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33:18~23, 눅10:21-24, 롬 11:33-36
창조절 여덟째 주일이다.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고장 청주에서 지난 16일에 본원의 전국대회가 은혜롭게 열렸다. 본인은 예수께서 지상에서의 구원 사역을 가족 관계를 활용하시면서 펼치신 일에 주목하면서, 주제 강연을 하였다. 매우 낯선 시각이요 접근이기에 강연자인 내 개인으로서는 흥분과 설렘도 있었으나,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때였다. 부디 이 강연의 내용이, 한국교회 강단이 무너진 가정과 가족을 살려내는 일에 불씨가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은 본 교단이 이단(異端) 경계(警戒)주일로도 지킨다. 내 주에 있을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앞서서 이단을 경계하자는 취지로 주일을 지킨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 현재 한국교회의 기독교 이단 세력은 대략 약50만 여명으로 추산된다는 통계가 있다. 이는 우리 교단의 거의 배나 되는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많은 이단의 합산이지만, 이런 숫자는 확실히 경계 대상이다. 게다가 그들의 대부분이 젊은이들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한참 왕성한 젊은 시절을 이단 세력에 빼앗긴 일은 한국교회가 두고두고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기존 교회의 허점과 과오가 젊은이들의 실망으로 이어진 것이라면, 더더욱 가슴 아프다. 동시에 이단들이 가진 매력과 흡인력이 무엇인지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영적인 세력이라서, 논리나 이론적 접근만으로는 설명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내부의 허약성을 뒤돌아보고, 그것을 보완하는 노력들은 한층 강화되어야 하겠다.
이와 더불어 이 시간 세 본문 말씀을 받게 되면서, 더욱 이단이 가진 문제 중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그들 이단 세력을 이끄는 교주(敎主)들의 허상(虛像)과 비(非)성서적 행태이다. 저들은 보이지 아니한 하나님의 자리를 자신들이 꿰차고 들어가 앉아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神)에 목마른 인간의 갈급한 영성을 자신들이 채워주고 있는 메시아라는 허황된 논리를 내세워서, 거기에 빠져든 이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다.
여기에서 더욱 깊은 차원의 실상을 짚어본다. 기성 교회에서 이단으로 빠진 이들의 대부분은, 신앙이 아주 신참(新參)들이 아니다. 대부분 제법 믿음의 연륜과 헌신의 수준을 가진 이들인 경우가 허다하다. 신에 대한 궁금증과 보다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던 자들이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나름의 관심과 삯은 자라고 있고, 그 다음을 찾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길을 찾지 못하면서 방황할 때, 주변의 유혹이 뻗쳐 들어오면서 그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모세가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갈망이 컸다. 근 40여년에 걸쳐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기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 깊숙한 곳의 생활을 감당해 왔었는데, 그럼에도 순간순간 백성들의 저항과 비난과 불순종 등으로 인한 인간적 모멸감이나 괴로움이 컸다. 그래서 모세는 그 문제 극복을 위한 차원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다. ’원하건데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절).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얼굴(형상)을 직접 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왜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 하나님의 얼굴까지 보게 되면, 그가 모든 어리석은 인간들(백성들)을 완전 제압하게 될 것이라고 보아서 그랬을까? 그래서 자기도 모든 세상적인 근심 걱정에서 해방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나님을 뵈면 자기도 신적인 존재로 신분 상승을 하게 되어서, 어리석은 자들로부터의 차별 내지 구별을 받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일까? 대체 모세의 요구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아니한 체, 얼굴만 보여달라고 한 것이다.
그 대답을 모세는 얻지 못한다. 하나님이 거절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답은 후에 그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주신다. 그때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으로 주신 대답이었다. 시각에 의한 확인보다는 가슴을 통한 감각에 의한 만남을 제시하신 것이다. 시각은 순간이지만 감각을 통해 체득한 것은 오래 남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시각의 중요성을 무시하진 않으셨다. 제자들이 당신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신 것이다(22-23절).
이렇듯 모세와 제자들에게도 당신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시지 않으신 하나님인데-, 나약한 인간 교주들이 감히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꿰차고 들어앉아서 신의 행세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거짓되고 허황한 범죄의 행위인가? 이에 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거짓된 행세를 비웃으면서,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면서 날카로운 질문들을 쏟아낸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들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3-35절).
