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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6.25민족화해주일

관리자 2022-06-15 (수) 11:51 2년전 937  

본문) 롬 6:15~23, 사 54:1-8, 눅 19:1-10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이다. 완연한 여름에 들어서기도 했다. 마침 오늘은 우리 총회가 옛날 1950년도에 있었던 6.25 민족전쟁 제 72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더 이상의 민족 간의 전쟁은 없어야만 한다는 취지 아래, 민족화해주일로 설정하여 지키는 주일이다. 


우리는 몇 년 전에 남북민 전체가 가슴 설레던 때도 있었다. 당시의 우리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의 능라도 체육관에서 북한주민을 상대로, ‘우리 민족은 하나’라는 명연설을 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 때 문 대통령은 ‘우리는 5,000년간을 하나로 지내왔으나, 단 70년의 세월만 서로 갈라져 살아왔다‘면서, 이제는 서로가 협력하여 다시 하나 되는 민족이 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자 북한 주민들부터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문제는 새 정권의 대북 인식문제이다. 여러 가지로 우려가 되는데-, 우선은 북한을 함께할 민족이라기보다는 주적(主敵)이란 인식하에, 각가지 거친 대립적 언행들을 토해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나친 대미 의존도가 강화되고, 심지어 일본과의 군사협력까지도 강화하려는 느낌을 풍긴다. 그 바람에 그 동안 중간자 역할하던 우리나라가 이에는 미국과 일본이란 한편의 줄서기에 동참하면서, 북중러와의 대립각에 빠져든 느낌이다. 멀리 보이던 전쟁의 먹구름이 왠지 또 다시 한반도 상공에 어른거림을 금할 수 없게 한다. 대체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런 중에 우리는 남북화해주일을 맞이한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화해’란 말에 주목하게 된다. 화해란 본질적으로 일정한 자기 손해를 감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모든 화해의 근본이잖은가! 그것도 하나님과의 원수된 자들과의 용서와 화해를 위하여, 전적으로 자기부터 모두를 위한 희생물로서 내어주신 일이 바로 십자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해를 이루려면, 지금의 태도부터 버려야 한다. 주고받기 식으론 안 된다. 


상대의 변화를 견인하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 상대자인 나부터의 대변화가 우선되어야 가능한 것이 바로 화해이다. 따지기만 하거나, 계산만 하거나, 조건만 찾거나, 손익계산의 주판알만 놀리거나, 상대가 나오는 것을 보아서 나도 대응하겠다고 하면 화해는 전혀 불가능하다. 화해는 화해하려는 자가 선의의 주도권을 행사할 때에만 문이 열린다. 내가 상대를 위하여 큰 변화와 낮아짐과 비움을 보여줄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화해의 첫 관문이 열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진정한 화해의 손을 내밀어서, 역사의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저주를 생명과 구원으로 방향전환을 견인한 사례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싸우지 않고도 이겨내는 그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싸워서 얻으려면, 때는 이미 늦다. 모두가 만신창이일 뿐이다. 특히 가진 것이 많은 측의 피해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것을 우리 정부를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이런 진정한 화해의 모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취하신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베푸신 용서와 화해의 손길들, 예수께서 당신을 부인하고 배신한 제자들이나 죄이들에게 찾아가 따뜻한 용서와 화해의 손을 펴주신 모습들, 자신의 탄압과 배척의 선봉이었던 사울에게 화해의 손을 펴신 부활 예수님의 모습들-, 이런 배신자를 용서하고 다시 불러 쓰시는 하나님이셨기에 이 병든 역사는 멸망하지 않고, 새롭게 회복시켜서 재출발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주일에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상대를 대하는 우리의 열린 마음이다.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화목케 하라고 부르심을 받고 살아온 우리들로서는(고후5:19참조), 내가 먼저 화해의 주도권(主導權)을 과감히 행사할 것을 찾아서, 상대에게 내가 먼저 변하였음을 보여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말씀과 그 모델에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 후에, 우리는 성령과 함께 그 화해의 주역으로 과감하게 나서는 결단을 보여야 한다. 그게 세상을 향한 성자 예수님의 선택이었고, 아프리카 미개인을 향해 찾아간 A.슈바이쳐의 결단이었으며, 빈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제공한 프란시스코의 선택이었고,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자기의 양자로 영접한 손양원 목사의 선택이었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세 본문들은 그런 화해를 견인할 동력을 제공하는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동이 소개되어 있음을 본다. 


