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3:13-17, 사 66:18-23, 계 21:22-22:5
o 총회관련주일 – 2022년도 새해 주일 / 신년사
성탄 후 둘째 주일이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 호랑이해의 첫 주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코로나19로 찌든 우리 한반도와 온 세상 위에 가득하여, 불의한 흐름과 질서들이 사라지고 희망과 위로가 가득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세상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특히 올 해는 우리나라의 제20대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다. 대한민국의 얼굴이 될 인물이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이번 선거의 의미는 남다르다는 생각이 크다.
세계에서 공인된 선진국으로서의 대한민국, 가장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나라 대한민국, 위기에 강한 나라 대한민국, 분단의 아픔을 씻어내고 하나가 될 대한민국을 과연 계속 보여주고 지속시킬 것이냐의 여부를 판가름할 기로로 보기에, 우리의 기도의 힘들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모아져할 때라고 보인다. 특히 교회들이 깨어서, 시대의 흐름을 바로 잡아주는 때여야 하겠다.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한 본 말씀목회연구원은 여전히 예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깨어 있는 영성을 기반으로 한 말씀의 순례(巡禮)길을 계속하려고 한다. 우리의 오랜 꿈은 실(失)낙원의 세상을 복(復)낙원의 세상으로 생명 회복을 추구하는 일이다. 이는 성탄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전 생애적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삼위일체력에 따른 세 본문 연구와 선포에 더욱 매진하고자 한다.
우리의 적은 노력이 영성 기반이 허약하여 힘겨워하는 한국교회를 복돋우고, 굴곡진 역사로 인하여 탄식과 신음을 그치지 못하는 이 한반도의 새 시대를 여는 데 소중한 밀알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거룩한 행진에 참여한 모든 본원의 독자들과 동역자들에게도 그 어느 해보다도 강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영적 능력과 지혜들이 충만하게 발휘되기를 축원한다.
o 세 본문 말씀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본 삼위일체력은 이번 둘째 해의 새해 주일을 예수님의 물세례(洗禮)에 참여하신 일로부터 시작한다. 물세례, 그게 왜 중요한가? 사실 우리 대부분도 세례 교인들이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새삼스럽지만 세례는 우리 신앙의 출발점에요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을 드러낸 것이어서, 이 새해에 그 의미를 재확인하고 출발하는 것은 중요하다.
1. 복음서 / 마 3:13-17 / ‘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룰 수세자들 답게 살아라 ’
기독교에서의 세례란 결코 단순한 입교(入敎) 의식이 아니다. 그 자체가 새 인생과 새 존재로서의 출발을 공인받는 차원 높은 신앙 절차이다. 동시에 다가올 하나님의 통치 앞에 자신을 전적으로 굴복시키고, 그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받들려는 삶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 점을 주님이 친히 요한의 물세례 의식에 참여하시면서 연대(連帶)해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의 수세(受洗)행위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세례자 모두를 당신의 사람들로 품어도 주셨다.
1) 세례자 요한은 갈릴리 요단강에 있는 자신의 세례 터에 친히 찾아오셔서 자기에게 물세례를 요청하는 예수를 극력 사양했다 -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어찌 나에게 오십니까’(14절).
그는 이미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고 있던 처지여서(요1:29참조), 그런 세례가 필요치 않는 존귀한 분에게 자기 같은 존재가 세례를 주는 일이 불가하다는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왜 메시야 예수께서 그런 절차에 참여하시는 지에 대한 생각을 전혀 못했기 때문이었다.
2) 예수 자신의 그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셨다. ‘이제 허락(許諾)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 무슨 말씀이신가? 요한의 예수를 향한 세례 수용은 허락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어기 위한 당연한 절차였기에, 오로지 ‘아멘’라고 수용해야 할 일이었다. 이 주님의 수세(受洗) 부분에서 우리는 몇 가지 매우 중요한 메시지들을 확인하게 된다.
① 세례의 비중(比重) 문제이다. 예수님의 세례 받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적 활동사역에 있어서는 매우 큰 사건처럼 취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 받으신 예수를 두고, 성령이 비들기 같이 그 위에 임하시기도 하셨고(16절), 하늘 아버지이신 성부께서도 친히 소리를 내셔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고 선포하신 내용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성탄 시와 시험 현장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해주어서 이채롭다.
