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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0)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3-11-01 (수) 10:59 1년전 811  

본문) 사 40:12~26, 막 12:13-17, 엡 1:15-23


오늘은 창조절 열 번째 주일이다. 자연은 조물주 하나님의 능력과 솜씨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다. 한 해의 씨 뿌린 농사도 그가 맺은 풍성한 열매로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아니함을 입증해 준다. 단풍(丹楓)이든 나무들은 우리의 인생(人生)도 어떻게 익어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마침 집안의 누님이신 최부현 목사님과 우리 한신대학교의 교수이셨던 박근원, 황성규 목사님 두 분이, 이 가을걷이의 계절에 발맞추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서, 제자와 후배였던 우리에게도 ‘삶을 어떻게 살아왔으며, 마무리할 것인지’를 되묻게 하여 준다. 


인생은 확실히 순식간이다. 그러면서도 한 세기 미만인 인생의 시작과 끝 전체를 놓고 보면, 그 나름대로 특성들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보편적인 인생의 시기별 특성들은 대충 이렇다. 


아기와 아이 시절엔 마치 새순과 같아서, 그 부모와 집안 어른들에게 기쁨과 기대를 품게 해 준다. 청소년 시절엔 배움과 성장의 시절이어서, 자유보다는 일정한 규율과 통제 속에 미래의 주역이 되는 훈련을 받는다. 청년기에는 자기에게 부여된 존재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자각하면서, 생존경쟁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와 터를 마련하고자 치열한 삶에 몰입한다. 특히 배우자를 맞는 일은 제2의 인생살이에 가장 핵심적 요인으로서, 대부분 이 시기에서 결정한다. 


장년기에는 자신이 이룬 가정과 후손, 사업과 직장, 농사짓는 제반 일들의 열매들을 직간접으로 거두어들이거나 바라보면서, 인생 후반의 삶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가족과 자녀와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들을 감당하고자 정신없이 살아온 시기였다면, 여기에서부터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과 질(質)을 더욱 심도 있게 평가하면서, 보다 의미 있는 여생이 되도록 준비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는 선배들을 향한 비판이나 평가를 앞세우기보다는, 자기를 뒤쫓아 오는 후배들에게 줄 수 있는 생의 답변들도 함께 생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노년기는 어떤 시절일까? 나에게는 지금 본격적으로 부딪쳐 보는 계절이지만, 분명한 것은 본향(本鄕)에 대해 생각도 하면서, 내 마음과 영혼이 창조주 하나님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워진 삶을 위해 노력하는 시기여야 할 때이다. 세상일을 감당하려고 하기보다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머잖아 뵙게 될 하늘 아버지와의 교제를 강화하며 사는 일이 더 중요하리라고 본다. 그래서 그분이 주시는 지혜와 통찰을 통하여, 후손들을 축복하고, 교회들을 도우며, 지혜와 사랑의 빛이 더욱 세상 속에 번져가게 하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할 때로 본다. 


지금까지 우리 삶의 시기(時機)별 특성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지점을 통과 중이신가? 이미 살아본 영역을 지난 분들은, 그 시절에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함께 비판하며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반성과 함께, 다가올 시기에 대한 대비(對備)도 잘하셔야 한다. 물론 성숙한 대비가 필요하다. 지난 일에 대한 반성은 꼭 필요하지만, 거기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이나 분노의 강도가 지나쳐서, 그곳(과거)을 잘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 일은 아주 위험하다. 그 일로 인하여 내게 열릴 희망의 미래를 보지 못하게 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를 향한 준비 모두도 잘 대처해야 하겠지만, 그 중에 역시 가장 귀한 일은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을 더 옳고 바르게 세우는 일’이다. 지금이 건강하게 서 있어야만 과거도 의미가 있고, 미래도 건실해지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이 부실하면, 과거의 삶은 더 부끄럽게 되고, 미래도 암담해지게 된다. 따라서, 지금의 나의 삶의 내용을 제대로 올려 세우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그 노력의 자리여야만 한다. 


한가지 추가할 또 다른 대목이 있다. ‘내 인생 전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입해 들어오신 때가 언제부터였느냐’란 점이다. 이 질문이 왜 중요한가?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신 순간부터가 내 인생은 <진짜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가 바로 내가 거듭난 시기로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때가 되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해 보시라. 하나님을 만나면서 시작된 내 인생의 내용과 그가 없이 살아올 때의 내 삶은 절대 같지 않다. 정말 천양지차였을 것이다. 


