공한다. 이는 삼위(三位) 하나님의 인간과 교회를 위한 놀라운 역할 분담에 관한 특별한 정보이다. 여기 그 놀랍고 새로운 삼위 하나님의 특성 있는 사역들을 살펴본다(4-6절). 


① 성부(聖父)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인간에게 활동할 수 있는 무대와 영역의 판을 깔아주신다. 온 세상 만물과 온갖 필요한 생명체들을 창조하셔서 함께 살게 하신 것이다(창1:1). 

② 성자(聖子)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그 무대를 관리하게 될 사람들을 불러 세우시고 일하게 하시도록 교육하시고 훈련하시면서 합당한 일꾼을 만들어내신다. 아버지가 만드신 무대의 주역들을 세우신다(마5:13-16참조). 

③ 성령(聖靈)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 일꾼들이 일할 수 있도록 에너지와 기능과 능력을 주신다(11절,행1:8). 특히 서로 다른 은사들을 가진 이들을 한 군데로 모아(교회 공동체) 시너지(synergy-상승효과)를 내게 하신다. 


결국 성부는 바탕과 무대를, 성자는 일꾼 세움과 훈련과 파송과 선교를, 성령은 그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능과 능력과 은사를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 확장하게 하신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하나로 완성시키는 온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신가-! 


이 일의 과정을 주목하면, 삼위 하나님은 서로 자신의 영역을 주관하시되, 상대의 일이 잘되도록 그 발판을 제공하시고, 결국은 모두가 완성품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매력이고, 가능성이며, 세상과의 완전히 차별화된 하나님 나라의 멋과 맛이다. 이런 일이 삼위 하나님처럼 잘 되어질 때, 우리 교회는 세상에 생명의 빛을 발한다.  


3)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9가지 은사들은(8-10절), 교회의 유익과 선교 활동에 매우 필요한 은사들 중에서 대표할 만한 은사들로 뽑아 소개하였을 뿐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은사들이 사람들에게 이미 부여되어서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9가지 은사들은 현존하는 교회들과 성도들의 삶에 미친 영향들도 매우 커서 중요하기에, 잘 알아 두어야 한다. 


성령은 각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에 부합된 은사들을 나누어 주신다(11절).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주셔서, 성경을 해석하는 다양한 형식을 공급한다(8절). 어떤 이에게는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신유(神癒)를(9절),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分別)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 말함을,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 통역(通譯)함을 주신다(10절). 모두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거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은사 및 영성 활동은 교회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언자 시대에도 성부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도 이미 있던 일이었다. 그 모습을 스가랴서 본문이 전해준다.


2. 구약 / 슥4:1-14 / “이는 힘으로나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기 후에 유대에서 활동한 예언자였다. 당시의 귀환자들의 최대의 과제는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는 일이었는데, 그 일이 생각밖에 힘들어서 많은 이들이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중에, 페르시아 정부의 파송을 받아 온 총독 스룹바벨이 갖은 난관과 좌절 속에서도 기필코 믿음으로 이 일을 끝내겠다는 의지를 품고 성전의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동에 대하여,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라는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으나, 스룹바벨은 하나님이 도와주심을 믿고 삽질을 시작했다. 그러자 여호와의 의지가 담긴 환상이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했다.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순금 등잔대 하나(1-5절)와 두 그루의 감남 나무들의 환상들이었다(6-14절). 총독은 이 격려로 힘을 얻어 더 빨리 성전을 준공하게 된다. 

   

1) 선지자는 처음에 보았던 순금 등잔과 그 위의 기름 그릇, 그 위의 일곱 등잔과 등잔을 위한 일곱 관, 그 등잔대 곁에 좌우로 있는 두 감람나무들이 무엇인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자 주의 천사가 선지자와 스룹바벨을 위하여 그 환상에 담긴 구체적인 메시지를 쉽게 풀어 주었다. 그 환상이 방언이었다면, 천사의 해석은 그 방언의 통역과도 같았다. 그 일은 성전 건축을 위한 ‘스룹바벨의 작은 행동들’에 대한, 여호와의 위로와 약속을 전하는 일이었다.  


2) 스룹바벨의 성전 건축은 인간의 힘이나 권세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될 것’임을 전하셨다(6장, 호1:7참조). 그 바람에 그 동안 큰 산과 같았던 방해 세력들이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平地)처럼 일사천리도 될 거라고 하셨다. 그런 놀라운 성취의 역사 때문에, 백성들은 그 일들이 ‘여호와의 은총(恩寵)’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고도 예고했다(7절). 

 

☞ 3가지 훼방들은 사마리아인들 방해(스4:1-10), 바사 총독들에 의한 공사 보류(스5:1-5), 그리고 총독들의 상소들(스5:6)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제국의 창건자인 고레스 왕의 조서가 발견되면서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스6:1-5참조). 오히려 반대자들이 협력하게 되면서 성전재건이 성취되었다. 여호와의 편드심이 무시하던 자들을 무시당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10절 참조), 


3) 두 기름 부음 받은 종들, 곧 정치인 스룹바벨과 종교인인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연합된 헌신과 충성이 감남나무 두 그루처럼 그리 기억될 것도 예고되었다(11-14절 참조). 


☞ 결국 인간적 여건이나 제한된 환경을 보지 않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개입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제2의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될 수 있었다.  측히 한 사람의 뜨겁고도 진정한 신앙의 힘이 일구어낸 놀라운 쾌거(열매)였다. 


3. 복음서 / 눅17:5-10 /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하라”


신앙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이, 스룹바벨처럼, 참된 믿음의 소유에 있음과 함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세도 잊지 않고 끝까지 그 품격을 지켜낼 때, 그에게 임할 축복이 무엇인지를 일깨운 준 본문이다. 믿음의 중요성 못잖게, 종의 섬기는 자세도 강조된 내용이다. 


1) 사도들이 주님께 요청한 내용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라는 청원이었다(5절). 이는 주님의 가르침을 듣게 될 때(눅14장 이하), 정작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강한 믿음’이라는 점을 통감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이야말로 주님과의 직선 통로가 되어 그의 동행을 견인하는 결정적인 힘이 되고, 그 믿음 여하에 따라서 주위 환경과 상황까지도 일시에 변화시킬 동력(動力)으로 나타날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2) 주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주변과 세상을 크게 바꾸어낼 수 있음을 지적하시면서, (6절), 그런 믿음 보유와 함께 더 중요한 부분도 함께 갖출 것을 일깨우셨다. 바로 종의 겸손한 자세였다. 모든 일에 자기를 부정하고, 그 영광을 주인에게 돌릴 줄 아는 겸손한 종에서만이 믿음의 선한 결과를 끝까지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7-10절 참조). 주인은 그런 종에게 어떤 대우를 해줄까? 상상할 수 없는 방식의 주인의 칭찬과 위로가 제공된다(12:37 참조). 


o 우리는 성령에 의해 다양한 은사들을 받아 살아간다. 그 일로 하나님도 섬기고 교회와 이웃도 섬기고 산다. 다만 절대 주의하자. 내게 은사주신 분의 뜻을 알고 겸손히 감사하며, 하나님과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모두의 유익을 위해 힘써야 한다. 내가 잘나고 탁월해서 내 능력과 배려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면, 분열만 뒤따를 뿐이다. 그러기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고백하면서 나를 일하게 하신 분께 감사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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