1. 서신서 / 롬 6:15-23 /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


바울은 주의 사도(使徒)가 되기 전, 지독히 완벽한 율법주의자였고 반 예수주의자였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고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신실한 스데반 집사의 순교도 그의 손에 이루어질 정도였기 때문이다(행8:1). 이런 모습은 믿는 자의 주되신 예수님에게는 참으로 분노와 보복의 징벌을 내리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바울에게 예수님은 어떠하셨던가? 그 크신 능력으로 바울을 징벌하고 정죄하셨던가? 


아니다. 그 정반대였다. 주님은 당신의 그 크고 놀라운 능력을 그 바울을 정죄하고 심판하려는 데에 사용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아주 사랑하고 끌어안는 데에 사용하셨다. 그것은 주님이 눈이 멀고 판단이 흐려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그런 바울의 행동이 당신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沒理解)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셨기 때문이었다. 만일 바울이 예수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바울은 박해자가 아니라 충성자로서도 능히 앞장 설 수 있는 인물로 보셨기 때문이었다.

    

결국 예수께서는 바울에게 제대로 당신을 알고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자 결단하셨다. 그래서 친히 부활하신 몸으로 그를 찾으셨다(행9장 참조). 그것도 해외에 흩어져서 있는 예수 믿는 성도들을 체포하려고 이방의 다메섹 도성에까지 말을 타고 들어가던 그를 찾아서, 그를 빛으로 만나신 것이다. 바울에게는 카이로스를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그가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란 소식을 접한 바울은 대 충격에 빠지면서, 결국 삶의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자신의 율법적 논리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예수의 놀랍고 기이한 행보를 경험하면서, 그는 예수 안에 열려 있는 정반대의 세계에 빠져들고 말았다. 법 논리로 따지면 자기는 예수에게 징벌의 대상인데, 도리어 예수는 자신을 끌어안으시는 모습을 접하면서, 그가 의지해 온 법 논리보다 더 강하고 생명력을 가진 예수의 은혜의 논리, 곧 ‘긍휼과 자비와 용서’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 순간에 바울의 삶의 지배권이 율법에서 은혜의 복음으로 넘어감을 경험하였다. 


1) 그가 오늘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모세의 율법에서 예수의 복음에로 자신의 삶의 주인(主人)을 교체한 경험이 준 본질적 상황 변화에 관한 증언은 이러하다. 


예수를 인하여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선 바울은 그 세계의 놀라운 복된 소식을 밝힌다. 곧 이 세계를 접하고 보니, 그 동안 자신이 추구해온 법을 앞세워 따지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행위는 결국 ‘죄의 종’노릇을 했던 것이며 사망에 이르는 행위이었음을 고백한 것이다(16-17,21절). 그러면서 자신은 이미 은혜 안에 옮겨오게 되면서, 죄에서 해방된 ‘의(순종)의 종’(16,18-19절)이요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영생(永生)에 이르게 되었음을 선언하며 기뻐한다(22-23절). 


2) 아울러 바울은 성도들에게 당부한다. 너희가 전에는 육신이 연약하여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의 종으로 살아왔으나, 이제는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서 거룩함에 이르라고 요구한다(19절). 삶의 실천을 통하여 의의 종(從)되었음을 나타내 보이라는 말이다. 죄의 종의 열매는 사망이요, 주의 의의 종이 되어 맺는 열매는 영생임도 명심하면서 말이다


2. 구약 / 사 54:1-8 / “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압도적인 자비와 긍휼을 받게 될 대상은 또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선민이면서도 오랫동안 불의와 우상 숭배와 세속의 탐욕의 범죄들로 인하여, 한 때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혹독한 징벌의 매를 맞게 되었던 유대 백성이었다. 바벨론의 70여년이란 긴 포로기에서 그 복역의 시간을 보내면서, 민족의 대 혹한(酷寒)기를 보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사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그들을 앞세워 전 세상 만민까지도 구원해 내시려는 깊은 뜻을 가지셨는데, 그런 패역한 행동들로 하나님께 어깃장을 놓자, 결국은 아주 강한 회초리를 들어서 그들을 향한 새로운 연단과 재조정에 나선 것이었다. 그 때의 그들의 신세는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자’로서 생산 능력이 끊어진 자들이었고(1절, 호2:5-13참조), 홀로된 여인의 처지였다. 젊었을 때 시댁에서 쫓겨난 과부의 처지로 버림당한 신세였다(4-6절). 


