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 3:1~8, 요 3:31-36, 히 4:1-13
창조절 일곱째 주일이다. 천고마비의 계절 아름다움을 뽐내는 때를 맞이하였다. 특히 전국 곳곳 및 해외 나들이가 한창인 것이 계절을 대변해 준다. 이런 때에 저 중동에서 새로운 충돌이 발생하여서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팔레스틴의 무장 세력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로켓포로 격렬하게 공격하고 이스라엘도 반격을 가하면서,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사상자들이 속출하였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인들 주민들 100여 명이 넘게 인질로 끌고 갔다.
한동안 잠잠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정면 충돌이 이번에는 전쟁급으로 확전되면서, 국제전으로도 확전되지나 않을지 염려가 된다. 미국도 직간접으로 개입하게 될 듯한데, 그렇다면 싸움의 결과는 이스라엘의 완승에 가까운 판으로 귀결이 될 것이다. 문제는 하마스도 그만한 결과를 예측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어찌 저토록 격렬하게 선공하였을까? 이유야 많겠지만, 그곳 팔레스틴의 오랜 억압된 삶이 이런 식으로 폭발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곳에 가보면, 팔레스틴 주민들이 사는 곳은 사방이 철조망으로 둘러쌓여 있다. 그래서 출입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엄격히 통제받아 왔다. 나도 지난 2015년에 이스라엘을 방문할 당시에 그곳 팔레스틴의 무슬림 지도자들과의 회동을 위하여 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사정을 목격하면서 적잖게 충격을 받기도 했다. 마치 거대한 포로수용소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하여 그곳은 마치 화약고처럼 크고 작은 충돌이 잇따르고 있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광야의 곳곳에 해외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귀국하면서 영주하도록 정착촌을 꾸준히 건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우 강한 군사력을 통하여, 힘으로 팔레스틴을 제압하며 살고 있었다. 실로 불공정한 삶의 현장은 분명했다. 실로 안타까운 역사의 오랜 갈등의 현장이 재현되고 있음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가나안 족속들 및 블레셋 족속의 참으로 해묵은 약 4,000년간의 얽힘이 지금까지도 활화산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사실 땅의 지진만이 지진이 아니다. 인간의 핏줄과 가슴 속에 있는 분노와 원한의 심연(深淵)에는 또 다른 차원의 지진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기에 더욱 평화의 세상이 절실해진다. 정의 평화 생명을 기반으로 한 평화의 세상이 진실로 그립다. 통탄스러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의 주로 고백하는 기독교가 이 분쟁을 막고 하나 되게 하는 주역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 역할을 주도해야 할 위치의 미국이 패권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건설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매우 안타까워하신다. 이런 환경에서 오늘 우리는 창조절 일곱째 주일을 맞는다. 대체 무슨 말씀을 주시려는가? 우선 당신의 뜻을 세상에 선포한 자를 찾아 세우시고 그를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그렇게 해서 모이게 된 자들이 주신 말씀에 거역하지 아니하고 순종하는 일을 하는 교회와 백성들을 만들고자 하신다.
구약의 말씀은 이집트에서 무려 430여 년이나 노예살이로 시달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은 근심과 탄식 속에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게 되자, 그 음성과 비참한 실상을 확인하신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한 응답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내용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모세를 당신의 대변자로 불러 세우셨다. 그 바람에 40여 년의 미디안 광야의 목동이었던 모세는 하나님을 호렙산에서 뵙게 되면서, 그 생애의 마지막 사역을 민족 해방자의 역할로 시작한다.
복음서는 이렇게 맺어진 하나님과 인간들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어야 제대로 갖추어지는 지를 안내해 준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 예수는 만물 위에 계신 분이요 만물을 다 지켜보며 전부를 알고 계셔서 그것의 생명과 구원을 위한 지침을 내려주신다. 그러기에 하늘에서 오신 분을 맞이한 이 땅의 사람들의 태도는 분명해야 한다. 그분과 그의 말씀에 순종(順從)해야만 한다. 불순종(不順從)하게 되면 당연히 진노를 받게 된다.