최근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 생에 개입하신 매우 특별한 손길을 발견하면서, 그 손길이 내 생에 어떤 은혜로 나타났는지를 회고해 볼 수 있었다. 잠시 내 이야기를 할 터인데, 이는 내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손길에 붙들려 살아온 목사의 간증임을 이해해 달라. 


나는 가난하지만 놀기 좋아하는 철부지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입시에서 낙방하면서, 나는 외롭고 고단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리게 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때 나를 만나주신 여호와는 무한히 크신 분이었고, 은혜로우셨으며, 거룩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고 온전하도록 이끄시는 변화와 갱신의 주님이셨다. 항상 함께하시는 아버지이셨다. 


20대에는 아내를 만나 집안을 아브라함의 후손 가계의 일원으로 입적(入籍)하게 하셨다.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심정으로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면서 하나님의 종의 길에 들어섰다. 남매를 둔 아빠도 되었다. 30대에는 학원의 교사로, 군대의 군목으로, 시골교회의 담임목사로, 해외 일본의 농촌학교의 유학생으로 살았다. 격변의 시기를 보냈다. 40대에는 본격적인 교회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것도 개척교회 목사의 길이었다. 짧은 시간의 대원교회 개척 목사를 거친 후, 양무리교회 개척을 하였다(1986년). 


50대에 들어서서는 아들의 결혼과 손주들을 둔 할아버지가 되었다. 자녀들의 영국 유학과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구축하는 시기였다. 교회는 일원동에 성전 매입을 이룩하면서, 농어촌교회 목회자들의 장학숙 공여를 통하여 도농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 성지순례를 폭넓게 하였고, 총회의 구역공과를 말씀 중심의 교재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였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범교단적 목회자 갱신그룹에도 동참하여, 한국교회의 일치과 갱신에 일조하면서 살았다.  


60대에 들어서서는 교회의 가락동시대가 열리면서(2010년), 삼위일체 교회력에 따른 세 본문을 중심한 말씀목회 사역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는 교회 강단의 사적 유용을 예방하고, 순수히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는 교회 강단을 이루고자 함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 말씀목회의 마당의 확장을 위하여, 세 가지 차원의 토대들을 닦았다. 


하나는 총회 무대를 폭넓게 활용하고자 교단의 제100회 총회장 사역에 참여하게 된 일이었고, 또 하나는 말씀목회연구원을 창립하여서 교단은 물론 한국교회 강당의 성숙과 변화를 도모하는 일을 본격화하게 된 일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연구물들을 제작하여 현장 교회와 목회자에게 도서들을 계속 보급한 일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이 소명의 일에 붙들려서, 지금까지 어연 16권의 창조적 책자들을 계속 출간해서 보급해 왔다. 실로 내 스스로도 상상할 수 없는 매우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집필(執筆) 사역들이었다. (특징이라면, 훝 노트가 없음이다).


지금 나는 70대 후반의 은퇴 목사로 지내지만, 이 말씀목회사역에는 여전히 현역(現役)으로 지내는 중이다. 이런 나의 모습에 주변의 선후배 동역자들은 박수를 보내지만, 사실은 나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의 손길에 붙들려서 쓰임 받고 있을 뿐이다. 오직 주께 영광을 돌린다!! 나는 고백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고 있는 나의 생애와 행보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나와 함께 하셔서, 나로 하여금 일하게 하심을 고백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되,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알고 믿으며 산다. 

둘째는 십자가의 예수를 모퉁이 머릿돌 되신 그리스도로 믿고 증언하며 산다. 

셋째는 성령을 모든 힘과 지혜와 능력과 생명을 공급하시는 근원으로 믿으며 좇아 산다. 


그러면 이제 오늘의 말씀에서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함께 확인하도록 하자. 창조주의 자녀로 사는 일이 이 험한 세상 안에서 어떤 은혜가 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1. 예언서 / 사 40:12-26 / “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임박한 제2의 출애굽인 본국에로의 포로 귀환의 대역사를 앞두고, 그 일을 진행하실 여호와 하나님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들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소상히 일깨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선지자의 뜨거운 증언이다. 


이런 증언을 하게 된 까닭은,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는 지난 70년에 걸친 오랜 포로 생활로 인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이 컸고, 심지어 이미 ‘패배한 여호와가 아니냐’란 의식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이제 본국에로의 평화로운 귀환이라는 상황의 대반전을 앞둔 시점에서는 그걸 주도하실 하나님에 대한 백성의 의식변화도 절실하였다. 다시금 백성들 눈에 새롭게 볼 여호와를 향한 기대감이 확실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증언이 진실하게 들리고 믿어질 때, 이스라엘의 귀환 운동은 비로써 승리와 감동의 행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선지자는 먼저 그 무엇으로도 비길 데가 없는 하나님 여호와를 선언한다(12-17절 참조). 서로의 협력과 도움이 절대 필요한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지도받거나 교육받거나 조언을 받거나 할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그를 만족케 할 것이 없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 만물을 압도할 분이시다. 심지어 그 분에게는 제국과 왕들이나 생명체도 나약하고 무용(無用)한 존재일 뿐이다(22-23절 참조). 