그런 그들에게 본문처럼 광명과 해방의 빛살이 비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그들의 회개나 스스로의 자각과 갱신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신 하나님 자신의 선제적(先制的) 결단 때문이었다. 곧 하나님 자신의 본래부터 품고 계신 의로우신 마음, 곧 사람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힘은 징벌과 채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공급 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그의 선한 의지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지금, 마치 서신서의 바울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압도적인 위로와 배려와 회복의 언약들을 약속받는다. 모든 것을 다 되찾게 해주고 이전보다 더 확대해서 줄 터이니, ‘너는 노래하라’고(1절),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4절)’고 요구 받고 있다. 뿐만 아니다. 하나님의 신부라는 신분의 복권도 제공될 터이고(5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긍휼과 영원한 자비의 품속에 거하게 될 것을 예고 받는다(6-8절). 


실로 복역(服役)의 때에 맞추어서, 여호와께서는 과거의 모든 상처와 아픔에서 완전히 벗어난, 진정한 당신의 신부요 백성 됨을 목표로 하셔서 그에게 영원한 화해를 선사하고 나오신 것이다. 이 은혜에 따라, 이스라엘은 그 간의 오랜 사회적, 법적, 경제적인 박탈된 지위로부터의 회복의 문이 열린다. 여호와의 관대한 자비와 용서의 힘이 그들의 새로운 출발을 열어주었다.  


3. 복음서 / 눅19:1-10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제2의 바울’과 ‘제2의 이스라엘’과 같은 하나님의 놀랍고도 압도적인 은혜를 입게 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유대 땅 여리고의 삭게오가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는 당시에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의 ‘낀 세대로 살고 있던 인물’이었다. 


하나는 세속의 영광과 부유와 명예를 탐하면서 지낸 세속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당한 수준의 목표치를 이루기도 한 인물이었다. 성경은 그를 ‘세리장이요 부자’라 간략하게 말하지만(2절), 사실 그는 여러 부족들의 입출입을 관장하는 세관의 책임자로서, 수금한 많은 돈을 로마정부에 바쳐야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살았으며, 자신도 수중에 상당한 부를 축적해온 자였다. 그 바람에 그는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죄인(罪人)’이라는 배척의 눈총도 받고 살았다((7절).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자신에 대한 양심적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가 예수가 그 지역을 방문하신 그 날에 보여 준 행동은 그의 평소의 내재적 심정의 일단을 매우 강하게 보여 주었다. 예컨대, 예수를 보려고 했다가 인파에 밀리자, 체면불구하고 가로수인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서 그리로 지나가시는 예수를 보고자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 일로 예수의 인정을 받게 되자, 그가 주 앞에서 자신의 재물을 빈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약속을 선뜻 드러낸 모습은 그만큼 자신의 평소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과 함께, 해결의 방향까지도 고민하며 살았음을 보여준 모습이었다(8-9절 참조). 결국 주님은 이래라저래라 지시 한마디 하지도 않은 체, 그를 통체로 인정해 주시고 만다. 그에게 구원이 임한 일과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삭게오와의 만남을 통하여,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곧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 성취된 일을 기뻐하셨다(10절).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삭게오의 회심과 그가 취한 행동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런 회심과 새 생활을 이끌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능력이다. 대체 주님의 무슨 힘이 삭게오의 삶을 그토록 360도로 뒤바꾸어 놓은 것일까? 


그것은 주님이 삭게오를 책망과 질책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품으신 까닭이었다. 그의 삶의 문제점들에 집중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변화 받고 싶어 하는 그 아름다운 심정에 주님이 편드신 행동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었다. 무엇이었나? ‘삭게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바로 그 한마디에 새로운 삭게오가 역사 속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o 우리는 지난 시간, 우리가 살기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지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성령과 생명과 말씀을 택하라는 지시였다. 그런데 오늘은 온 세상과 인간들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취하시는 방법을 들었다. 그것은 명령과 지시, 책망과 책벌 같은 따짐의 율법적 접근이 아니라, 사랑과 인내 속에서 우리를 향한 긍휼과 자비의 따뜻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지 않을까! 율법적 접근은 죄와 사망으로 귀결시키지만, 진정한 변화와 더 큰 차원의 새로운 출발을 견인하는 긍휼과 자비는 의와 영생을 안겨 준다. 남북 간의 화해도 상호 약점이나 흠집에 타격을 가하는 태도가 아니라, 상대 속에 있는 강점과 긍정적 요인들에 물을 주고 인정하는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 이런 원리는 개인에게도, 가족 간에도, 교회와 사회에서도 어찌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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