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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10) - 세 분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3-08-02 (수) 10:46 1년전 860  

본문) 롬 3:21~31, 마18:15-20, 출12:51-13:10


강림 후 열 번째 주일이다. 장마도 그치고 불볕더위가 본격화된 계절 팔월에 접어들었다. 무더위의 위험은 이 팔월이 막바지일 듯한데, 부디 여러분 끝까지 건강 관리 잘하시기를 바란다.


금주의 말씀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까? 오늘의 말씀들은 불신자들이 아닌 우리 믿는 자를 모두를 겨냥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제대로 믿고 사는 자인지, 아니면 착각 속에서 빠져서 잘못 믿고 사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해 보라고 하신다.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한 까닭은 헛된 믿음에 빠져 사는 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며, 잘못된 구원의 확신 속에 사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착오는 이단(異端)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정상적인(?) 교회 생활하는 이들 속에서도 잘못된 신앙관으로 어긋난 생활을 하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단들은 차라리 입장이 뚜렷하다. 주(主)님의 자리에 인간이 앉아있기 때문이다. 교주가 메시아가 되어서, 자기가 믿는 자들의 구세주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단일 수 없는 정상적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뜻밖에도 잘못되고 오도(誤導)된 구원관에 빠져 지내는 교인들 때문에, 생활에 향기가 아닌 악취가 나는 경우들이 많다.


사실 이런 잘못된 신앙에 의한 문제들은 어느 시대에도 있었다. 예수님 때에도 이런 사이비 신앙과 종교 문제가 심각했다. 복음서를 보라. 그가 얼마나 당시의 국가종교인 유대교, 곧 모세의 율법 종교의 지도자들인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 등의 유대교도들과 치열한 진리의 싸움을 하셨던가? 최후에는 그들의 증오와 미움을 받아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을 정도였다. 그리고도 그런 종교집단에서의 희망을 품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그의 사후에는 새로운 복음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출범시킬 정도가 되기도 했다.


오늘은 그런 복음의 핵심 문제와 거기에 따른 미묘한 오류로 발생하는 문제를 깊이 다룬다. 따라서 잘 배우고, 제대로 배워야 하겠다. 말씀들은 제대로 된 구원의 길을 잘 안내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진실된 영역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분별하고 배울 때 가능하다. 곧 하나님의 의(義)가 어디에 담겨 있으며,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받으려는 우리 인간들이 어떤 마음과 삶의 자세로 응답하여야 할 것인지를 제대로 배우고 익히면 되는 것이다.


복음서는 이 차원에서 두 사람을 모델로 삼아서 선명한 답변을 제공해 준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를 어떤 존재로 드러내고 있느냐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는 지, 아니면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받으려 하는 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바로 이 차원에서 한 사람은 모든 자기 헌신을 다 드리고 있어도, 결국엔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한다. 하지만 한 사람은 모든 것에서 문제가 많고 부족한 죄인이었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 이런 문제는 오늘 신앙인들의 대체적인 영적 자세 문제를 새롭게 되돌아보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구약의 문제는 비교적 내용이 선명하다. 여호와께서 당신이 제정해 주신 무교절 및 유월절 절기를 당신의 백성들이 엄중히 준수하여 지키기를 명령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백성들은 몇 가지 주요 행동을 준수해야 했다. 우선은 태(胎)에서 난 모든 첫 생명들은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2절). 이레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켜야 했다(6절). 이 일은 해마다 절기로 지켜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여호와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일이었다. 바로 행동하는 신앙의 지침들이다.  


서신서는 어떤 내용인가? 앞서 언급된 내용 전체의 종합판이다. 왜 예수에 대한 믿음이 율법을 온전하게 하며, 그에 대한 믿음이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게 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예수 없는 율법은 강제의 멍에를 벗을 수 없어서 우리를 힘들게 하거나 못하는 자와 비교하게 만들지만, 예수에 대한 믿음을 소유하면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에 감사와 기쁨을 유발하게 하는 자발적인 마음의 법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의까지도 맛볼 수 있게 된다.


1. 복음서 / 눅 18:9-14 / “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두 사람의 경우를 비유로 상정하여 위선적 신자와 진실한 신자를 구별해 주신다. 이 둘은 직업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이고 기도도 올리며 사는 자들이었다. 분명한 것은 바리새인인 한 사람은 마음속에 자기를 늘 의롭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자기와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마음도 가진 자였다. 반면에 직업이 세리인 사람은 기도 때마다 자기 가슴을 치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 자기는 죄인이다’라고 외쳤던 자였다. 


