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3:16~21, 미5:2-5, 요일4:7-12
o 세 분문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2021년도 성탄(聖誕)을 맞이했다. 그런데 벌써 3년째 맹위를 떨치면서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빼앗아간 코로나19로 인한 위세가 예수 성탄의 의미를 크게 약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아무리
형편이 그렇다고 해도, 그의 백성 된 우리는 오신 왕을 영접하는 일에 소홀할 수는 없다. 아
니 그럴수록 더 뜨거운 영접이 있어야 하겠다. 이 세상의 원 주인의 귀환 환영 열기에, 어찌
감히 코로나 따위가 끼어 들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과 믿음 때문에 더욱 그렇다.
성탄은 어떤 날인가? 우리의 영적 눈이 뜬 날이다. 이 땅에 성육하신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인간을 향한 그 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
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 앞에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면서, 그러기
에 우리는 이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독생자의 탄생으로 우
리는 무지에서 벋어나 구원의 즐거움에서 살게 되었다. 바로 성탄이 안겨준 귀한 축복이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열심히 배우고 불렀던 찬송가사가 새롭게 떠오른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3장16절’. 성장하면서도 이 성구가 신구약 전체의 대지(大旨)라고 배워왔다. 실로 머
리와 가슴에 박힌 생명의 말씀이었다. 그 믿음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또 전해왔다. 그런 말씀
을 오늘 성탄 아침에 또 다시 우리가 받는다. 그럼에도 그 말씀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는 그 말씀의 의미와 메시지를 추가로 덧붙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
님이 왜 사랑(Love)이신지, 그 원인으로 그의 독생자(his only begotten Son)이신 예수를 이
세상에, 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보내셨는지를 집중해서 밝혀 주고 있다.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審判)하고자 함이 아니라 구원(救援)받게 하고자 하심에서 였다(요
3:17절). 이는 이전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 예고하셨던 바였고, 하나님의 본심(本心)을 전
하는 일이기도 했다(애3:25-26,33절, 사35:5-6절 참조). 그런데, 그 선한 동기나 본심을 성취
하시려는 구체적인 방법(方法)이 놀랍고 새롭다. 바로 당신이 보내신 아들을 죄인인 우리와의
화목(和睦)을 위한 제물(sacrifice for our sins)로서 보내셨다는 점 때문이다(요일4:10).
즉 화목이 가능하려면 누군가 먼저 희생해야 하고 그 일의 성취를 위해 제물(祭物)이 필요한
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적절한 대상을 우리 죄인인 인간들이 아닌 당신 자신의 아들로 선
택하신 것이다. 왜 그런 놀라운 결단을 하셨을까? 우선은 제물로서는 무흠해야한다는 조건도
있었지만, 당신이 보시기에 피조물인 인간들 중에서는 그런 화해를 위한 무거운 중재의 대임
을 감당할 그릇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혹 그럼에도 끝내 인간들에게서 제물이 나와야 한다고 입장이셨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들 전
체를 향한 처절한 심판만 있을 뿐-, 세상이나 인간 구원은 아예 포기하는 일만 남게 된다. 결
국 궁극적인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하나님께 있었다. 최종 결단은 바로 그 무거운 해결의 짐을
당신과 아들이 함께 떠맡기로 하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최고의
명예와 지위를 취득하셨고(요일4:8), 온 천하로부터는 영광과 존귀를 취하게 되셨다.
성탄은 그런 하늘의 최후의 결정을 온 세상 만물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신 날이다. 결국 하나님
은 하늘 영광중에 계신 무흠(無欠)한 아들(성자) 그리스도를 인간이 되게 하셔서, 당신과 세상
모든 죄인들과의 관계 소통(疏通)의 길을 열게 하셨다. 그러기에 성탄하신 메시야 예수는 결국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하여 죽으러 오신 거룩한 제물이었다. 세상의 영광을 받아 누리고
자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러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다(요1:29).
따라서 그의 오심은 처음부터 남달라야만 했다. 인간의 피가 아닌 성령에 의한 탄생이 필요했
고, 동정녀란 모태가 필요했다. 처음부터 하늘의 뜻에 맞선 땅의 불의한 세력들의 숱한 공세
를 감당해야만 했다. 외국에 피난가고, 가난과 고난의 삶의 여정을 감내해야 했으며,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이 땅에 세우는 일에 당신의 삶을 바쳐야만 했다. 인간의 옷을 입은 하나님
아들의 양면(兩面)의 모습들도 자연히 ‘기적, 표적’이란 이름하에 드러낼 수밖에 없으셨다.
