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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평화통일주일

관리자 2023-08-07 (월) 23:09 1년전 854  

본문)  빌 1:3~11, 마18:15-20, 출40:17-38


오늘은 강림 후 열한 번째 주일이다. 강한 무더위와 함께 남쪽에서 발생한 태풍들의 위협이 커서, 매우 힘겹게 보내는 때이기도 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맞이한 시련이나 환란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었나라는 문제에 못잖게, 우리 자신에게는 얼마나 그러한 밀려온 환경에 대응할 능력과 힘이 갖추어져 있었느냐에 있다. 물론 불가항력적인 사례들도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우리의 대응 능력에 따라, 우리의 삶이 강해지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하게 된다. 


마침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평화통일(平和統一) 주일이기도 하다. 이날을 이렇게 제정하여 지키는 데에는, 큰 이유가 있다. 곧 우리나라가 일제의 36년의 억압에서 해방된 지 제78년이나 지났으나, 우리는 여전히 그때부터 시작된 이념(理念) 대결에 따른 남북 분단(分斷)의 너무도 무거운 멍에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해방된 하나의 조국을 되찾기 위함 때문이다. 


분명히 일제로부터 해방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그 은총의 선물을 제대로 받아 누릴 준비가 절대 부족했다. 민족자존의 의지가 크게 부족한 데에다 주변 강대국에 의해 주입된 이념 대결의 앞잡이가 되어 서로 하나 되지 못하고 싸웠기에, 동족상잔(相殘)의 민족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우리는 또 다른 제2의 해방을 기다리는 가슴 아픈 존재들이 된 것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어서, 통일된 한반도 우리 조국인 대한민국을 되찾고자 기도하며 살아가는 통한(痛恨)의 민족이 된 것이다. 


더더욱 불행한 일은 현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 관계가 화해와 평화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반평화적이고 대립 지향적이며, 언제 어느 때라도 핵전쟁까지도 불사할 것처럼 상호 비난하고 거칠게 대립하는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동족이 원수처럼 간주하게 되었고, 이런 편협한 대립 구도를 명분화하려고, 현 권력층은 일본과의 맹목적인 우호관계 수립에 매진하고 있으며, 이제는 준(準) 군사동맹 수준까지도 나아갈 정도가 되기도 했다. 


알고 보면, 남북 분단의 절대적 빌미도 일본 때문이었는데, 그리고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잘못을 부정하고 있는 데에도, 현 정권은 그런 일본과 협착하는 일에 올인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맹종 수준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친일파 정권에 대한 비판도 이제는 국익을 반한 것으로 역공을 펄칠 정도로 뻔뻔한 세상이 되었다. 이 바람에 국론 분열상을 최악에 이르렀다.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빠져들고 말았다. 진정 다시 국론을 정상화시키고 하나로 회복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오랜 세월이 더 필요할지 막막하기 그지없다. 이런 역풍에 한국교회들도 결코 편안하지 못하다. 정의와 평화의 복음을 잃어버린 허약한 교회들의 요동도 위험하다. 


게다가 현 정권은 반공 중심의 이념 지상주의 노선에 치중하는 바람에, 이웃이었던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도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었다. 그 바람에 우리의 국가 경제는 몰락 현상이다. 현 정권은 집권 직후부터 줄곧 수출하강 기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라가 언제 제2의 아이엠에프를 만날는지 모를 정도이다. 그 바람에 가장 타격을 받는 이들은 바로 가난한 국민이다. 특히 부자 중심의 감세 정책으로 인하여 힘없는 국민이 국가로부터 받아온 복지혜택이나 의료적 돌봄은 이제 더욱 난감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한 마디로 국가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정의와 공의, 평화와 공평의 기반이 허물어져 내린 것이다. 


실로 조선왕조 오백 년 역사를 망(亡)하게 한 고질적 분열의 역사가 지금은 분단 70년을 넘어, 이제는 국가의 존립 기반 마쳐 위태롭게 하는 최고조 자멸의 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실로 진정한 평화와 통일이 염원(念願) 되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이런 때 우리는 오늘에 주신 하나님의 세 본문 말씀을 받게 된다. 오늘의 말씀들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떤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주시려는가? 이를 위해 전체와 개체가 동시에 경청해야 할 말씀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큰 대의(大意)를 위하여, 그 개체인 모든 지체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뜻을 모아야 할 것인지를 일깨우시려 한다. 나라든, 교회든, 가정이든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전체 속에서의 개체를 보아야 하고, 개체들의 연합체로서의 전체도 함께 보아야 한다. 전체를 무시한 개체는 결국 한갓 쓸모없는 쓰레기가 될 위험성이 있고, 개체를 무시한 전체는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랑과 생명력을 상실한 폐철(廢撤) 덩어리로만 존재하다가 결국 폐물(廢物)이 될 뿐이다. 


