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애 3:19~33, 눅1:68-79, 히 6:9-20
o 총회 및 한국교회 관련주일 – 성서주일 & 인권주일
o 세 본문 말씀의 분석(分析)과 이해(理解) :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코로나와 함께한 올 해도 거의 저물어간다. 마침 우리는 성서주일과 인권주일을 지키게 된다. 성서(聖書)와 인권(人權), 이 둘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복음의 양 날개처럼 받을 수밖에 없는 주제들이라는 점에서, 받기에는 항상 버겁다. 성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양심을 대면하게 하는 거울이라면, 인권은 더불어 사는 우리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을 일깨워주는 지침이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양대 축(軸)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 일과 인간 일이 따로 도는 것은 아니다. 자식 일과 부모 일이 따로 도는 것이 아님과 같이, 인간들 일은 사실 전적으로 하늘 아버지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인권 확립은 정의, 평등, 평화에서 취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지고한 관심 사항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인권의 기준은 세속의 잣대로만 접근하면, 답을 얻지 못한다. 그 기준이 이기심과 탐욕과 강자의 힘과 다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우면서 인권 보호를 말하는 것만이, 그래도 힘을 낼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복음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교회의 역할이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다.
며칠 전(12.2), NCCK의 인권위원회가 성소수자 단체인 차별금지법 제정연대에게 인권상을 수여하였다. 이런 시상은 깨어 있는 교회만이 할 수 있었다. 현재도 숱한 다수의 교회들이 앞장서서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국회에서 추진하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있는 데에도, 이런 단체에 인권상을 수여하는 일은 그 상의 가치를 높혀 준 것이다. 대표 수상한 이가 인사말에서, ‘우리 성소수자들 중에도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라는 증언은 우리 교회의 배타적인 현실을 비추어볼 때, 매우 가슴 아프게 들렸다.
오늘 말씀들은 우리 사회의 고통(苦痛)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현재의 고통만을 어떻게 보고 상대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과 함께, 고통을 ‘절망으로 볼 것이냐, 희망으로 볼 것이냐’에 대한 시각도 열어준다. 이 문제는 우리가 왜 여전히 메시야를 다시 기다리는 지에 대한 대답과도 연관된다.
문제는 고통에 대한 신학적(神學的) 접근이 이루어지느냐에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인다. 그것은 궁극적인 희망과 회복을 탐욕적인 인간에게 두지 아니하고, 의(義)로우신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 때문이다. 특히 고통이 인간의 죄악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보아야 하고, 거기에 따른 인간들의 깊은 자성과 회개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의 개입에 따른 새 역사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오늘의 교회가 이 고통하고 방황하는 시대를 향하여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이 고통과 절망을 유도하는 어둠의 세력의 배후가 바로 죄(罪)와 반(反)신적인 타락의 세력에 의한 것임을 직시할 수 있어야하고, 또 그것을 극복하고 치유와 갱신의 힘으로 반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한없이 부족함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에 오직 역사의 주(主)이자 생명의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고백할 수 있을 때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용서와 사랑의 본심을 꿰뚫고 보면서, 그 품과 긍휼과 자비로 우리를 품어주셔야 우리는 비로소 악의 저주의 고리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구약의 애가(哀歌)서는 성서 안에서도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회개의 능력을 실증해 주고 있는 가장 주옥같은 내용이다. 한(恨)의 백성들을 대리하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러한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믿으며 희망을 가지는 미래지향적인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가진 희망의 동력은, 뜻밖에도 자기 조상들에게 예전에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로운 추억들을 회상(回想)하는 일이었다(21절).
그런 회상에 깊이 젖어들면서 선지자는 그 고난의 중심에서 세상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분별(分別)한다. 자신들의 이런 고통은 본래부터 자신들의 범죄에 의한 것이었지(39절),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음을 알았다(33절), 다만 새로운 그릇으로 재생시켜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성숙히 드러내게 하고자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창1:28-). 따라서 고통 속에서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메시야를 기다림과 자신의 영적 무장이다.
복음서에서의 늙은 제사장 사가랴는 노년에 극적으로 얻은 아들 요한의 탄생을 경험하면서, 성령에 의해 터져 나오는 승리와 희망의 찬양을 목놓아 부른다. 태어난 자기 아들의 역할이 오실 메시야의 전조(前兆)임을 확인하면서, 이 일이 오래 전에 자신들에게 주신 여호와의 약속과 맹세가 자신들 안에서 이제 성취된 일로 보고 감격했기 때문이었다(78-79절 참조).