하나님이 일찍이 택하신 무리들을 만나셔서, 제자삼고 가르치며 그의 미래 동역자들로 준비시
켜야만 하셨다. 하늘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양육하시며 불쌍한 삶을 사는 길 잃은 무리들에게
생명과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 지를 보여주고 맛보게 해주셔야만 했다. 그리고 복낙원의 길
을 여시려는 그의 꿈과 비전을 저해하려는 모든 어둠의 세력과의 최후의 대전도 받아들여야만
하셨다. 바로 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임 당하시면서 해내셨다.
결국 오늘 성탄은 제일 아담에 의하여 망가진 인류사를 복원시키고자 오신 제이 아담이신 그
리스도 예수의 세계를 활짝 여신 새 역사의 날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
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 위해 오신 예수 성탄의 이런 놀라운 은혜를 그져 받을
수만 없는 것이 그의 택함 받은 우리들의 운명이기도하다. 그의 목적과 꿈을 전수받아야만 하
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제 오늘의 말씀들을 통해서 그와의 공유할 생명의 길을 찾아야겠다.
1. 복음서 / 요 3:16-21 / “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 ”
1) 기자 요한은 성탄(독생자 예수를 보내심)의 분명하고도 거룩한 목적이 무엇임을 밝힌다. 바
로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16-17절). 죄인들을 향
한 심판이나 멸망을 위한 파송은 결코 아님을 역설하였다.
- 그 때 성부인 하나님은 유일한 아들 성자 그리스도를 인간의 옷을 입히셔서, 세상을 향한
화목 제물로 보내셨다(요일4:9-10참조). 이 성탄의 행위로, 하나님은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에
당신의 화해와 화목을 위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그게 사랑이요 빛이요 진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주도적인 사랑의 손을 내 밀어주셨다. 따라서 이제 공은 세상과 인간에
게 넘어왔다. 공을 어떻게 받느냐가 이제 인류의 큰 숙제가 됐다.
2)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란 말은 매우 특수하고 절대성을 갖는 주목할 만한 표현이다. 하나
님은 본래 모든 만물의 지으셨지, 당신의 몸으로 어떤 생명체를 친히 낳는 일은 없었다. 하지
만 ‘유일한 예외(例外)’가 있었다. 영원자로서 바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 그는 깊은 뜻
속에서 당신의 거룩한 동역을 위하여, 당신의 몸으로 친히 한 생명을 생산하셨다(낳셨다). 실
로 하나님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독생자를 탄생하신 대 사건이었다!
- 이 일은 당신을 닮은 신적 생명체 한 분의 등장을 기꺼이 선택하셨음을 말한다. 마치 부모
에게 자식의 출생을 대비함과 흡사했다. 이 일로 인한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은 생명과
만물을 만드신 기능자(技能者)의 위치만이 아니라, 생명을 낳고 양육하시는 어버이로서의 사랑
(Love)도 제대로 보여주실 수 있는, 전능자이면서 온전하신 창조주가 되신 것이다. 자식은 물
론 당신의 피조물들을 위해서는 생명도 내어놓을 수 있는 아가폐적 사랑을 보유하신 참 하늘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신의 아들의 낳으심의 의미는 매우 컸다-!
- 따라서, 당신이 지은 인간들이 비록 범죄와 어리석음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깊은 인내심 속에서 인간들이 낳고 자라며 성장하는 모습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지켜
보실 수 있으셨다. 그러기에 죄인인 인간들에게 우선 구원의 길과 기회를 부여하시는 일이 범
죄에 대한 심판보다는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신 것이다. 긍휼과 자비의 주님의 참 모습을 보이
게 되셨다. 그런 하나님이셨기에, 독생자를 인간들에게 보내는 성탄의 결단을 베풀어주셨다.
3)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결단인 성탄은 결국 인류 사회를 두 부류의 집단들로 양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일은 진정 모두가 구원 받기를 바라던 하나님의 본심에는 맞지 아니하는
대목이었지만, 그러나 결국엔 응답해야할 인간들의 양분된 태도 때문에 피할 수 없이 발생한
현상이었다. 곧 ‘예수를 받느냐 거부하느냐’로 양분된 것이다. 이는 곧 무엇을 말하나? 하나
님과 그의 사랑을 수용하느냐, 아니면 등지고 거부하느냐의 문제가 된 것이었다(18-21절).
4) 믿는 자는 당연히 심판이 면제되고 구원이 부여된다(18절,상). 그는 진리를 따르는 자로서,
빛으로 나아오게 됨으로서 그 행위의 정당성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21절). 하지만 믿지 않는
자는 아주 다르다. 그는 결국 빛과 은혜를 거부함으로서 자업자득(自業自得)형의 심판과 정죄
의 자리를 스스로 꿰차고 들어앉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18절,하-20절).
5) 그러면 그는 어찌 그런 은혜의 기회를 등지고 걷어차는 짓을 할까? 그 특징들이 드러났다.