서신서는 사역자와 그를 후원하는 교회 성도들의 연합된 건강한 모습을 모델로 제시한다. 복음서는 교회 공동체에 발생한 암적 요인을 치유 내지 제거하기 위한 내부적인 연합된 치유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구약의 성막 세우기 이야기는 하나님과 전 백성들의 하나 된 관계와 새 출발을 위하여 어떤 노력과 일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인지를 밝혀주시는 내용이기도 하다. 모든 지체들의 일치된 모임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이루어내며, 동시에 하나님을 역사할 수 있게 하는 일임을 밝혀준 일이기도 하다. 


1. 서신서 / 빌 1:3-11 /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음이라”


빌립보서는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옥중(獄中)서신이다. 그 내용을 보면, 바울의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얼마나 가득한지가 생생히 드러나 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유럽 선교의 첫 열매였는데(행 16장 참조), 그때 맺게 된 주안에서의 성도들과의 교제들이 얼마나 견고했고 힘이 있었는지-, 복음 때문에 옥중 생활을 하게 된 바울에게는 숱한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한 후원자였고, 결코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가 매우 입체적인 힘과 결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복음을 위한 일꾼 선택과 파송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지만, 그러나 그 선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또 열매를 맺게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인간 동역자들이나 후원자들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즉 빌립보지역 선교는 바울과 실라 같은 전도자들이 하였지만, 그 일의 확증과 확산에는 루디아와 옥문의 간수들과 그 가족들의 결속과 협력에 의한 것임을 함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해외선교도 그렇다. 교회가 모두 해외선교에 참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교하는 선교사들을 물질로 후원하고 잘 감당하도록 기도함으로서, 교회는 해외선교에 직간접적으로 함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교사와 후원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런 전체와 모두를 위한 아름다운 역할 분담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선교가 큰 열매들을 맺어가는 것이다. 이제 그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자. 


1) 옥중 생활을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큰 기쁨과 감사가 있음은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그런 긍정적인 마음과 영혼은 그곳의 암울한 삶에서도 오히려 천국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 주기 때문이다. 그 동인(動因) 중의 하나는 바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옥중에 있는 사도를 향하여 꾸준하고도 변함없이 사랑과 재정 및 기도의 후원을 보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15-16, 행18:5, 고후11:8-9참조)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그들의 존재에 관하여 표현한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7절).  


2)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자신에게 표시한 후원에 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였다.’ (5절). 그들 빌립보 공동체는 바울 선교에 처음부터 계속 함께한 것이었다. 기도로, 재정으로, 인력 파송으로, 자신들의 전도 활동 참여 등으로 함께 하였다. 그러니 바울에게는 이 공동체가 얼마나 자기 분신과 같은 느낌이 들지 아니하겠는가! 그러기에 그들은 바울의 투옥과 복음 사역과 은혜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었다고 말한다(7절). 


3)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한 마음의 한없는 사랑과 축복을 전한다(8-11절 참조). 그들의 사랑에 하나님이 더해주시는 지식과 모든 총명이 더 풍성해지므로 말미암아 지극히 선한 것을 잘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주님 다시 오실 때를 맞이하게 되기를 바라고, 의의 열매도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축복하여 주었다.


2. 복음서 / 마18:15-20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는 교회 공동체가 가지는 권위와 능력에 대하여 모든 교인이 깊이 이해하기를 원했다. 곧 교회 공동체는 개체 단위인 성도들이 죄와 혼란에 빠져드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며, 또 그런 때에 교회가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은 어느 정도로 보장되고 있는지를 일깨우고자 하였다. 마태는 이런 경우에 취할 절차의 순서를 제시한다. 기본 원칙은 죄인과 단둘이 마주 앉아 사랑 안에서 형제적인 훈계를 하는 것이다(레19:17-18참조). 이때 참여자에게 요청되는 것은 끝없이 용서할 자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15:21-35, 5:24, 6:12참조).  


그러나 거부하고 고집을 부리면, 다른 교우 한두 명을 동반해야 한다(16절, 신19:15 참조). 그리고 비상한 경우에는 그 일을 전체 회중 앞에 내놓아야 한다. 축출이라는 최후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17절). 이런 조치가 가능한 까닭은 교회의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공동체에 전권을 행사하도록 위임해 주셨다는 데에 기인한다(18절, 16:19에서는 베드로에게 위임). 결국 주님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교회 공동체도 지켜내고, 개체인 성도도 건져내고자 하셨다. 