성자께서 인간 메시야로서의 공생애에 접어들면서, 시작된 물 세례식에 삼위 하나님의 격려와 응원의 모습은 우리 인간들에게도 물세례의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기에 충분한 일로 보인다. 그렇다. 세례 없는 기독교인이나 성도란 그 존재 자체가 공인 받기가 불가한 것은 분명하다.
② 이 예수 세례 요청의 말씀은 마태복음에서의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③ 예수님의 세례 인식은 두 가지 차원을 포함하고 있음이 드러났다(15절).
첫째는 ‘우리가’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운동을 자신이 앞으로 시행하실 모든 세례와도 마찬가지이고(마28:19-20절 참조), 동시에 당신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지상의 모든 물세례 운동도 당신의 것으로 공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기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서 물세례 운동은 이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대하시는 징표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義-옳음)를 드러낼 사역이 될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5:6,10,20, 6:1,33, 21:32참조)
둘째는 예수께서 세례를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과업으로 보인 듯하다. 그러기에 더욱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이 물세례란 관문(關門)을 필수 절차로 밝으신 것이다. 그래서 수세를 받으시자, 삼위 하나님의 응원과 격려의 말씀이 뒤따랐다. 어찌보면, 나사렛 예수님에게 이 장면은 하늘 아버지로부터의 메시야 인준(認准)식과 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보인다. 마치 교회의 담임목사 취임식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과도 흡사하다.
2. 구약 / 사 66:18-23 / ‘모든 민족들이 여호와께 예배할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리라’
본문은 포로기 이후에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물론, 온 세상 만민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찬란한 영광과 은혜로운 모습을 선지자 이사야의 선포형식으로 전한 말씀이지만, 그 내용은 이 땅에 그의 독생(獨生)하신 아들 메시야인 나사렛 예수의 사역과 그로 인하여 시작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미리 예고한 것이다.
1) 본문의 여호와 하나님, 귀환 후에 새롭게 만난 여호와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주님은 아니셨다. 앗수르-바벨론-페르샤 제국들을 상대하시면서 이미 온 세상과 역사의 주이셨고, 온 세상 만민들의 주가 되어 계셨다. 그 일을 완전히 이루시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이미 매우 구체적인 선교의 청사진을 마련하셨다.
2) 여호와께서는 이방 나라들의 행위와 생각들을 아시는 분임을 천명하시면서, 때가 되면 언어가 다른 세상 민족들을 불러 모으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18절). 그 방법은 당신이 그들 가운데 안내판 같은 징조(sign)를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에서 그것을 보고 피해온 무리들(도피한 자들-믿게 된 자들)을- 많은 나라들(다시스-뿔-룻-두발-야워완 민족들)과 섬들에게 –선교사들로 보내셔서, 당신의 영광을 그들 모든 족속들에게 알게 하신다는 것이었다(19절).
3) 이것은 선교사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신 내용이다. 주께서 택한 자들을 이방에 파송하시고, 그곳에서 믿게 된 자들이 합류하여 주의 거룩한 산인 예루살렘(시온)으로 예물을 드리러 순례하게 되는 시대의 도래를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시온산이 전 세계의 믿는 자의 중심지가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 과정에서 주 앞에 모인 자들 중에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겠다고 하셨다. 흩어진 교회의 이방인 출신 성직자 시대의 도래도 예고하신 것이다(20-21절).
4) ‘주께서 지으실 새 하늘 새 땅’의 출현도 언급되었는데(22절), 이는 제도권의 성전의 유형을 뛰어넘을 새로운 차원의 영적 성전으로서의 교회(敎會) 공동체의 등장으로 보인다. 교회는 주의 몸이고, 그의 지체들의 모임체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곳에서는 주의 구원을 받은 백성들의 이름들이 항상 있을 것이며, 그들이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새로운 차원의 신앙 공동체의 등장을 예고하신 것이다(22-23절 참조).
5) 이런 예배 제도와 성전 시스템의 대변혁은 결국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역사란 큰 영적 대업을 통하여 그 문이 열리었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 체계에서 성령에 의해 시작된 새 하늘 새 땅으로서의 세계 교회 공동체 중심의 예배로 정착되면서, 우리는 정규적인 예배와 성직자의 세계화까지도 성취되었음을 본다(22-23절).
