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2:18~25, 막 10:1-16, 엡 5:21-6:4
오늘은 창조절 셋째 주일이다. 조석으로 많이 시원해져서 이전의 무더웠던 때의 형편보다 훨씬 좋아졌다. 이런 중에 저 멀리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대형 지진이 발생하여 사상자만 무려 2천명에 이르렀다는 말이 들린다. 정말 우리 지구촌은 바람 잘 날이 없다. 기후변화로 인한 대형 홍수와 산사태, 초대형 산불로 인한 재해, 게다가 이번 경우처럼 대지진, 보이지는 않지만 지구촌을 휩쓸었던 코로나 대 감염 재앙, 온도상승으로 인한 해수면 공습 등— 실로 이 지구촌 지키기만 해도 재원이나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계속된다.
이런 중에 우리나라에서는 새 권력자가 끊임없이 이념논쟁을 유발하면서, 국민의 마음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특히 고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하기도 한 일을 필두로 하여 항일 투쟁에 힘써온 독립군 가족들의 명예를 사정없이 깎아내리고, 그러면서 후꾸시마 핵오염수 방류 허용과 동해 명칭에 대한 미정부의 일본해 명칭 부여에 대한 침묵 등은 이 정권이 친일 행각을 위해, 낡은 반공 이념을 무기화하고 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게 한다.
이런 중에 우리 총회는 오늘 주일을 남신도회주일로 맞이한다. 우리 교단의 핵심 신도회인 남신도회를 위해 예배하는 주일이다. 남신도들은 교회의 핵심 구성원들이며 모든 교회 공동체를 밑받침하는 기둥들이다. 따라서 오늘 예배를 통하여 우리네 남신도원들이 더욱 믿음과 행실에서 견고한 용사들로 발전해 가기를 축원한다. 그래서 교회와 노회와 총회까지도 살리고 나라까지도 발전시키는 전사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창조주의 가정(家政) 창조에 대한 말씀들로 가득하다. 가정은 가족들의 집합체이다. 홀로 가족은 가능하지만, 가정은 2인 이상의 복수 가족들로 구성한다. 특히 남자와 여자의 결합체가 가정의 기초이다. 부부(夫婦)가 가족의 핵이라는 말이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도 창조주 여호와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등의 말씀으로 축복하신 바가 있었는데(창1:27-28절), 거기에서도 대상이 남자에게 만도 아니고 여자에게 만도 아니었다. 남자와 여자 가 함께(모두) 받을 말씀으로 내려주신 복이었다.
사실 이 남녀에게 주신 복은 창조주가 가지신 창조의 복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은 남자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여자만으로도 불가능하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르게 부여받은 육체적, 정신적 기능과 특성이 하나로 조합을 이루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부부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를 이어받기 위해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 조합이 잘 되면, 그때 비로소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명체가 이 지구촌에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난 존재가 어찌 혼자만인가? 그로 인하여 언젠가 또다시 번성할 또 다른 가정도 가능하고, 그로 인하여 세워질 직장이나 교회도 가능하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가족 공동체도 가능하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가? 따라서 오늘의 세 본문은 이러한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세우고 실현해갈 주체들인 부부를 향하여 강한 메시지를 준다. 자기가 만난 배우자를 보는 남자와 여자의 시선은 과연 어떠해야 할지를 일깨워준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말씀은 요즈음 평생 함께 살 배우자란 개념이 흐려지고, 언제 어느 때 서로 헤어질 수도 있다는 느슨해진 부부관이 만연해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강한 경고를 안겨준다.
그런 흐릿해진 부부관이 주는 해독이 얼마나 큰가? 요즈음 아기낳기 거부 운동이 신혼부부 사이에 크다. 그 이유 중에는 단순히 경제적 염려가 표면적이긴 하지만, 내면적 이유에는 부부로 끝까지 산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크게 헐거워진 연유도 있다. 혹이라도 서로 헤어진다면,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 처리 문제에 대한 자신감들이 불안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세속적 경향에서 온 것이지, 신앙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게 큰 문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다른 소명과 책임감을 하나님께로 부여받은 이들이다. 같은 인간이라도, 같은 직업인들이라도, 같은 부부라도, 같은 어버이라도, 같은 국민이라도,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세계를 소유하고 살아가는 건강한 존재들임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사명이 부여된 사람들이기에, 오늘의 말씀을 더욱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생애, 생명, 소유, 재산, 자녀, 가정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1. 구약 / 창 2:18-25 / “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
본문은 삼위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이 어떻게 또 다른 하나님의 창조의 대리자인 남편과 아내가 되어 그들의 요람인 첫 가정을 이루게 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과정을 담고 있다.