문제는 그들의 상반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판단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판단을 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자기 의를 열심히 드러낸 바리새인이 아니라, 가슴을 치고 기도한 세리를 의롭다고 평가하신 것이다. 주님 심판의 기준은 이랬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높아지리라’(14절).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본다. 이는 개인의 차원만의 평가가 아니라, 당시 유대교와 바리새인들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였다.


1) 본 비유에는 두 사람의 상반된 기도의 모습이 올라와 있다. 바리새인은 항상 그리고 마음 깊이 늘 이런 생각에 젖어 살고 있었다. ‘자신들은 의롭고 다른 자들은 불의한 자들이다. 심지어 기도도 죄인들과 따로 서서 기도하면서 자신들을 구별시켰다. 그러면서 그들의 기도 속에는 자기들같이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구별과 차별됨을 과시하듯 쭉 늘어놓기도 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대한 고백은 전혀 없었다. 


2) 그러면 그들이 취한 믿음 생활의 모습은 어떠했나? 우선은 남의 것에 대한 토색, 불의, 간음죄들을 범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세리같이 살지 않았다. 그런 점에도 그들은 감사드렸다. 아울러 자기들이 한 주간에 두 번의 금식을 하였고, 또 소득의 십일조도 하나님께 드렸다(11-12절). 실로 대단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3) 하지만 그의 곁에는 또 다른 인물인 세리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앞선 바리새인과는 너무도 달랐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자기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 없이 살아온 자신의 부족함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처만을 엎드려 구했다.


4) 그러자 마음을 헤아리신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판정을 내리셨다(14절). 자칭 의인은 외면하시고, 자신의 죄인 됨을 통렬히 고백하며 긍휼을 구하던 세리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5) 여기에서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행위만으로의 구원은 불가함을 일깨워준다. 특히 마음이 자만심으로 채워져서 나온 신앙적 행위들은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다. 교만과 자만과 자랑으로 자신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자료들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비록 행위만으로서는 낙제점을 받게 될지라도, 그 마음에 자신의 부족과 죄악에 빠져있음을 자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는 태도로 나아오면, 그는 그의 믿음 때문에라도 하나님의 의(義)를 힘입게 될 것임을 이 비유에서 확인하게 된다. 


6) 오늘날에도 이런 유형의 바리새인들이 교회 안에도 범람하고 있지 않은지 염려가 된다. 오래 믿게 되면서, 관록이 붙고 공로로 많이 쌓아지고, 지위와 역할에서 지도자들이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오만하거나 교만해진 모습에 빠져들었는지, 깊이 자성해보아야 할 일이다. 평생을 헌신한 것이 끝까지 빛이 바래지 않기 위해서는, 초심(初心)을 견지하고 더욱 겸손하며 특히 어린 신앙인들에게 더욱 친절과 겸손의 덕을 보여 주는 태도가 유지되게 해야 할 것이다.  


2) 구약 / 출 12:51-13:10 / “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


’바로 그날‘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인도하심을 받아 지난 430년간의 애굽에서의 종살이했던 속박(束縛)으로부터 해방된 날이다(12:51절). 그러기에 그날은 단순한 히브리들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날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군지를 세계 역사 무대에 올리는 날이기도 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이날의 의미와 목표를 분명히 하시고자,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몇 가지 매우 중요한 규율과 지침을 주셨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그들과의 관계 설정을 확고히 하시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내리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그들 모든 생명체의 첫 새끼를 여호와께 돌려드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당신의 소유(所有)로 삼으신 것이다(13:1-2절). 여기에서 소위 첫 열매 신앙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으셨다. 이 장자에 대한 소유권 행사는, 장자가 가진 영향력으로 볼 때, 그 뒤로 이어지는 모든 후속 내지 하급 생명체들에게도 그대로 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장자 소유를 통하여 그 가계 전체에 관여하시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둘째는 그날을 기념하여 이레 동안 유교병(누룩으로 만든 떡)이 아닌 무교병(누룩 없이 만든 빵)만을 먹고, 제7일째에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는 일이었다(6절). 그것도 한 해만 지키는 것이 아니다. 해마다 그때를 절기로 지키게 하셨다(10절).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섬김의 틀을 제정하신 까닭은 인간의 자율적 의지의 허약성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질서와 길, 도리가 제정되어 꾸준히 지킴으로써, 그 몸과 마음이 하나님 중심으로 형성되게 이끄신 것이다.


1) 그 역사적인 해방의 날은 그냥 모든 날 중의 한 날일 수가 없었다. 그날을 속량하면서 동시에 해방된 백성들과 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신 하나님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설정하면서 이 둘이 함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그날이 되기를 원하셨다. 