신앙은 내가 보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당신의 얼굴 모양을 직접 보여주신 적이 없다. 그래도 당신을 알게는 해 주셨다. 그의 풍부한 지혜와 지식을 알려주시고, 그의 말씀과 믿음을 좇는 자들에게 그의 다양한 선한 것들을 보게 하시면서, 그들의 가슴 속에 내주(內住)한 성령을 통하여 만나게 해 주신 것이다.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본문들 속에서 찾아보자.
1. 구약 / 출 33:18-23 / “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모세는 하나님과 매우 친근히 교제하며 지낸 인물이다. 하나님은 마치 친구를 대하듯 모세를 대하여 주셨다(출33:11 참조). 하지만 모세는 백성들의 여호와를 향한 끊임없는 배신행위들과 그로 인한 여호와의 분노와 징계 사이에서, 마음의 고단함이 깊었다(출32-33장 참조). 그런 중에 모세는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백성들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놀라면서(3절), 여호와를 직접 뵙고 동행 문제를 담판 짓고(?)자 요청한다. 일종의 면담 신청이었다. 여호와의 응답은 무엇이었나?
1) 모세의 하나님을 향한 긴급 면담 신청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내용으로 나타났다(18절). 그간에도 분명히 여호와와 기도 및 계시 등으로 계속 연락과 교통이 있었음에도 이런 신청을 드린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동행 거절 철회의 건을 관철하려면, 직접 뵙고 요청해야만 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하고 말씀드리면, 뜻이 바로 전달될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영광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근본 본질을 드러내는 모습으로써, 얼굴을 의미한다. 대면 담판은 최후의 단계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2) 이에 하나님의 답변은 몇 가지 차원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하시는 원칙이기도 하기에, 우리 인간에게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➀ 여호와께서 모세와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내용들은 당신의 모든 선한 것을 그 앞에 지나가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그 앞에 선포하는 방식이다. 여호와는 본래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다(19절). 이런 말씀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당신의 선함과 인자하심을 그의 백성들에게 계속 베푸시고 각자의 형편에도 부응하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백성들은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➁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요청한 <얼굴 대 얼굴>을 대면한 면담은 불가(不可)함을 통보하셨다. 그 이유는 그 누구도 당신을 보고도 살 자는 없기 때문이다(20절, 24:17, 신5:24-25, 딤전6:16 참조). 이는 신성과 인성의 차이에서도 그렇고, 영과 육의 차이에서도 그렇고, 영원자가 발산하시는 빛의 광채에로의 접근이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본질상 불가하기 때문이었다.
➂ 그러면서도 여호와는 당신의 본체 일부만이라도 경험할 기회를 모세에게 제공하신다. 그것은 얼굴이 아닌 당신의 뒷모습(등)을 볼 수 있게 하신 일이었다(22-23절). 얼굴은 하나님의 앞부분, 즉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라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면, 등을 보는 일은 하나님의 행위를 뒤좇는 일이라서 그 일은 순종하는 자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결국 이 일은 모세의 고단한 마음을 배려하시고 변함없는 당신의 신뢰를 보내신 여호와의 큰 은총의 선물이었다.
2. 복음서 / 눅 10:21-24 / “ 천지의 주재(主宰)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
하늘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일은 그의 아들에게도 큰 증언의 주제이기도 했다.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를 보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왜 나를 보고도 아버지를 보게 해달라고 하느냐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도 본 것이다‘라고 규정해 주기도 하셨다(요14:8-9챰조).
본문에서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70인 사역)의 사역 현장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일들에 대하여 감동하며 감사하셨다. 그들이 사역에는 귀신이 축출되고, 사탄의 권세가 몰락하며, 원수들이 굴복되는 등의 놀라운 기사와 이적들이 잇따라 나타난 일들을 보고 받으시면서(눅10:17-20참조), 그런 상황들이 모두 하나님이 그들에게 당신이 함께하심을 친히 보여주신 일들로 간주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21절).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본체가 아닌 당신의 활동하시는 모습과 그 능력으로 당신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1) 여기에서는 주께서는 하나님이 당신을 숨기는 대상과 나타내는 대상이 있음을 언급하셨다. 그들이 각각 누구인가? 숨기시는 대상은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이다. 반면에 당신을 나타내는 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이다. 주님은 이런 내용을 밝히시면서, 하늘 아버지의 그런 뜻에 뜨거운 찬동(贊同)을 표하셨다(21절).