그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에, 평소 늘 빛보다는 어둠을 사랑하고 불의와 친하게 지낸다. 또
한 마음으로 빛을 미워하며 멀리한다. 심하면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거
기에 가면 자기들의 정체가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시대에 그런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숱하게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신 예수도 본다.
2. 구약 / 미 5:2-5 / “ 이 사람(메시야)은 평강이 될 것이다 ”
선지자 미가는 오실 분의 출처와 근저(根柢)에 대하여 일찍이 이렇게 언급했다(2절). 그는 다
윗 왕가에서 태어날 메시야 임금일 터인데, 그의 집안은 유다 족속 중에서 아주 작은 그룹인
베들레헴의 에브라다(에브랏인들 집안의 거주지) 출신이다(삼상17:12,룻1:2,4:11-22참조). 그리
고 그의 출현으로 시작된 그의 통치가 온 세상에 어떻게 영향을 주게 될 지도 예견하였다.
2) 오실 분의 근본(뿌리)는, 그러한 인간적 출신과는 무관하게 상고(上古-from of old)와 영원
(永遠)에 있음을 밝혔다(2절,하). 이런 표현은 하나님께서 태초 이전에 친히 낳으신 그의 유일
하신 아들 그리스도에게나 적합한 증언을 선지가가 예언한 것이다(마2:5-6,요1:1-2,14 참조).
3) 하지만 그가 여인(처녀/사7:14참조)에게서 탄생하기까지는 백성들의 숱한 고통의 시간들을
겪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돌아와 자리한 후에나 이루어질 것(카이로스)이다(3절).
4) 오신 그는 여호와의 능력과 이름의 위엄에 의지하여 그가 돌보아야할 온 세계 모든 백성들
을 목양(牧羊)할 것이다. 그의 영역과 다스림은 창대하고 땅 끝에 이를 것이다(4절). 그는 그
들에게 평강(平康-peace)이 되실 것이다. 그의 안전한 보호 아래 거할 것으로 보았다(5절,상).
5. 서신서 / 요일 4:7-12 / “ 서로 사랑해야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 있음을 입증한다 ”
요한서신의 저자는 이제 우리 주님의 성탄을 통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입은 모든 성도들을 향
하여 이렇게 그의 깊은 마음을 전한다. 주님이 화목(和睦)제물로 우리에게 오셔서 몸을 내어주
셨으니, 이제 우리도 이웃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화해를 실현하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며 살
자고 말했다. 그래야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점이 입증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영으로 계신 주님까지도 이웃에게 보여드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의 교회들은 헬라계 이단인 영지주의의 강한 도전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들
은 육체로 오신 예수를 부인하고, 영으로서의 그리스도만 강조한 집단이었다. 영만 구원 받으
면 육체의 행위는 전혀 문제없다는 완전 이원론적 입장으로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었던 것이
다. 그 바람에 그들에게는 몸으로 하는 이웃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과 섬김은 철저하게 외면하
였다. 예수께서 성탄하신 이유를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대항 무기가 무언가?
형제 사랑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일이 교회가 취할 가장 강력한 대응
무기였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과 죄인들과 어렵고 고통하는 이웃들과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음
을 치열하게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이단 영지주의를 극복한 참 신앙을 확증하는 일이었다.
1)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며 뜨겁게 권고하였다!(7절). 까닭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매체가 된다고 역설했다.
2) 서로 사랑의 방법은 하나님이 성탄 때 친히 보여주셨던, ‘먼저 사랑’하는 방식이다(10절).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겠다면서, 그 사전 조건으로 이것저것을 따진 후, 거기에 따라
사랑하려고 하셨다면, 우리 중 그의 사랑을 받을만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다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논리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서로에게 사랑부
터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세상 죄인들(?)을 대하는 한국교회의 행태들은 여러모로 비성서적이고,
반(反)사랑적인 모습을 보이는 듯싶어 두려움이 앞선다. 선 사랑의 힘과 지혜를 상실하고, 저
바리새인처럼 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사전 검증 후 사랑하겠다’는 접근법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어떨까? 빈 그물뿐일 것이요, 비복음적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도 형
제 사랑을 하자고는 외친다. 하지만 방법은 비성서적인 경우가 압도한다. 그것이 큰 문제이다!
o 성탄절기를 어떻게 맞이할까? 우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받았는지를 되새김하면
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일에 열심하기를 다짐하자. 하지만 그 이웃 사랑은 하나님께서 성
탄에서 보여주신 방식대로, 먼저 상대에 대한 조건 없이 사랑부터 행하는 방식이 되도록 나의
체질개선을 도모하는 자세 확립부터 우선하자. 분명 희망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