2)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당신의 소유가 될 대상들을 지정(指定)해서 명령을 내리셨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가축)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라‘(2절). ’거룩히 구별한다‘는 말은 무엇을 하나님을 위해 따로 떼어놓고 하나님의 것으로 넘겨드림을 말한다(22:29하-30참조). 이 첫 열매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형성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3) 이 무교절 전통은 출애굽 시에 펼치신 하나님의 행위와 은총에 대한 기억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동시에 땅과 땅의 소산을 주신 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다. 어쨌든 이 절기 준수에 대한 요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근본 구원의 행위를 상기시키는 표가 된다(9절, 신6:8 참조). 


4) 절기 신앙의 효시(嚆矢)가 되기도 한다. 유대교에서는 삼대 절기로 자리하였으나, 기독교에 들어서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추가되어 7절기로 확대되어 절기를 지키고 있다. 절기는 성도들의 나태해질 수 있는 신앙을 항상 깨워준다. 일관된 성서 역사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접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절기 맞이를 통하여 몸과 마음의 의식화가 형성되고, 말씀의 신앙에 더욱 뿌리를 내리기에도 유용하다. 목회도 절기 중심의 목회는 훨씬 더 탄탄한 목회를 하게 하고, 그를 밑받침할 세 본문 설교에까지 나아가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3. 서신서 / 롬 3:21-31 / “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본문은 사도 바울이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 현장에 대한 증언이다. 그는 하나님의 의(루터-하나님 앞에서 통용되는 의라고 해석)가 그리스도 사건에서 단번에 근본적으로 나타났는데-, 그것도 율법의 협력이나 정죄적 힘의 도움도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공급되는 하나님의 의였는데, 그 특징은 모든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있다(21-22절). 


이는 바울의 칭의론(稱義論)의 실체이기도 하다.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그들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에 내맡기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드러난 바와 같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에게 기회를 주시고자 당신의 귀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게 내어주시면서, 그를 구원의 주로 믿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값없이 당신의 돌보심과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하신 것이다. 


값없이 의롭다고 하심을 얻은 자가 된 것은 죄책에서 면제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회복된 교제 안으로 영접된 것도 의미한다. 이것은 오직 은혜로 값이나 그 어떠한 공로(功勞) 없이 전적으로 선물로 받는 식으로 일어난 것이다. 즉 예수의 사람과 죽음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다. 바울은 이 과정에서의 예수의 역할은 하나님이 그의 피 값으로 이룩해 놓으신 화목(和睦)제물이었다고 말한다(25절 상). 


이때 하나님은 그런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을 향하여 놀라운 태도를 보이신다. 곧 길이 참으시는 중에 그가 전에 지은 죄를 간과(看過)하심으로서,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신다. 그래서 당신도 의로우시지만, 예수 믿는 자도 의롭게 하신다(26절). 따라서 아들의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처벌하려는 의가 아니라, 구원을 이루시려는 의였다. 동시에 믿는 자의 허물을 폐기(廢棄)시키면서, 그를 죽음의 감옥살이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용서의 현실 안으로 이끌어 가는 구원을 안겨 주는 의였다. 이런 하나님의 의를 깨달은 바울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 실존(實存)을 말한다(27절). 인간 실존의 유일한 근거(根據)는 믿음뿐임을 말한 것이다(28절, 고전1:29,31 참조). 


28-29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행위가 미치는 범위에 관하여 말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 예수를 향한 믿음만 있으면 다 용납되는 세계이다. 믿음은 율법을 파기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31절). 


o 이런 실존의 원리를 모르고, 복음서 비유에서의 나타난 바리새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금식이나 십일조를 자랑하고 있었고, 또 자기와 같은 수준에 이르지 못한 허약한 신앙 이웃들을 조롱하며 비웃고 있었다(눅18:11-12절). 하나님으로서는 도무지 그를 도와주고 채워줄 그릇이 그 속에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점에서는 세리의 마음은 더욱 절박하였고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인 됨과 부족함을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으로서는 당신의 의를 채워주시기에는 죄인 세리가 더욱 합당한 존재였던 것이다(18:13절).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자. 자기 공로나 의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고 낮추는 자라야 높아질 것이다. 믿음에 담긴 하나님의 의를 신뢰하자. 나의 모든 것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는 차원의 첫 열매 신앙인이 되자. 절기를 준수하여 신앙의 인격화 체질화 습관화를 이루어 살자. 나의 의지가 각성만으로는 부족함을 알고, 거룩한 습관을 배우고 익히며 자손들에게까지 믿음의 거룩한 삶을 전승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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