사실 이런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지식인이나 윗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이와 같은 천진한 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는 보통 역설(逆說)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나님에게는 상대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다만 그가 진정 당신을 필요로 하는 자들인가, 간절히 당신을 원하는 자들인가가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그런 필요자들에게 당신을 보여주신다고 보면 되겠다. 사실 아이들은 그들이 마음이 교만이나 계산적이지 않다. 배우고 채우고 얻고 닮으려고 하는 마음이 풍성하다. 한마디로 열린 영성과 마음의 보유자들이다. 엄마의 젖을 찾는 아기들이 금방 크고 성장하는 뜻을 참고하면 되겠다.
2) 그러면서 주님은 아버지를 아는 자가 누구인지를 덧붙여 주셨다. 둘을 지목하셨다(22절). 하나는 아들인 예수 당신 자신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온전히 다 보여주신 대상이 바로 예수이셨다. 또 하나는 아들이 계시(啓示)하여 주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굴까? 바로 당신이 택하여 세우신 제자들이다! 그들은 지금 인간 세상에서 그 누구도 보지 못하던 하나님의 구원의 대역사를 직접 목도(目睹)하고 있기 때문이다(23절). 제자들이 지금은 분별력이 부족하여 제대로 못 보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결국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시작된 구원의 때를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주인공들이었다.
3) 주님은 바로 그 점을 제자들에게 조용히 직접 알려주셨다. 그런 점에서 그들 제자들은 지상 최고의 복(福)을 누리고 있었다. 실로 카이로스의 축복을 누리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숱한 선지자와 임금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음에도 보지 못했던 메시아의 구원 역사를, 그들 제자들은 지금 그 오신 메시아를 모시고 지내면서 그가 이 세상에서 펼치시는 구원의 역사를 매일 목격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23-24절, 마13:16-17 참조). 실로 보여줄 것이 충만한 메시아를 만나 살고 있다. 이 자체도 거짓 선지자나 메시아들과는 아주 구별된 모습이다.
3. 서신서 / 롬 11:33-36 /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
본문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오묘함을 찬양한 글이다. 특히 그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받았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바울 역시 열두 제자처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찾아와 만나주시고 택하여 세우신 사람 중의 하나다(행9장 참조). 그는 자기처럼 비방자와 박해자와 폭행자였던 원수와 같은 죄인을 찾아오셔서, 당신의 복음을 위한 일꾼이요 증언자로 돌려세워서 사용하시는 예수를 보면서,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에 깊이 감동하며 지냈다(딤전1:12-17참조).
1) 그는 온몸과 마음으로 그의 전체 생(生)을 바쳐 예수와 그의 복음을 위해 살고는 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판단과, 찾아낼 수 없는 하나님 행위의 놀라움을 고백하며 찬양하고 산다(33절).
2)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이 품고 살 마음의 지침을 제시한다. 곧 누구도 주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누구도 주의 상담자나 조언자가 될 자는 없다. 주님은 인간의 거래 대상일 수 없다(34-35절 참조).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의 주권을 내세울 수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소유인 자기를 발견하고 주의 주권을 고백하며 사는 존재일 뿐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절).
o 이단을 조심하자. 그에게 몸과 영혼을 빼앗기면, 인생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평소가 중요하다. 우리 생명의 온전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유지하며 살자. 가능하지도 못한 신령하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라. 예수와 그의 말씀에만 집중하자. 특히 인간된 자가 자기를 하나님으로 내세우는 자는 절대 악이며 사탄이다. 하나님은 꾸준히 당신을 보여주신다. 믿는 자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그들의 선행과 모습 속에서 당신을 보여주신다. 그 점에서 믿은 자들의 깨어있음이 절대 요긴하다. 우리는 다만 그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