1) 교우 가운데 어떤 죄를 범했는지, 그 죄목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범죄가 확실하다면, 교회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게 본문의 입장이다. 왜 그럴까? 방치나 묵인은 또 다른 범죄로 감염되거나 확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제이차 범행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목적은 차단이며 치유에 있다. 그리고 온전한 회개를 통하여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단둘의 면담이 잘되어 그 권고가 통하게 되면, 그는 그 형제를 얻게 되기도 한다(15절). 


2) 하지만 상대가 듣지 않을 수도 있고, 반발이나 거부할 수도 있다. 그때는 두세 사람의 추가 증인들을 대동하여 그의 반발을 제압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16절).


3) 그래도 끝내 거부하고 완강히 저항하면, 이제는 공교회에 보고하여야 하고, 교회의 이름으로 권고를 계속하는 데에도 여전히 거부하면 결국 교회는 그를 축출(逐出)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를 교우가 아니라 이방인과 같이 취급한 것이다(17절). 교회가 그때 취한 권위는 하늘에서도 인정하는 권위가 된다. 하나님은 교회에 묶고 푸는 권세를 안겨 주셨기 때문이다(18절). 


4) 유대교에는 ‘두 사람이 함께 앉아서 율법 말씀을 연구할 때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라는 말이 있다. 마태는 유대교의 그 금언(金言)에다 율법과 하나님 대신에 예수가 들어서게 한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9-20절). 그렇다. 오직 예수와 그의 말씀 안에서는 모두가 용서와 화해와 새 출발과 하나 됨이 가능하다.


3. 구약 / 출 40:17-38 / “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은 그들의 목자이신 여호와의 특별한 인도하심 속에서 이루어졌다. 광야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영상 35-38도의 수준보다도 훨씬 더 뜨거운 열사의 땅이었기에, 광야를 낮에 행진해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그 태양을 가려줄 구름이 떠서 막아주면 가능하였다. 그곳엔 습도가 낮고 건조한 곳이기에, 그늘막만 확실하면 광야 행진은 낮에도 능히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밤의 행진도 그렇다. 광야의 밤 기온은 낮았다. 하지만 불기둥의 따뜻한 대응만 가능하면, 그게 역시 가능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존은 그런 특별한 여호와의 돌보심 속에서 이루어진 대(大)역사였다. 


본문은 그런 대역사를 위하여, 그곳에 결집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일치된 행동으로 그런 하나님의 역사가 가능하도록 헌신하였는지를 소개한 내용이다. 본문은 여호와가 당신의 백성들과의 교제와 소통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성막을 건축하도록 모세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린 일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단 한 번의 거역함이 없이 한결같이 그 명령대로 행동하였음을 전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19,21,23,25,27,29,32절 참조). 만일 이스라엘에 주의 명령을 무시했으면, 그 역사는 불가능했다. 그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부족에서가 아니라, 여호와는 당신을 불신하는 자들과는 도저히 함께 일하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1) 그러면 무슨 일들을 그들이 수행하였는가? 지정된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고 그에 따른 부속 작업들을 수행한 일이었다(17-19절). 십계명 판인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가리개 휘장을 늘어뜨려 그 증거궤를 가린 일이었다(20-21절). 휘장 밖에 상을 놓고 떡을 진설한 일이었다(22-23절). 등잔대를 놓고 불을 켜는 일이었다(24-25절). 금 향단을 휘장 앞에 두고 그 위에 향을 사른 일이었다(26-27절). 성막 문의 휘장을 달고 그 문 앞에 휘장을 달며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드린 일이었다(28-29절). 물두멍과 물을 담아두어서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이 수족을 씻게 한 일이었다. 포장치고 휘장을 단 일이었다(30-33절). 대게 큰일같이 보이지 않지만, 순복하는 믿음의 행위들로 큰일을 수행한 것이었다. 


2) 그러자 여호와의 영광이 그렇게 가꾸어진 성막에 임하셨다. 당신의 지시와 명령을 좇아서 그대로 만들어진 성막을 여호와께서 친히 찾으신 것이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을 주도하기 시작하셨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서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결국 그들의 모든 삶이 여호와 중심의 삶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34-38절). 그래서 그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상속하게 되었고, 세계사를 주도하는 선민 이스라엘이 됐다. 


o 오늘 우리는 평화통일주일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분열된 우리 조국이 평화의 세상을 이루고 통일한국을 이룩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사는 나라와 교회와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도록 전력을 기울이는 일에 매진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나부터 하나님과 이웃의 화해를 도모하고, 평화의 사람으로 서도록 더욱 헌신하여야 하겠다. 나란 개체부터 살려내어서 우리란 전체가 건강해지게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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