1) 첫 출발은 하나님이 사람인 아담을 지으신 후에 먼저 그가 돌아볼 짐승들을 돌보면서 살아갈수록 창조하신 일이다. 그 짐승들은 모두 흙으로 지으셨는데, 그것들은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이었다. 여호와는 아담에게 그들에 대한 작명권도 부여하셔서, 친히 주관하도록 권한도 넘기셨다(19-20절, 1:28 참조). 하지만 그런 모습에서도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사는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셨다. 비록 짐승들과의 생활에서 외로움을 달랠 수는 있겠으나,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 실존의 자리를 메워줄 배필(配匹)은 될 수가 없다고 보신 것이다(18절, 20절 참조).
2)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그 실존적 빈자리를 메워 줄 배필을 만들어 줄 작업을 시작하셨다. 그 배필이 될 자의 디자인은 아담과 닮은 또 다른 몸체를 가진 인물이었다. 외형적 형상은 서로 닮았으면서도, 내용상으로는 남자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보완해 줄 반쪽을 이루어 줄 대상이었다. 성격에서나 특성에서나 육체적으로나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신비스러운 존재인 여자를 만들어 주셨다. 그야말로 서로 쌍방에게 속한 존재를 만들어 주셨다.
특히 서로 다른 성 기능을 보유하므로 성적 교제까지 가능하게 하셔서 서로 사랑하게 하고, 결국은 가족 관계를 이루어 남편과 함께 새 생명들을 생산하여 가정과 후대를 이어가게 할 조상이 될 수 있는 아내가 될 존재를 만드셨다. 그러기에 이 배필은 첫눈에 사랑부터 시작할 대상이었다. 실질적인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이면서 동시에 배필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이는 가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부부(夫婦) 출현으로 인한 가족의 기원이기도 하다.
3) 하나님의 아담 배필을 만들어 내시는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종합병원의 전문의사로서 환자인 남자(男子)를 마취시키고 그 신체 한복판인 갈빗대 하나를 축출하여, 그 뼈를 중심으로 예전 아담의 경우처럼 흙으로 살을 입히며 그 코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서(창2:7참조), 또 하나의 인간인 여자(女子)를 만들어 내어 남자에게 이끌어오시는 모습을 보여주셨다(21-22절). 갈빗대를 자료 삼으심은 남자에게 여자의 존재가 얼마나 가슴 중심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결코 여자의 예속성이나 열등함을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니다.
4) 여자를 본 남자의 첫 반응은 어땠나? 자기의 또 다른 모습에 환호(歡呼)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3절). 어느 열등한 존재가 자기 앞에 나타났다고 본 것이 아니라, 마침내 ‘나 같은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났구나’라며 감동한 것이다.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사랑과 애정에 몰입된 것이다. 하나님이 마지막 창조물로 만들어 주신 여자가 홀로 사는 남자의 빈 마음을 완전히 채워 줄 배필이었다.
5) 남자(이쉬)와 여자(잇사)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서로에게 필요하고, 서로를 돕고 채워줄 배우자를 서로 하나로 만난 것이다. 실제 주례자인 창조주 하나님이 성혼(成婚) 선포를 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4절). 이는 인류의 첫 부부인 아담 부부를 향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된 모든 부부를 향한 창조주의 확고한 선포이기도 하다(마19:5, 고전6:16, 엡5:31 참조).
☞ 우리는 이런 창조주의 축복 속에 가정을 이루고 부부가 되었으며, 자녀들을 둔 조상들이 된 자들이다. 이 점을 명심하자. 이혼이나 파혼 등으로 이 질서를 맞서는 일은 적절치 못하다. 부부가 서로 다른 점들을 저주와 분쟁의 요인으로 보지 않고 서로의 부족을 채워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볼 수만 있으면, 위기는 없으리라. 가정 파괴는 창조 질서의 큰 위배임도 명심하자.