히브리서 기자도 당시의 잔인무도한 박해와 억압 속에서 배교자들이 양산되고, 믿음의 정체성도 무너져가는 상황을 직시하면서, 그들의 중심을 붙잡아 줄 말씀들을 전한다. 그것은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이미 그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말씀의 두 형식인 약속과 맹세란 변할 수 없는 두 가지의 보증들이 될 내용들이었다(18절,1:72-73참조). 그런 소망의 말씀들은 영혼의 닻(anchor)같아서, 그들 모두를 이미 하나님 거룩한 면전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 구약 / 애 3:19-33 / “그것을 기억하고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내 소망이 되었다”
당시 유대민족은 미증유의 참담한 절망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북 왕국의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무참히 패망한 이후, 150년이 지난 이후에는 남 왕국인 유대마저 바벨론 제국의 무자비한 말발굽아래 패망당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숱한 인재들이 바벨론에 포로와 인질로 끌려갔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무참히 파괴당하면서(B.C 587), 도심지는 그야말로 황폐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게다가 이웃 부족 국가들마저 수시로 쳐들어와 약탈과 공격으로 그곳의 남은 자들을 유린했다. 하지만 그들은 방어할 기력마저 없었다. 애가서는 그런 슬픔과 통한의 현장 예루살렘의 상황을 전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어느 시인(예레미야로 대신함)이 호소하고 탄식하며 구원을 호소했던 것이다(詩歌).
1) 그의 처지는 실로 눈물과 고통 없이는 말할 수 없는 처절한 상황이었다(3:1-18절 참조),
그런 개인적 처지가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19절)란 증언 속에 다 담겨 있었다. 그는 예전에 민족의 죄악을 통렬히 질책하면서 망해야 한다고까지 외쳤던 일로 인하여, 궁중의 감옥에까지 투옥되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 바람에 그는 집권층에게는 물론 백성들에게까지 배척과 미움의 표적이 되었다. 그런 불행의 원흉처럼 취급당했었다.
더 힘들었던 것은 자신에게 그런 선포의 멍에를 부여하신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당하는 고립된 위치에 처해 있었던 현실이었다. 그의 고통과 외로움은 저 겟세마네와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의 고독과 절규와 흡사하다. 때에 따라서는 ‘한 없이 냉정(冷情)하신 하나님’을 온 몸과 마음으로 견디어 내야만 하는 하나님의 종들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런 외나무다리와 같은 처지를 그가 어떻게 통과했을까? 그 문제 해결에는 앞이 아니라 뒤를 보며 회상의 시간을 갖는 일이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현재의 고통에 대한 답을, 지나온 옛적에서의 발자취에 대한 풍성한 하나님과의 회상과 추억속에서 찾은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처음과 마지막의 주이셨고, 역사와 시간의 주관자였기 때문이다
2) 그는 자신의 시각과 마음을 다잡게 될 주제를 이전의 하나님이 자기 조상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의 역사를 통하여 얻어냈다(21-23절 참조). 즉 지금의 고통만 보면 낙심뿐이지만, 예전의 풍성했던 아름다운 회상들을 추억하고 가슴에 품으니까, 그게 소망이 되었고 신실하신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에 대한 신뢰가 되살아나면서, 현재의 자기들이 그런 범죄 속에서도 진멸되지 않고 그 정도의 고통에 머물고 있음 자체가 감사할 일로 보게 된 것이다
3) 그러자 이 선지자는 뜻밖에도 하나님를 찬미(讚美)하게 된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24-28절).
4) 그러면서 그는 자신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하고 깊은 고난의 멍에(yoke)에 대하여서도 새로운 인식의 접근을 하게 된다. 그들에게 부여된 고난은 범죄 이후 끝없이 타락하던 죄성에 빠진 자신들에게 영적 각성을 주는 기회였음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더 참담해질 수 있는 자신들에게 한발 앞서서(-27절, 젊었을 때의 멍에란 표현) 패망의 과정을 통하여 다시 배우고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심으로 현재의 고난의 의미를 보게 된 것이다(28절).
5) 그 결과 이런 각성은 그를 새로운 교훈에 대처하게 하였다. 한없이 겸손하라(29절). 피하려거나 회피하려 말고, 수용하라(30절). 주께서 자신들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심을 믿고, 그의 긍휼하심에 따라 풍성한 사랑으로 임하실 터이니, 다만 기다리라(31-32절). 그러면 여호와의 본심이 ‘인생들을 고생하게 하는 일이 있지 않음’을 바로 알게 되리라.(33절).