서신서는 어떤 내용인가? 주의 종들을 통하여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다. 특히 적잖은 무리가 믿음의 자리에는 들어왔으나, 유감스럽게도 온전히 믿지 못하거나 불순종하는 태도를 보이고 살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하늘 아버지께서 준비해 두신 안식에 끝내 못 들어갈 위험성에 빠져든 것이다. 결국 본문의 대상자들은 신자라면서도 실상은 불신자로 사는 많은 이들을 향한 것이다. 이들은 ‘어리석은 5처녀 신세가 될 자들’이다.
1. 구약 / 출 3:1-8 / “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
본문만을 보게 되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召命) 받는 장면이 주(注)를 이룰 만하다. 하지만 남은 두 본문이 함유한 내용을 함께 보면, 이 장면은 인간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집중해서 보는 일이 주가 되어야 한다. 곧 이 세상 역사와 인간의 삶에 깊이 관심하시되, 특히 당신 백성의 아픔(탄식과 신음)에 더욱 반응하시고, 거기에 대응하고자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주목해야 한다.
1)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던 모세는 어느 날 광야 서쪽 편에 있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된다. 별생각 없이 다다른 그곳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현현(顯顯)을 경험한다.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것이다. 신비했던 것은 그 떨기나무에 붙은 불길에도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고 있었던 일이었다(1-2절).
2) 신비와 놀라움에 빠져든 모세는 그 큰 광경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떨기나무 곁으로 접근하였다. 그러자 그런 모세를 지켜보시던 하나님이 그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그를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이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며 응답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르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주시고, 말을 걸어오신 놀라운 순간이었다.
3) 놀람과 두려움에 싸여 있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 소개부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이 왜 모세를 찾으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셨다.
먼저 당신은 모세의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셨다(6절).
이는 애매모호한 유령 신이나 거짓 신이 아니라, 그 조상들을 세우시고 지켜주셨던 바로 그 신으로서, 그들의 역사를 세우시고 이끌어 오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알리신 것이다(창17:1, 28:1-4, 35:9-11, 마22:32 참조). 그러자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을 삼가고 공경하는 마음에서 모세는 자기 얼굴을 가렸다(6절, 33:20, 사6:2 참조).
4) 그런 모세를 향하여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도우시고자 하늘 거처를 떠나셔서 이 고난의 현장에 오셨음을 고하셨다(7-8절, 19:20, 34:5 참조). 그러면서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당신이 이 백성을 어떻게 살펴보고 계셨는지도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모세가 한동안 잊고 살아왔던 동족의 피눈물 나는 아픔의 소식이었다. 모세 마음에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뉴스였다.
먼저 여호와는 당신의 애굽에 있는 당신의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셨다. 그들의 감독자들의 학대로 말미암아 신음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셔서 그들의 근심도 알고 계셨다. 그리고 하늘 거처를 떠나 몸소 내려오셔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 땅에서 인도해 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데려가려고 하시려는 계획을 밝히셨다. 이런 크고 놀라운 극비사항을 모세에게 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모세를 당신의 대리자로 보내시기 위함이다(9-10절),
☞ 결국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을 되찾으시려는 계획은 추진되면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와 양의 모습으로 가나안을 향한 행보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숱한 시험에 넘어져,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이 여호와와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여 진노를 받게 됨으로써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하늘 안식에 탈락자들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백성 사이에 윤리와 책임이 있음을 본다.
2. 복음서 / 요 3:31-36 / “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손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본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누구시며, 그를 맞이하고 상대하게 될 우리 인간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를 압축해서 소개한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를 만나기까지는 그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든지 간에, 일단 만나서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책임이 따른다는 점이다. 몰라서 죄짓는 일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알고 나서도 죄짓고 살면 용서받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다. 매우 엄중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1) 삼위 하나님은 위인 하늘로부터 오신 이시다. 따라서 당연히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시기에, 만물을 다 지켜보신 분이셔서 만물을 다 알고 말씀하신 분이시다(31-34절). 당연히 한쪽이나 일부만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이쪽저쪽을 통합하여 보기도 하신다. 그러기에 땅의 일부에서만 살고 있는 인간들의 생각과 판단력과는 본질적으로 같을 수가 없다. 남은 것은 바로 그런 분의 증언을 듣게 된 인간들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점이다. 위의 분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그럼에도 자기 입장과 주장을 붙잡고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느냐가 문제다.