3. 서신서 / 계 21:22-22:5 /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 열린 낙원 ’
하지만 새해에 주시는 계시록의 말씀은 이 땅에 정착된 지금의 나라와 그 교회가 아니다. 그보다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취임하신 주 예수님이 계신 궁극적인 하늘나라와 생명수가 흐르는 곳이다. 이 일은 그 동안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그 낙원에 대한 재소환(再召還)에 관련된 증언이기도 하다(창1-3장 참조). 즉 첫 사람 아담의 타락 후, 인류에게 감추어졌던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가, ‘새 예루살렘’이란 이름으로 그 불완전한 모습을 걷어내면서 그 나라를 대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게시(揭示)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놀랍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생활상이 새해를 맞이한 우리에게 제공된 것인가? 우리가 어떤 의미로 이 천국에 관한 말씀을 받는 것이 좋을까? 이를 위해 먼저 계시록의 증언이 왜 주어진 것인지, 그 동기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 시절에 잔인한 신앙적 박해가 계속되어 순교자와 함께 배교자들도 속출하는 가운데, 자신의 믿음을 보전하려고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던 ‘시련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깊은 위로와 함께 승리할 이유들을 확실히 보여주심으로서 그들이 고난을 뚫고 의롭고 영광의 나라를 제대로 상속하게 되도록, 성령께서 요한을 천국 현장에로 잠시 소환하셔서, 이런 세계를 친히 보고 듣게 한 후, 기록물로 전한 것이었다.
이제 요한 장로를 통하여 보게 된 새 예루살렘의 내부와 생활상의 모습을 축약해 본다 :
1) 그곳은 성전이 없었다. 그리고 해와 달과 같은 빛도 없었다. 놀라운 곳이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성전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해와 달의 빛도 없는 세상도 더더욱 상상 못한다. 하지만 그곳엔 존재 자체가 성전이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이 계시고, 해와 달빛들을 완전 상쇄시킬 그 분들만의 찬란한 빛이 있었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21:22-23, 22:4-5참조).
2) 출입문은 있으나, 들어갈 자와 못 들어갈 자의 구분은 엄격했다(24-27절). 그 성안은 만국에게 출입이 허용되어 있으나, 본질상 그 안은 진리, 공의, 사랑이 지배하는 빛과 낮의 지대이기에, 오직 자기 영광(하나님께 충성된 자)을 가진 자만이 자유로운 삶이 가능한 곳이었다. 곧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예수가 주신 세례를 받은 자들)만이 출입이 허용되었다. 반면에 속(俗)된 것, 가증한 일, 거짓말하는 자들의 출입은 절대 불허된 곳이었다(27,상).
3) 그곳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나온 생명수(生命水)의 강이 길 가운데로 흐르고 있었고, 강 좌우에는 만국을 치료하는 생명나무가 있었다(22:1-2절). 이는 창조시기에 아담이 범죄로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접근이 차단된 바로 그 생명나무 실체였다(창3:22-24참조). 요한은 영광스럽게도 저주, 사망, 질병, 고통, 슬픔, 눈물, 이별 따위가 하나님과 어린 양의 얼굴과 이름 아래의 사는 삶에서 완전히 극복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22:3-5절 참조). 즉 완벽한 복(復)낙원의 길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든든히 마련되어 있음을 확인받은 것이다.
o 새해 이러한 복낙원을 향한 신앙의 아름다운 비전은 우리의 힘겨운 세상적인 삶에도 선한 영향력을 제공할 것이다. 좋은 곳을 바라고 믿고 보유한 이들의 삶과 가치관은 분명히 삶에 선한 역동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맞이할 새해에 대한 대응을 생각해보자.
지금의 상황은 신앙적으로 환란기인가, 태평기인가? 믿음을 지키기에 과연 어느 때인가? 각자의 처지나 시각도 달라서 대답도 천차만별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처한 신앙의 상황은 암흑기로 보인다. 코로나19가 준 가혹한 삶의 채찍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신앙이 참인지 거짓인지, 반석위엔지 모래위엔지를 엄중히 묻고 있다. 그간의 내 신앙이 진리와 말씀위의 것인지, 세상 풍조와 인간 세류위의 것인지를 계속 물어온다.
이런 중에서 오늘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환상들은 우리의 연약해진 신앙에 굵은 지렛대를 세우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런 증언들은 그간 아담 이래 감추어져왔던 낙원의 진면모들이며, 믿음으로 소중히 취할 수 있게 하는 아주 값진 언약들이요 기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나라가 성서의 기록에서 내 가슴과 영혼의 내면에 깊이 심겨진 씨앗이 되게 하자. 그래서 언젠가 하늘 시민권을 행사하게 되는 날, 그곳이 나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