2. 복음서 / 눅 1:68-79 / “돋는 해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결국 이 선지자의 예언이 현실로 성취되는 때(카이로스)가 왔다. 오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순전히 고대하며 평생을 살아온 늙은 의인(義人) 부부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선택하셔서(눅1:5-7절 참조), 당신의 전위대원(前衛隊員)인 요한을 그들의 아기로 세상에 보내셨다. 본문은 그 아기 요한이 탄생하는 순간, 아비인 제사장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찬양과 예언으로 새 시대가 임했음을 선포한 내용이다.
1) 그의 예언에는 다음의 두 가지 차원의 내용이 잘 담겨 있다.
① 구원의 뿔로 오신 메시야의 탄생은 다윗의 집(후손)을 통하여 이루시겠다고 하신 오랜 구약 예언자들의 성취에 따른 것이다(68-70절)
② 그는 우리를 원수에게서와 미워하는 자들 모두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실 분인데, 이 일은 여호와께서 일찍이 조상 아브라함에게 언약과 맹세로 확증하심에 따른 것이었다. 그의 구원에 힘입어 자신들은 종신토록 주를 성결(聖潔)과 의(義)로 섬기게 될 것이다(71-75절).
2) 아들인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고, 주의 길을 예비할 터인데, 주의 백성들에게는 죄 사함으로 구원을 알게 할 것이다(76-77절,3:3참조) 이로써 돋는 해(민24:17,사60:1-2,마2:2,요1:4,9,12,12:46참조-메시야 예수)가 오셔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탄식하는 자들을 일으켜서, 평화의 길에 들어서게 하실 것이다(78-79절).
3. 서신서 / 히 6:9-20 / “ 믿음과 인내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으라 ”
본문은 신앙 때문에 박해와 탄압이 강화되고, 시험에 빠진 이들의 배교행위가 광범위하게 번져가는 상황에서, 어떤 자세로 성도의 신앙행진이 도중하차되지 아니하고, 목적지인 하나님 나라에까지 이를 것인지를 제시하는 말씀이다. 여기에는 오직 남은 자에 대한 격려와 애정, 그리고 끝까지 붙잡고 감당해 주어야할 신앙의 과제와 태도가 무엇인지에만 집중했다.
1) 주님은 그들 남은 자(remnant)들이 구원에 속한 더 좋은 것을 굳게 보전하고 있음을 칭찬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인 성도들을 사랑하며 산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은 그들이 끝까지 믿음과 인내 속에서 지켜냄으로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았던 사람들과 같이 되어야 할 행위라는 점을 지적하신다(9-12절 참조).
2) 인간을 나태와 변질로 몰아가는 것은 의심(疑心)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자기 자신을 걸고 맹세로서 말씀하셨던 여호와의 축복을(14절), 오랜 인내 끝에 약속으로 받아낸 아브라함을 승리자의 모델로 제시했다(13-15절). 하나님은 당신이 약속하고 맹세한 일에는 절대 거짓말을 못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 점을 큰 위안과 희망의 닻(anchor)으로 삼고, 견고한 믿음으로 우리 앞서 온갖 고난의 멍에를 십자가로 이겨내시고 하늘의 휘장(영생) 안에 들어가신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을 따라야 하겠다(17-20절). 그 믿음 안에 있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의 불의한 힘과 억압에서부터도 휘둘리거나 절망에 빠질 필요가 없다.
o 고난이나 역경은 괴롭고 힘든 것이다. 그 자체 만에 몰입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능히 상쇄할 전혀 다른 차원의 긍정의 힘이 그 속에 개입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다. 갑자기 돌변하면서 나를 울게 하고 감격하게 하고 찬송하게도 한다. 사실은 그것이 나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깨우치고 성숙하게 하고 보다 새롭게 하려고 그토록 내 안에서 나를 정신 차도록 흔들어 댔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난은 나에게 원수가 아니라 좋은 벗이다. 문제는 내 안에 와서 그런 시각의 대 변화를 안겨 줄 하이 터치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예수와 성령이시다! 그가 내게 오셔서 내 뇌(腦)의 회로(回路)를 불평과 원망에서, 베풀어 주신 은혜들에 대한 풍성한 회상들로 조정해주시면 된다. 이제 고난과 슬픔을 대항해 낼 회상과 추억의 힘도 키우자. 아울러 평소부터 하나님의 풍성했던 사랑의 경험들을 고통의 치유 재원으로 사용하도록 계속 축적해가자.