2) 이런 놀라운 분인 줄 모르고, 인간들은 특정 형상들을 만들어 하나님의 존재를 대변하게 하려 하는데-, 그것들 역시 모두 우상(偶像)들로서 헛될 뿐이다. 특히 땅의 인간들은 그 앞에서 메뚜기 같을 뿐인데, 귀인이나 위정자들인들 누가 감히 하나님과 동등할 수 있을까? 그런 존재들은 한갓 회오리바람에 불려 흩어지는 초개와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22-25절)! 


3) 따라서 이스라엘은 눈을 높이 들어 창조주 여호와를 다시 보아야만 한다. 그가 만상을 수효대로 끌어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는데, 이는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26절). 선지자의 이런 여호와 소개는 그 이유가 있다. 곧 있을 이스라엘의 귀환사건은 제국의 그 어떤 왕의 도움이나 협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온 세상과 제국과 족속의 참 주인이신 여호와의 섭리와 능력에 따라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따르게 하려 함이다. 


2. 복음서 / 막12:13-17 / “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


분문은 항상 예수님을 책(責)잡으려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지혜와 인식에 놀라고 감동하게 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지금 서로 연대해서 예수를 고발하여 그의 입지를 무너뜨리려고 지혜를 모은 방안이 바로,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나이까’라는 질문이었다. 


1)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 열심당원과 함께 가이사에게 유대인들이 세금을 바치는 일을 매우 치욕적인 행위로 보고 있었고, 헤롯 당원들은 친로마 정권의 추종 세력으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종교세나 십일조에는 아주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기에 만일 예수의 답변이 ‘바치라’거나, ‘바치면 안 된다’라는 둘 중의 그 어느 하나만을 택한 답변을 주게 되면, 그 순간부터 예수는 ‘매국노’가 되거나 ‘정권의 반역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2) 이 점을 다 아시고, 이 둘의 약점과 속마음까지도 다 헤아리시는 예수님의 선택은 둘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 ‘둘 모두를 온전히 행하라’는 요구였다(17절).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하나님과 상대를 향해 저울질하거나 견제하려고 하는 피곤한 삶을 버리고, 그 대신 하나님과 국가 모두를 향해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여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사는 인생이 되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그 바람에 그들은 예기치 못한 충격적인 설교를 듣게 되었다. 만일 그들이 이런 예수님의 요구를 수용하였더라면, 그들의 70년에 맞게 될 대참사를 면했을 것이다. 


3. 서신서 / 엡 1:15-23 / “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드림과 동시에 그들이 창조주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도우심을 힘입어, 계속 자라고 성장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간구하는 내용이다. 그의 기도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이다. 마음의 눈이 밝혀져서 그들이 받은 소망이 무엇이며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고, 그들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일이었다(15-19절). 


하지만 사도의 기도에는 당시의 강력한 이원론적 이단인 영지주의의 거짓된 가르침까지도 이겨낼 성도들의 제대로 된 영적 지식도 온전히 무장 되는 일도 포함된다. 그들은 영과 육을 분리하면서, 영은 거룩하여 구원받아야 하지만 육은 본래 악하여 죄 짓고 살 수밖에 없으니, 육신은 죄를 지어도 구원받은 데에는 문제가 되지 않음을 주장하였다. 그 바람에 거기에 빠져든 일부 교인들은 자기 육체의 타락을 문제시하지 않고, 주의 거룩하심을 능멸하는 짓을 하였다. 실로 복음과 교회의 문을 닫게 하는 추악한 세력이 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일원론이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는다. 영과 육 모두가 거룩해야 하고 살아 있어야만 한다. 그게 모든 통치와 생명의 권능으로 채워진 주의 몸 된 교회이며,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와 지체된 성도 사이에 맺어진 절대적이고 충만한 관계이다(20-23).

 

o 성령과 말씀을 받은 우리는 창조주의 자녀들이다. 그 자녀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극복하고, 만물의 주이신 그리스도가 안겨주시는 충만과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간다. 특히 우리에게 그의 뜻을 담은 은사와 재능을 통하여, 우리의 평생을 그의 아름다움을 증거하는 일을 소명으로 알고 섬기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깨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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