진리는 무엇인가? 어느 한 편에만 좋은 것은 진리가 못 된다. 이편저편 모두에게 유익하고 복이 되는 일이여야만 진리이다. 한때만 좋고 금방 쓰레기가 되는 것도 진리일 수 없다. 항상 어디서는 소중한 교훈과 지침일 때 진리이다. 하늘에서 오신 분은 바로 그 진리를 안겨주려 하신다. 사실 진리는 인간 편에서는 접근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위에서 전체를 보면서 모두에게 복과 생명이 될 길을 제시할 수 있는 하나님만이 취할 영역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결국 그런 진리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한다. 자신과 모두를 위해서 그렇다.
3) 아들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시다. 당연히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만을 전한다. 그 일이 인간 된 아들에게서 더욱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당신의 영이신 성령도 한량없이 부어주실 정도였다(34절).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만물을 다스릴 전권도 부어주셨다(35절). 그러기에 인간들은 오신 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나?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 불순종으로 맞서면 안 된다(36절). 그런데도 만일 끝내 불순종으로 맞서게 되면 어찌 될까? 이는 진리의 하나님과 맞서는 행위로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배제(排除)당하는 심판을 받는다.
3. 서신서 / 히 4:1-13 / “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초대교회 시절에 함께 주를 믿으면서도, 끝내 배교하거나 불신의 생활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된 최종적 탈락자들에 관련한 말씀이다. 마치 출애굽의 은총을 입어 광야에까지는 들어왔으나, 그들이 그 과정에서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신으로 저항하다가, 끝내 가나안에 들어오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게 된 수많은 이스라엘 조상들을 연상하게 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일은 오늘의 교회 현장에서도 숱하게 목격되는 사항이라서, 오늘 우리가 모두 경청할 대목이다.
본문은 적어도 몇 가지 차원에서 도중하차 당할 배교 및 배신자들의 특성을 지적하여 준다. 우리가 과연 어떤 점을 두려워하면서 믿음 생활을 해야 할까(1절). 하나님의 안식(-하나님 나라, 생명, 대망의 총괄)에 들어가기 위하여 먼저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살펴보자(3-5절 참조).
1)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자기의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는 모습이다(2절).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처럼 듣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향한 것처럼 듣는 태도가 위험한 것이다. 말씀이 자신을 위한 것으로 듣고, 거기에 맞추려고 겸손히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복음을 먼저 받은 자들은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거기에 순종(順從)함으로 받아야 한다(6-8,11절). 그런 순종도 즉각적으로 해야 한다. ’오늘 여기에서‘가 중요한 이유이다. 미루고 따지고 후에 결정하려고 하면 안 된다. 마귀가 결코 그렇게 하도록 가만두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인 응답을 했던 그 모습이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순종치 않았던 자의 본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안식에 들어가기만을 힘써야 한다.
3) 결론이다. 주의 말씀은 어떤 것이기에 우리가 이토록 믿음으로 받아야 하고, 순종으로 복종해야 하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시95:7-11의 내용을 배경으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주는 놀라운 능력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노니“(12절).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3절).
o 우리는 모두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살아가는 그의 백성들이다. 우리 역시 모세처럼 소명자로 산다. 그러기에 언제나 위에 계시고 우리와 만물을 다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혹 우리가 사람 사이에는 감추거나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분 앞에서는 우리가 감출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그런 그분은 진리이시다. 그의 말씀은 나와 나의 판단력을 훌쩍 뛰어넘어 말씀해 오신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나를 재성찰하자. 모든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며 살아가도록! 완고하게 거역하거나 차일피일(此日彼日) 미루면서 살지 말자. 미루거나 외면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역사는 없다. 하지만 순종과 믿음의 응답에는 하나님의 역사와 행동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이 질서에 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