2. 복음서 / 막 10:1-16 / “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
부부 문제, 곧 배우자와 가족의 문제는 예수 시대에도 큰 화두(話頭) 중의 하나였다고 보인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건넨 질문 중에 드러났다. 그들은 예수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2절)라는 질문을 했다. 그들의 물음 속에는 부부의 이혼이 전적으로 남자 개인의 주도권에 따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그러한 인간적인 주도권 행사만으로 아내를 버림이 가능한지에 관한 질문을 예수께 던진 것이다.
사실 유대의 율법에는 이혼 주도권은 남편 쪽에 있는 게 사실이다. 남편이 이혼 증서를 써주면 가능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내가 싫어서 나온 감정적이면 안 된다. 다른 남자와의 음행한 불륜을 저지른 경우라야 가능했다(마5:32 참조).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른 행위나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에 시집가는 행위 모두는 본처와 본 남편에게 간음하는 범죄행위가 되었기 때문이다(10-12절).
하지만 예수에게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그들 결혼이 자기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것이었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즉 이혼권 행사는 바로 이 신앙적 관점에서 보아야지, 인간이 선택할 영역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왜 그런가? 남자와 여자의 결혼은 하나님이 그 둘을 하나로 짝지어 주신 것이었기에, 사람이 임의로 나눌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8-9절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은 창조 시에 하늘 아버지께서 선포하신 그 말씀을 다시 재(再)선포하셨다.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6-9절). 결혼은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그 둘이 하나 되게 한 몸을 이룬 사건으로서, 그 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위임까지 받은 일이기에, 더욱 인간이 임의로 나누지 못하는 일임을 힘써 강조하신 것이다.
때마침 그곳 예수 주변에는 부모가 데려온 아이들이 있었다. 그 부모들은 예수께서 자기 아이들을 만져 주시기(-축복해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이 꾸짖으며 물리치려 했다(13절). 이에 주님은 그런 당신의 제자들에게 분노하시며 ‘아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14절)라며 그 부모의 뜻대로,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셨다(16절).
우리는 본문에서 두 부류의 가족을 만났다. 하나는 이혼을 관심하는 가족 모습이요,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와서 예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전자는 하나님이 배제된 가정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을 모신 가정이다. 우리의 가정과 가족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예수를 잃은 가정인가, 예수의 축복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는 가정인가? 요즈음 망가진 가정들이 너무 많다. 생각해보라. 전자의 가정의 자녀들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3. 서신서 / 엡 5:21-6:4 / “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
사도 바울은 교회가 건강한 가정들로 굳게 세워지기를 소망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심은 좋은 데, 정작 부부간이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목회자 바울은 먼저 아내들에게 권하고(22-24절), 남편들에게도 권한다(25-33절). 아울러 자녀들에게도 권하고(6:1-3절), 아비들에게도 권한다(4절). 이 중심에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가 모퉁이 머릿돌로 계신다. 그리스도 예수가 견고히 부부 중심에 계시면, 그 부부는 견고하다. 부모-자식 간에도 계시면, 그 관계도 견고해진다.
1) 가족 간에서 지켜야 할 신앙적 윤리는 예수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데 있다(21절). 남편의 권위도 존중받아야 할 일이고, 아내도 사랑을 받아야 할 처지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시 되어야 할 영역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그에게서 배운 사랑이며 섬김이다. 곧 ‘예수님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양보하며 섬기면, 그게 바로 몸의 지체를 온전히 하나 되게 한 일이다. 주안에서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상호 쌍방적으로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사는 것이다.
2) 자녀들의 (늙은) 부모 공경도 매우 중요하다. 이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으로서, 자신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할 조건이 된다(6:1-3절). 아비들도 당연히 유념해야 할 대목이 있다. 인간적인 잡담이나 경험담으로 자녀들을 교육하려고 하지 말고, 대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4절). 그게 자녀들 삶 속에 살이 되고 뼈가 될 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o 우리 가정과 가족을 선사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모두 다 거져 받은 중대한 선물들이다. 아울러 조상들을 통하여 나에게 또 다른 창조의 사역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분부를 잘 받들며 살아야겠다. 지금은 이런 거룩한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허무는 세속의 풍조가 너무 위협적이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적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과 우리 가정(가족)에 정착되도록 더욱 최선을 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